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십승지(十勝地) 무주군 무풍면

풍월 사선암 2007. 7. 8. 01:09

병풍을 펼처 두른 듯 아늑하고 풍요로운 고장

- 십승지(十勝地) 무주군 무풍면 -  

 

반딧불이가 살아 숨 쉬는 생명존중의 땅 무주읍에서 국도(구천동 가는 길) 30번을 따라18Km 가다보면 좌켠으로 무풍면 초입에 이름 그대로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구천동33경중 제1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이 보인다.

 

통문(通門) 안쪽은 신라 땅(무풍)이고, 바깥쪽은 백제 땅(주계)이었다. 이곳에서 7km를 더 가면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 중의 하나인 무주군 무풍면에 이른다.


속리산에서 남하(南下)하는 소백산맥은 추풍령을 넘어서 황악산, 민주지산을 일으키고, 무주 땅에 와서는 삼도봉(1,181m), 대덕산(1,290m) 삼봉산(1,254m), 덕유산(1,614m)으로 이어지는 산맥으로 반원을 그리면서 휘어졌는데 무풍은 그 반원의 중심점에 위치해 있다. 무풍은 동남쪽이 소백산으로 막혀있고 서북쪽도 소백산맥의 지맥으로 둘러싸여 완전히 산속에 갇힌 땅이다.


남사고(南師古)는 무풍(茂豊)을 복지(福地)라고 했다. 동네 바깥쪽은 기름진 밭이라 부촌이 많으며 속리산 이북의 산마을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정감록의 감결(鑑訣)에 따르면 십승지<병화와 전염병이 들어오지 않고 흉년도 들지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곳> 중 여덟 번째로 무주 무봉산(舞鳳山) 북쪽 동방(銅傍) 상동(相洞)을 꼽고 있다.


그런데 정감록을 비롯한 여러 비결에 실려 있는 무풍의 십승지 위치 표현이 실로 아리송하다.「유산록」에는 무풍의 북쪽에 있는 방동(方洞)이라 했고, 「남사고비결」에는 무풍의 북쪽 골짜기 일대 덕유산 내맥이라고 했으며, 「징비록」에는 무주 무풍 북쪽 방은동(防隱洞) 덕유산내맥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무풍에 대한 한자의 표기가 무성할 무(茂)와 풍성할 풍(豊)자 대신 춤출 무(舞)자와 바람 풍(風)자 혹은 무(舞)와 풍(豊)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음은 같으나 글자를 달리 쓰게 되었던 원인은 당시 민간에서 그렇게 써 왔기 때문일 것이리라 생각된다.


여러 비결을 종합해 볼 때 무풍 십승지와 위치는 무풍 북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무풍은 무풍현청(茂豊懸廳)이 있던 무풍읍내를 가르킨다.


옛 무풍은 지금의 면사무소 위쪽 시장이 있는 현내리 이었다. 그런데 현내리 북쪽은 십승지가 될 만한 깊은 골짜기도 없고 으슥한 계곡도 없다. 그렇다면 비결(秘訣)에서 말하는 무풍십승지는 과연 어디일까·····


택리지(擇理地)에 무풍령(茂豊嶺)이 나오는데 속리산의 화령, 추풍령이 작은 영(嶺)이고, 덕유산남쪽의 육십령, 팔령치가 큰 영이다. 이 무풍 령의 위치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대덕재(大德재)임을 곧 알 수 있는데 당시에는 대덕산이 무풍 산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정감록의 감결에 무봉산(舞鳳山)의 새 봉(鳳)자는 무풍 산의 바람 풍(風)자의 오기임을 짐작케 한다.


