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백두대간 대장정] 봄과 겨울이 만나는 육십령~덕유산~빼재

풍월 사선암 2006. 12. 9. 00:06

  [백두대간 대장정] 봄과 겨울이 만나는 육십령~덕유산~빼재

파란 하늘에 흩날리는 눈, 서봉 정상에 이르면 수액 머금은 바람은 닷맛.

 

사슴뿔 같은 눈꽃은 투명하게 빛난다.

늦된 성장통 같은 삼월 큰눈 탓인지 남녘의 꽃 타령도 예년보다 늦다. 그렇지만 또 이렇게 봄은 왔다. 양지바른 산기슭엔 생강나무가, 사람의 눈길 가까운 곳엔 산수유가 노란꽃불을 밝히고 있다.


어둠살이 스멀거리기 시작할 무렵, 육십령(734m)에 선다. 서쪽으로 전라북도 장수, 동쪽으로 경상남도 함양을 잇는 고갯마루다. 여기서 우리는,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내려설 일만 남은 고갯길의 운명을 배반한다. 인간의 길을 따를 때는 늘 올려다 볼 수밖에 없던 고갯마루가 금방 눈 아래로 멀어진다. 기분 좋은 단절감.


어둠살이 촘촘해진다. 나무도 먼 산도 어둠속에서 실루엣으로 되살아난다. 헤드램프를켠다. 불빛을 스치는 입김이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기차 화통의 연기처럼 짧고급하다. 보름을 갓 지난 달빛은 습기 머금은 대기를 노을처럼 붉게 물들인다.

비록 아침 조망이 좋은 캠프사이트를 찾기 위한 야간 산행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산을 오르는 즐거움은 다리의 수고에 비해 과분하다.


헤드램프를 끄고 달빛에만 의지하여 합미봉 정상에 섰다. 상당히 까탈스러운 암봉이다.합미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맑은 날 환한 대낮이라도 팽팽한 긴장을 요구한다. 필요한 곳마다 줄을 걸어 놓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두 다리가 딴 생각을 하면 잠시 후의 안녕을 보장받기 힘들다. 서봉(장수덕유산)을 한 시간쯤 남겨둔 지점까지 가서야 배낭을 내린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침낭 속으로 들어가자 바람 소리가 심상찮다.

 

이튿날 아침, 역시 텐트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춥다.

햇살이 목덜미쯤을 파고들 즈음 서봉(1500m)을 향한다. 바위 봉우리인 서봉과 남덕유산(1507.4m)의 둥두렷한 서쪽 기슭이 자못 대조적이다.


서봉 정상 직전에서 한바탕 흩뿌리는 눈을 만난다. 파란 하늘에 눈이라니. 산기슭을 오르던 바람의 장난이다. 바람의 장난?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서봉 정상에 이르면 바람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봄기운 머금은 햇살과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눈으로 빚은 바람의 연금술. 투명한 사슴의 뿔인 것도 같고, 하늘에서부터 드리운 고드름 같기도 한 얼음꽃의 아름다움.


얼굴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얼한데, 입 속에서는 단내가 풀풀 난다. 얼음꽃을 따서 입 속에 넣는다. 달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참나무 수액이 섞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삿갓골재 대피소에서 물과 가스를 보충한 다음 두 시간쯤 더 걸어서 도착한 곳은 무룡산(1492m) 정상. 덕유산 주릉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또 하루를 접는다.


제3일째의 햇살이 고개를 들기도 전부터 무룡산 정상은 일출을 기다리는 주말 산행객으로 왁자지껄하다. 세찬 바람은 촌각을 다투어 구름을 흩날리며, 깨어나는 아침 산의 다채로운 표정을 만들어낸다.

송계사 갈림길에서 지봉(池峯·못봉·1302.2m)까지는 허기지고 지친 자에게는 야속할 정도의 가팔막이다. 지봉에서 바라보는 대봉(약 1190m)은 또 한번 지친 다리의 맥을 풀어 놓는다. 까마득히 떨어졌다가 솟구치기 때문이다.


빼재에 도착하자 사위는 깊은 어둠 속이다. 무룡산에서 꼬박 10시간, 백암봉에서는 6시간이 걸렸다. 산을 두고 가는 아쉬움, 뼈만 남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산 그리움 다시 차오르는 데는 한 순간으로 충분할 것이다.

 

 

# 지명 - 길고 또 길엇 '구천동'


덕유산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구천동’이란 이름이 나오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았다 함(한글학회 지명총람), 암행어사 박문수의 설화에 의하면, 이 곳에 구씨와 천씨의 성을 가진 집안의 집단 주거지라고 해서 두 성씨를 따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네이버 사이트). 둘째, 기이한 바위가 9000개나 있다 함(한글학회 지명총람), 셋째 예전에 절이 많이 있어서 수도승 9000명이 머물렀다 함(한글학회 지명총람), 갈천 임훈의 <등덕유산 향적봉기>에 구천동을 불공을 이룬 자 9000명이 머문 둔소(屯所)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천동’에서의 ‘구’는 아홉과는 별 관련이 있지 않아 보인다. 우리 말에서 ‘구(九)’는 단순히 ‘아홉’의 뜻만 아니라 구우일모(九牛一毛), 구서(九暑), 구척장신(九尺長身) 등과 같이 ‘크다’나 ‘길다’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주 구천동은 엄청나게 긴 골짜기다. 이 길고 아기자기한 골짜기를 우리 조상들은 단순히 ‘심곡(深谷)’이니 ‘장동(長洞)’이니 하는 말로의 표현이 별로 마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생각해낸 것이 ‘길고 굽음’의 뜻으로 많이 씌어 온 ‘구(九)’자를 취했을 것이고, 이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 ‘천(千)’이라는 숫자까지 보태어 ‘구천(九千)’이란 말을 생각했을 것이다.


