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백두대간 대장정] 빼재~우두령…봄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

풍월 사선암 2006. 12. 9. 00:11

  [백두대간 대장정] 빼재~우두령…봄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

빼재(930m)에서 산행 채비를 마치는 순간 예상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봄비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아리다. 1000m에 가까운 고도는 완강하게 봄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도로에 헐린 산허리를 밟고 백두대간 마루에 선다. 아직 이곳 대간의 등마루는 겨울잠에서 다 깨어나지 않고 있다. 봄의 북상 속도가 고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구간 주요 산들의 높이를 살펴본다. 삼봉산 1264m, 대덕산 1290m, 민주지산 삼도봉 1177m인데 그 사이 사이에도 1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예닐곱은 된다.

이번 취재에 동행, 처음으로 백두대간 트레일을 걸어본다는 한 사람은 첫날 산행 후“이 정도 강도면 지리산 종주를 서너 번 하겠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삼봉산(1264m)의 정상 표지석에는 '덕유삼봉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봉우리까지를 덕유산 군에 포함시킨 발상인 것 같다. 산경표에도 덕유산 옆에 삼봉이라 병기돼 있다.


삼봉산을 지나면서 조금씩 키를 낮추는 대간의 등성마루는 동쪽으로 크게 돌아 소사고개를 향하면서부터는 낭떠러지에 가까울 정도로 급전직하한다. 등성마루 가까이는 아직 채 눈이 녹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신경을 곤두세운다. 눈을 벗어나자 더 미끄러운 진창이다. 봄산행의 통과의례다.


청보리밭을 가로질러 소사마을로 내려선다. 보리 수확 후는 여름 배추로 가득할 밭이다. 고랭지 채소 농사로 이름 난 곳이다. 보리밭 옆에 호식총(虎食塚)으로 여겨지는 돌무더기가 보인다. 시루가 얹혀 있는 것으로 보아 호환을 당한 사람의 무덤인 것 같다.


민속학에서는 호식총 위의 시루를 하늘의 상징으로 본다. 그리고 시루의 구멍에 물레에서 쓰는 쇠꼬챙이를 끼워 창귀(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귀신)를 누른다고 한다. 하지만 달리 볼 수도 있다. 떡시루로 포식을 시켜주는 것이라고. 만약 이 돌무덤이 호식총이 아니라면 '산멕이'일 것이다. '산을 먹인다'는 뜻의 산멕이는 산악신앙의 하나로 산제의 한 형태다. 실제로 강원도 양양의 산골마을에서는 호랑이에게 떡을 해서 먹이는 산제를 행한다고 한다.


소사고개를 지나는 백두대간 종주자들이라면 반드시 들르게 되는 구멍가게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는 동네 사람에게 귀동냥을 한다. 경남 거창군 고제면 탑선마을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가 이웃하고 사는 이 동네는 말씨도 한 가지란다. 전북의 무풍면 사람들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제통문 넘어서면서 확연히 전라도 말로 바뀐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신라 땅이었던 무풍은 본디 무산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무풍현으로 고쳐져서 지금의 김천인 개령군에 속하게됐다고 한다. 그 뒤 1414년(조선 태종 14)에 무주현으로 편입됐고 1914년부터 무주군 무풍면이 됐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인위적인 행정 구역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산줄기로 갈라지지 않은 한에는 한 마을 정서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왕조의 절대 권위보다 더 큰 산의 영향력이다. 이것이 백두대간의 진실이다.


부항령에서 삼도봉을 향하는 발길이 무겁다. 1000m가 넘는 봉우리를 두 개나 거푸 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제와 달리 기온이 높기 때문이다. 눈(眼)은 겨울, 몸은 봄, 발은 여름이다. 그러고 보니 하루 사이에 산색이 바뀐 것도 같다. 산허리 곳곳엔 생강나무가 꽃망울을 다 내놓고 있고 찔레도 손을 내밀어 햇빛을 모으기에 바쁘다.

 

드디어 삼도봉(1177m). 민주지산의 봉우리로 백두대간의 줄기를 이루는 삼도봉은 경북(김천), 전북(무주), 충북(영동)에 걸쳐있다. 정상에 삼도봉 화합탑이 서 있는데 오히려 지역감정을 일깨우는 것 같아 영 보기에 거북하다.