또한 무풍 북쪽은 무풍면의 북쪽이 무풍 산의 북쪽이 된다. 실제로 가 보면 대덕산은 육중하고 우람하며 그 북쪽 골짜기는 「징비록」의 무풍 산 북쪽 방은동(方隱洞) 덕유산의 내맥인데 어느 골짜기 할 것 없이 피난처가 아닌 곳이 없다는 말이 실감나게 된다. 대덕산으로 봤을 때 비로소 무풍고을 전체가 십승지에 해당됨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선조 25년(1592) 임지왜란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난을 피하고 정착하기도 했다. 또한 세태가 시끄럽던 조선말기에는 망국내각(亡國內閣)의 궁내대신(宮內大臣)을 지냈던 민병석(閔丙奭)이 무풍 땅을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땅이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서 난세(亂世)의 피난지로 삼았다. 고종 27년(1890)에는 유사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99칸이나 되는 행궁(行宮)을 건립했는데, 후에 명성왕후(明成王后)가 살해된 후 민병석 개인소유로 되어 있다가 일정 때 건물이 팔리고 헐렸다. 지금은 그 궁지(宮地)만 남아 있는 명례궁(明禮宮)이 있었던 고장으로 예부터 무풍 땅은 술가(術家)들이 복지(福地)로 선망하던 곳이었다.

 

무풍 땅을 들어서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던 관원들의 숙소로 이용되던 무제원(茂梯院)이 설치되었던 곳이어서 원(院)앞 또는 원평(院坪) 마을 등으로 불리는 원촌 마을이 있다.


원촌마을은 조선시대 설치되었던 무제원(茂梯院) 외에 현종 15년(1849) 이 고을에 살고 있던 흥양 이씨(興陽 李氏)문중에서 그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했다는 육영재(育英齋)가 있는데 이 육영재는 1922년 이 고장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 사립 무창보통학교로 개설 되어 교육양성에 힘써 오다가 후에 공립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현재 무풍초등학교로 발전된 교육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작은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거문동 마을이 있는데, 이 곳에 치소(治所)를 설치하면서 석성(石城)을 쌓아 무풍현(茂風縣)이라 했으니 여기가 바로 무풍고성(茂風古城)이었다.


세월은 무성하던가·····


성(城)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민가가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된 무풍고성은 성지(城地)라는 낱말이 붙어 한 페이지의 역사로 남았고, 거문동 마을이 된 고성지에는 조상의 숨결과 얼이 담긴 깨진 기왓장과 성석(城石)들이 숱한 세월 속에 역사를 지켜보며 외롭게 나뒹굴고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마을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 가다보면 북리(北里) 어귀에는 조선 순조 21년(1821)에 건립한 백산서원(栢山書院)이 있는데 이 서원의 타진사(妥眞祠)에는 세종때 삼정승을 두루 거친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과 그 부인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영장을 봉안하여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제81호로 보호를 받고 있다.


면소재지 개울 건너 덕산재 방향으로 1km 지나 왼쪽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못(池)이 있는 산(山)이라고 하여 지산(池山)으로 불렀던 곳이 있는데 1981년 조례의 개정에 따라 옛 지명인 부등(扶等)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이 부등 마을에는 단종(端宗) 원년(1453)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충언(忠言)을 하다가 간당으로 몰렸던 남은(南隱) 서섭(徐涉)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943년 건립한 숭모사(崇摹祠)와 1971년 건립한 분양정사(汾陽精舍)가 있는데 이 정사의 명칭은 분천(汾川)과 연유된다고 전한다.


또한 옛날 서수골로 불리던 서동(鋤洞)은 본래 쥐골이라 하여 서동(鼠洞)이었던 것을 후에 호미서(鋤)자로 개칭한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 건너 동네인 철목리의 괘바위 즉 묘암(猫岩)으로 부르는 마을이 있어 옛날 고양이 마을과 쥐 마을에 얽힌 전설과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 풍악을 울리며 치열하게 싸우며 놀던 민속놀이가 오랜 옛날부터 대대로 전해오다가 1950년대를 전후해서 사라지고 지금은 그 날의 민속놀이를 구전으로 통해 듣게 되는 것을 모두가 안타까워할 뿐이라고 말한다.


