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고전음악

한국인의 애청 클래식 베스트 60 - [20] 베르디 : 개선 행진곡

풍월 사선암 2006. 2. 4. 16:21

Aida "Triumphal March"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 중 :개선 행진곡"
Giuseppe Verdi (1813~1901 이탈리아)
Verdi Aida "Triumphal March"
 
Aida "Triumphal March"
1869년 11월 수에즈운하 개통을 기념하여 당시 이집트왕이 카이로에 건립한 오페라극장 개장식을 위해 10만 프랑의 작곡료을 받고 작곡한 베르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4막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오페라는 당시 이집트 브라크 박물관장으로 있었던 마리에트에게서 얻었다. 그는 왕의 의뢰로 작품의 줄거리를 찾다가 고대 사원의 제단 밑에 남녀의 해골이 발굴되었던 일을 힌트로 하여 여기에 여러가지 사건을 첨가시켜 이 작품의 줄거리를 창안해 냈다.
처음에는 이를 골자로 하여 프랑스의 대본가 뒤 로클이 프랑스어로 쓴 것을, 마지막으로 기슬란조니에 의해 이탈리아어로 대본을 만들었다. 1870년 12월에 이 작품을 상연하기 위해 베르디는 작곡을 서둘렀으나 1870년 여름 보불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음 해로 공연을 연기하게 되었다. 결국 1871년 12월 24일 카이로의 이태리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유럽에서는 1872년 2월 8일에는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아이다"는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이집트의 무장 라다메스(Radames)와 포로인 이디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와의 슬픈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장중하고 화려한 음악과 호화롭고 장대한 무대장치 등 오페라 중에서도 백미로 꼽힐 만큼 유명한 대작이다. 그 후 1872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자신의 지휘로 상연되어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작품으로, 가극 아이다 중 ‘개선행진곡’은 2막 2장에 나오는 이집트군의 승리를 거두어 개선하는 즉 전승을 축하하는 트럼펫 행진곡이다. 그밖에 이 오페라의 아리아(독창곡) 중 라다메스가 노래하는 "청아한 아이다(Celeste Aida)", 아이다가 노래하는 "이기고 돌아오라(Ritorna vincitor)"등은 특히 유명하다.
마치 오페라의 백화점 같은  의상,미술등 종합예술을 보여주는 <아이다>의 스토리는 베르디가 심중 깊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자질 - 사랑과 애국심, 헌신, 불변성, 그리고 용기 등 -  이 혼합되어 있다. 직접적이고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에 대한 그의 특유의 재능에다 관현악적 채색과 보다 대담한 대위법의 참신한 활용이 덧붙여져 프랑스식 그랜드 오페라와 이태리식 뮤직 드라마의 장대한 혼합물인 일대 걸작을 낳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작고가 무소르그스키에 의하면 <아이다>는 모든 음악가, 나아가서는 작곡가 자신까지도 능가해 버렸고 <일 트로바토레>도 멘델스존, 바그너도 <아이다>앞에서는 녹초가 되 버렸다며 격찬했다.  그리고 그라우트의 <오페라의 역사>에는 '이 오페라는 모든 점에서 베르디 예술의 집대성이라고 해야 할 작품이다. 이탈리아인 특유의 넘치는 선율, 표현의 따뜻함, 색채의 풍부함 그리고 그랜드 오페라의 특징 등은 화려한 무대와 합창, 발레를 한데 얽어 놓고 있다. 이 오페라는 영웅주의적인 색채를 지닌 이탈리아 오페라인 동시에 참된 인간적인 감정으로 넘치는 그랜드 오페라다' 라고 되어 있다. <아이다>하면 '개선행진곡'를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화려한 개선행렬들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아이다>에서는 발레도 중요한 요소이다.  <아이다>야 말로 음악의 모든 요소가 결합된 오페라의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
1막 1장: 이집트의 고대수도 멤피스 왕궁의 홀
이디오피아는 이집트 나일 계곡과 테베를 침공하려고 한다. 최고 제사장 람피스(Ramfis)는 젊은 라다메스(Radames)에게 신은 이미 침략자인 이디오피아 군대에 맞설 용사를 자신에게 계시했다고 말한다. 라다메스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이디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이 선택되기를 바라며, 승전의 월계관을 아이다에게 바치겠다는 내용의 아리아 "청아한 아이다(Celeste Aida)"를 부른다. 이때 라다메스를 짝사랑하는 왕(파라오)의 딸 암네리스(Amneris)가 나타나 그의 마음을 휘어 잡지 못해 누군가 그를 좋아하는 여성이 없는가를 살핀다. 그때 슬픈 얼굴로 등장하는 자신의 노예 아이다가 자신의 연적임을 느끼게 된다. 왕이 궁전에 나타나 라다메스를 토벌군 대장으로 임명하고, 공주는 그에게 깃발을 준다. 일동은 승리하고 돌아 오라는 합창으로 격려하며 퇴장한다. 혼자 남은 아이다는 자기 조국의 승리보다 라다메스의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 유명한 아리아인 "이기고 돌아오라(Ritorna vincitor)"를 노래한다.