 

# 지형지질 - 장대한 능선, 아기자기한 계곡


덕유산은 어떻게 해서 유려하고도 장대한 산세를 이루게 된 것일까? 덕유산의 고산부를 이루는 지질이 선캄브리아기 변성암류인 편마암이기 때문이다. 덕유산의 편마암은 지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편마암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원생대 중기 약 20억~18억년 전의 것들이다. 이 편마암은 화강암과 달리 수평적으로 단단한 암석의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절리의 발달이 저조하다. 따라서 암석의 침식과 풍화를 이끄는 주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분 침투가 어렵기 때문에 특이하고도 다양한 암석 지형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에 반해 무주 구천동계곡은 다양하면서도 특이한 암석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는 구천동계곡의 지질이 덕유산 능선부를 이루는 지질인 편마암과는 판이한 암질로 이루어져 있어서다. 제2경 은구암에서 제12경 수심대에 이르는 와룡담, 일사대, 학소대 등의 지질은 석영 안산암으로서 침식과 풍화에 강하여 주로 절벽 형태의 노출된 암상을 이룬다.


한편, 구천동 제13경 세심대에서 제30경 연화폭에 이르는 지역은 주로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일대는 불규칙적인 절리의 발달로 인하여 담(潭)이나 소(沼) 등 다양한 하상 경관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독특한 석영 암맥이 곳에 따라 습곡을 이루고 있어 특이하고도 기괴한 하상 경관이 탄생했다. 수경대, 월하탄, 사자담, 호탄암, 구천폭포 등이 이에 속한다.


 

# 역사 - 스님들 도 닦던 '오수좌굴(吳首座窟)'이 '오수자굴'로


덕유산의 중봉 동쪽 중복에는 오수자굴이라 불리는, 약 50여명 정도 수용 가능한 큰 자연동굴이 있다. 오수자굴은 조선시대에는 ‘계조굴(繼祖窟)’로 불리던 산인(山人·산속에 사는 불승이나 도사)들의 좋은 수행처였다.


계조굴은 1657년에 백곡도인(白谷道人)이 쓴 <임성대사행장(任性大師行狀)>과 《대동지지(大東地志)》무주조 등에는 ‘繼祖窟’로 표기한 것을 보면, 임성 충언이 1618년(광해10)에 이 굴속에 은거하며 수행하였듯이 조사(祖師)들이 대를 이어가며 수행하던 동굴이라는 의미로 ‘계조굴’이라 이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갈천의 <등덕유산향적봉기>에는 ‘戒祖窟’로, 윤증의 <유여산행>시에는 ‘계주굴(戒珠窟)’로 언급하고 있다. 이 중 <유여산행>에 의하면, 1652년 경에 나이 80여세 되는 산인(山人) 계주(戒珠)가 문도들을 모아놓고 경전을 전수해 주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에 의하면 ‘오수자굴’ 또한 소요 태능(逍遙太能:1562~1649)과 같은 오씨성(吳氏姓)을 가진 수좌승(首座僧) 곧 선종의 승당에서 한 대중의 우두머리가 되는 불승 또는 선원에서 참선하는 수행승이란 의미의 수도승이 머물며 수행하던 굴이라는 의미로 일컫던 ‘오수좌굴(吳首座窟)’이 전음되어 ‘오수자굴(吳秀子窟)’로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전설 - 태조 임금 밥 짓던 '밥진골'


‘이태조 산제(山祭) 올린 뒤 동비(銅碑) 묻었다.’


이태조가 등극한 후 전국 명산에서 산제(山祭)를 올렸는데 덕유산 산제를 올린 자리에 동비(銅碑)를 묻었다고 하여 동비현(銅碑峴)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태조가 산제를 올리기 위해 머물렀던 자리를 제자동(帝子洞), 밥을 짓던 곳을 밥진골(취찬동·炊餐洞), 제사를 올린 곳을 유점등(踰店嶝)이라고 한다. 이런 지명이 남아있어 일제 때 일본인이 동비날에서 동비를 찾으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향적봉 대피소 아래 산상 옥수(山上 玉水)가 있는데 태조 이성계가 수도할 때 이 옥수를 떠다가 공을 드렸다고 해서 태조가 왕으로 등극한 후 사람들이 이 옥수를 왕생수(王生水)라 불렀다고 전한다.


덕유산 상봉이 향적봉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향적목(香積木) 곧 주목(朱木)이 숲을 이루었던 데서 유래했다. 왕생수가 솟아난 곳에 향적암(香積庵)이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옛날 마패로 사용했던 나무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란 주목은 현재 천연기념물로 덕유산 내 99ha에 300년생 7488본이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