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사선암(四仙岩)과 상산사호(商山四皓)!

풍월 사선암 2006. 6. 6. 10:05

 

   

 

< 해발 900m에 위치한 사선암! >

 

< 사선암은 숫바위라 불리고 옆에 자리잡은 암바위 모습.>

 

 

  

사선암(四仙岩)!

웅장한 석벽은 과연 지도에 표시될만하다. 흠이라면 눈길 닿는 석벽마다 이름 석자를 크게 새겨놓은 것. 이시발(李時發)이란 이름이 있어 다행이다. ‘시(時)’에 특히 악센트 주고 소리 내어 읽어 마땅하므로. 고개 젖혀 우러러보다 뒤편으로 오른다. 낡고 가는 밧줄이 달려있다. 밧줄은 크게 믿을 바가 못 된다. 막판 살짝 트래버스 하는 데는 까다롭다. 사방 훤히 열리는 너른 암반이다. 암반 가운데에다 바둑판을 새겼다. 1,300년 전의 일이다.<펌글> 新羅 孝昭王때 四仙(永郞, 述郞, 南郞, 安詳)이 놀고 간 자리다.

 

< 20m 높이 직립형 바위로서 칼로 자른 듯 하다.>

 

 

< 네분의 신선이 바둑을 즐겼다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면적은 5-6평은 되어 보인다.>

< 동굴(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나보다) >

 < 선암 암반위에서 바라본 무풍면 일대 >

 < 사선암 암반위에서 바라본 벌한 마을쪽(성산 배씨 집성촌이라 한다) >

 < 등로 위에서 본 사선암 상부 >



 

상산사호(商山四皓)! 

 

무주의 사선암은 "주위가 절경이어서 중국의 상산사호가 놀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였는데 진시황 때 네 사람(神仙)이 우리나라에 온 기록은 없다. 사선 중 영랑은 일찍이 향미산(向彌山)에 들어가 도를 닦았는데 90세에 얼굴빛이 어린애 같았다고 하며 마한의 신녀 보덕(寶德) 등과 같이 속세 밖에서 노닐었다고 전한다. 그들은 도를 닦기도 하고 노래와 음악으로 즐기기도 하고 산수에 노닐며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하였다. 

 

◀ 상산사호도의 또다른 모습. 조선후기작

 

상산일노(商山逸老)란 상산에 숨어사는 노인이란 뜻으로써 저 유명한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지칭한 것이다.  기원전 2백년경.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고, 서적을 불사르고, 불평하는 선비들을 묻어 죽이는 등 포학무도한 정치를 하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세상을 등지고 심산유곡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그 시절 섬서성 상현(商顯) 동쪽에 있는 상산(商山)의 깊은 산중에 네 사람의 은사가 난리를 피해 숨어살고 있었으니 그 이름은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각리선생(角里先生), 하황공(夏黃公)이다.


이들은 세상의 근심걱정을 잊어버리기 위해 약초캐고 바둑 두는 것으로써 소일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상산사호(商山四皓 = 상산에 사는 머리 흰 네 노인)라고 했다.


중국의 고전 악부(樂府)에는 상산사호가 나물을 캐면서 불렀다는 노래가사가 ‘사호가(四皓歌) 또는 '채지조(採芝操)'라는 제목으로 후세에 전해오고 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진시황이 죽고 세상은 어지러워져 각처에서 영웅호걸들이 난리를 일으켰으며 초(楚)나라 항우와 한(漢)나라 유방이 패권을 다투다가 한나라가 승리하여 천하를 평정했다. 한고조 유방은 황제위에 오른 뒤 상산사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초청했으나 상산사호는 황제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더욱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