잔뜩 구름 낀 하늘. 또 비가 올 것 같다. 날씨도 초겨울로 돌변한다. 미역국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다음 서둘러 짐을 꾸린다. 조끼를 입고도 모자라 재킷까지 꺼낸다. 모자까지 단단히 썼는데도 오한이 들 정도다.


드디어 질매재(730m).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다. '질매'라는 이름은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다.

이 말이 한자화하여 우두령(牛頭嶺)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두 이름이 별개인 양 둘 다 표기돼 있다.


고갯마루 아래의 산허리엔 진달래 꽃불이 환하다. 나는 그 꽃불 하나 가득 담아서 길마 위에 올라앉는다.

 
 
>> 풍수 - 무풍은 십승지지(十勝之地)

"수십 군(群)의 백성이 모두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


'정감록'에는 우리 국토의 열 곳을 구체적으로 지점하여 십승지지(十勝之地)라고 일컬었다. 민중들은 정감록의 십승지지론을 신봉하여 실제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긴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고, 현지를 답사해 보면 그 후손이 살고 있는 사례도 있다. 그 열 곳의 십승지지 중에는 백두대간을 끼고 있는 골도 여럿 있으며, 덕유산과 삼도봉에 에워싸인 무풍 역시 십승지지의 한 장소로 꼽혔다.


무풍은 조선시대의 도로교통 조건에서 대로(大路)와의 접근성이 떨어져서 지리적 오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큰 하천을 끼고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비교적 넓은 분지지형을 갖추고 있다. 수계(水系)를 보면, 남대천의 지류가 주위의 산복에서 발원하여 구불거리면서 흐르다가 무풍에 이르러 합류하여 면소재지를 에워싸면서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형국이라 풍수적인 좋은 조건도 구비하고 있다. 그래서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말하기를, '남사고는 무풍을 복지(福地)라 하였다. 골 바깥쪽은 온 산에 밭이 기름져서 넉넉하게 사는 마을이 많으니, 이 점은 속리산 이북의 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16세기에 국가에서 편찬된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옛날 거란병과 왜구가 침략하였을 때 근방의 수십 군(群)의 백성이 모두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명 - 오지의 대명사 '무주'
 

무주는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과 함께 남한 오지(奧地)의 대명사다.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기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 구천동에서 왔나?"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 무주의 무풍은 그야말로 심심산골. 백두대간의 한 자락이 덕유산과 삼도봉 사이에서 활 모양으로 휘어 돌며 싸안은 면(面) 단위의 산골이지만, 그래도옛날에는 당당히 사또(현감)가 다스렸던 하나의 행정 지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무산현으로 불렸던 이곳은 삼국통일 후인 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선 무풍현으로 바뀐다. 두 지명에서 '무'는 같은 글자이므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는'산'과 '풍'인데 이 두 글자가 어떻게 대역이 될까?


'무풍(茂豊)'에서의 '풍'을 '풍성함'의 뜻으로 보면 '무산(茂山)'과의 대역이 어려워지고 만다. 학자들은 여기서의 '산'과 '풍'을 똑같은 뜻으로 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연구'(신태현 저)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무산(茂山). 무(茂)의 훈은 '성 '. 산(山)의 훈은 '뫼'. 무산(茂山)을 '무풍(茂豊)'으로 개명한 것은 '풍(豊)'이 '풍(酉豊)'의 약자로 그 훈이 '술'이므로 '풍(豊)'으로써 '수리(봉우리)'에 훈차한 것이다. 따라서 '무산'이나 '무풍'은 '성한뫼'가 그 원이름이다."


즉, '풍'을 '풍성함'의 뜻으로 보지 말고, '산(봉우리)'이란 뜻의 '수리'로 보라는 뜻이다.

'성한뫼'에서 '성한'은 '성하다(많다)'의 뜻임은 말할 것도 없다. 즉, '높고 많은'의 의미일 것인데, 지금의 무풍 지역으로 보면 그 지형상 딱 어울리는 땅이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