지성리에서 율평으로 넘어가는 성황당 고갯마루에서 왼쪽 산 밑에는 무주가락요(茂朱駕洛窯)공장이 있다. 사십대 초반 미모의 여사장의 안내를 받아 일행과 함께 전시장을 돌아보며 뛰어난 예술 작품에 도취도어 절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손수 만든 찻잔에 손수 끓인 따끈한 차 한 잔의 인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리라 생각된다. 오던 길로 되돌아 한참을 내려와서 개울 건너 산 밑에 철목 마을은 옛날 선비들이 모여 미풍양속을 지키기 위해 향약(鄕約)을 만들고 이를 행하기 위해 건립한 풍호정(風乎亭)이라는 정각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마을을 철사(哲士)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여 철목(哲目)이라 했는데 세월이 흘러 풍호정도 퇴락하여 허물어지고 지금은 그 때 심었던 노거수(老巨樹) 한 그루만이 남아 있어 철목(哲目)이란 지명을 철목(哲木)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마을은 조선 태종 때 무풍현의 마지막 현감을 냈다는 최영보(崔永甫)의 가족들이 머물러 살게 되면서 마을이 번창 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손인 죽헌(竹軒) 최활(催活)의 위패를 모신 죽림사(竹林祠)가 있고 원(院)앞 개울 건너 정문 거리에는 고종(高宗) 25년(1888)에 세운 충신(忠臣) 이만번(李晩蕃)과 효자 이만경(李晩景) 형제 정려각과 열녀(烈女) 옥산 장씨(玉山 張氏) 정려각이 세워져 있으며, 원철목 신기(新基) 마을에는 고려 이후 벼슬길에 올라 명성이 높았던 원주 이씨(原州 李氏) 문중에서 5현(五賢)을 모시기 위해 인조 10년(1632년)에 건립한 세덕사(世德祠)와 조선 말기 고종 때 학자로 이름 높았던 덕암(德菴) 김진한(金搢漢)의 유지(維持)인 고반재(考搬齋)가 있어, 이 고장 철인(哲人)들의 숨결이 담긴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의 서쪽 산위에는 신라 때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 등 화랑(花郞)들이 자주 찾아와 기(氣)를 기르고 바둑을 두며 소요 했다는 사선암(四仙岩)이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무풍 땅은 십승지라 할 만한 고산들이 병풍을 펼쳐 두른 듯 아늑하고 풍요로운 곳으로 고랭지 채소인 배추, 무와 찰옥수수의 산지로 유명한 고장이기도 하다.


대덕산(大德山)의 옛 이름을 다악산(多樂山) 또는 다악산(多惡山)으로 불렀다고 전하고 상봉에는 기우단(祈雨壇)이 있다고 한다. 이 산 북쪽 상봉에는 기암이 솟아있는데 이 바위를 범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에 가축 피해가 심해 마을 사람들은 밤이 되면 불안해 떨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의논한 끝에 고을 수령에게 이 딱한 사정을 알리고 그 대책을 진정하게 되었다.


이를 접수하여 조사 차 나온 수령은 다악산의 산세를 살펴보니 오히려 명산이라 극찬하면서 산이 남자다움과 크게 덕기(德氣)가 서렸으니 이 산의 정기를 받아 큰 인물이 많이 나올 것이니 호환에 대해서는 특별한 묘안이 없으나 종래의 다악산(多惡山)은 좋지 못하지 대덕산(大德山)으로 고쳐 부르라고 일러 주었다. 기이하게도 그 후부터 호환의 피해는 없어지고 마을은 평화롭게 살았다고 전한다.


또한 이 산은 경상도와 경계를 이룬 산으로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전라병사(全羅兵使) 이광악(李光岳)이 왜적을 물리쳤고, 영조 4년(1728) 이인좌난(李隣佐亂) 때는 이 고장의 의병들이 반란군을 물리쳐 국난이 있을 때 마다 고장을 지켜 주었던 명산으로 산세의 웅대함이 남자다운 덕기(德氣)를 지녀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고, 수려한 경관이 곳곳에 널려 있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아와 소요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국무총리를 지낸 황인성(黃寅性), 5선 의원을 지낸 김광수(金光洙) 의원이 바로 이 고장 출신이다. 천혜의 십승지(十勝地) 무풍 땅을 어찌 필자의 무딘 필로 다 쓰랴. 두서없이 아쉬운 글을 맺는다.

글 / 유재두(시인·무주향토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