1막 2장: 수도 멤피스의 바르칸 신전
바르칸의 신전에서 신성한 의식과 기도가 이루어지고, 라다메스는 람피로부터 신성한 갑옷을 받는다.
2막 1장: 테베의 궁전 안 암네리스의 방
이집트 군대가 승리하여 개선하는 날, 라다메스를 영접하기 위해 왕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테베까지 마중을 나온다. 암네리스는 아이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라다메스가 전사했다고 말을 건넨다. 슬픈 표정을 하는 아이다를 보고 질투의 불길이 타올라 그를 단념하라고 명령한다. 그때 밖에서 개선을 축하하는 군중들의 환호 소리가 들리자 암네리스는 기뻐하면서 아이다에게 누가 더 그를 사랑하는가 비교해 보자며 환영 장소인 테베로 아이다를 데리고 나간다.
2막 2장: 테베 거리의 개선식장
이디오피아 군대를 물리치고 이집트 군대가 왕의 앞으로 개선을 하고, 암네리스는 라다메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 준다. 이때 이디오피아의 포로들이 끌려 오는데, 그 중에는 사병의 옷차림을 한 아이다의 아버지 아모나스로(Amonasro)도 끼여 있다. 아모나스로는 이디오피아 왕이 전사했다고 말하면서 포로들의 생명을 구해 달라고 부탁한다. 왕은 라다메스에게 무엇이든 소원이 있으면 들어 주겠다고 하자 그는 포로들의 생명을 구해 달라고 요구한다. 왕은 이를 승낙하고 대신 아이다와 그 아버지를 볼모로 잡게 된다. 그리고 왕이 자신의 딸을 라다메스에게 주기로 하자 공주는 기뻐하지만 아이다와 라다메스는 슬퍼한다.
3막: 야자수 무성한 나일강변
결혼식 전날 왕의 딸 아네리스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못한 라다메스는 기도를 위해 이시스 신전으로 간다. 아이다도 라다메스를 만나기 위해 남몰래 나타나 그를 기다리다가 유명한 아리아"오! 나의 조국이여(O! Patria mia)"를 부른다. 이때 아이다의 아버지 아모나스로는 딸과 라다메스가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고 먼저 딸에게 이디오피아의 남아 있는 군대를 토벌하려는 이집트 군의 진로를 알아내라고 명령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기로 하는데, 라다메스가 나타나자 아모나스로는 허둥지둥 덤불 사이로 몸을 숨긴다.
아이다는 자기를 찾는 라다메스를 향해 공주나 사랑하라고 빈정댄다. 라다메스가 패잔병을 물리치고 돌아와 그녀에게 결혼 신청을 하겠다고 하자 아이다는 듣지 않고 병사들이 없는 길로 둘이 도망가자고 권하면서 그 길이 어디냐고 묻는다. 라다메스는 "납타(Naptha)의 골짜기"라고 대답한다. 이때 덤불 속에 숨었던 아모나스로가 "납타"라고 외치며 뛰어 나온다. 라다메스가 놀라자 아모나스로는 그들의 관계를 말하며 함께 도망치자고 재촉하고, 이 광경을 본 암네리스 공주는 "반역자"라고 외치며 무사들에게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옆에 있던 아모나스로가 칼을 뽑아 공주를 찌르려 하자 라다메스가 그를 말린다. 아이다와 아모나스로는 피하지만 라다메스는 체포된다.
4막 1장: 궁전 안의 넓은 방
아직도 라다메스를 사랑하는 암네리스 공주는 멀리 가버린 아이다를 단념하고 라다메스가 자기에게 마음 돌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라다메스는 아이다가 죽은 이상 자기도 깨끗이 죽겠다는 말하고, 공주는 아이다가 살아있다는 것을 라다메스에게 알려 준다. 라다메스의 완강한 거부에 분개한 공주는 다시 지하실로 그를 끌어가게 한다. 그가 사라진 후 공주는 혼자 고민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처형하지 않으면 안될 신세를 한탄한다. 지하실에서는 라다메스를 심문하는 소리가 들리고, 라다메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재판관은 나라를 판 죄로 신전의 석굴 속에 가두어 죽게 한다는 판결을 내린다. 재판관들이 법정을 나와 복도를 걸어 가고 있을 때 공주는 그들을 향해 판결이 너무 무겁다고 소리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공주는 제사들을 저주하면서 그곳을 떠난다.
4막 2장: 신전과 감옥의 2중 무대
위로는 바르칸 신전의 내부, 아래로는 라다메스의 무덤이 될 지하실이 있다. 라다메스는 거대한 돌로 입구가 막힌 어두컴컴한 감옥속에 서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이다가 나타난다. 그녀는 라다메스의 목숨이 다한 것을 알고 그와 함께 지내기 위해 이 곳에 몰래 들어와 기다렸던 것이다.
라다메스는 어떻게든 아이다를 이 곳에서 내보내려고 온갖 힘을 다해 돌문을 열어보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두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땅위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천국에서라도 이룩하자는 말을 주고 받으며 이중창 "이땅이여 안녕!"을 부르고, 아이다는 라다메스의 팔에 안기어 숨을 거둔다. 이때 검은 상복을 입은 암네리스 공주가 신전에 나타나 감방 위에 있는 마루에 엎드려 "영원한 평화 있으라, 사랑하는 자여 이시스 신이여, 복을 내려 주옵소서"하면서 기도하고, 무녀들의 장엄한 합창이 울리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 1813-1901 이탈리아)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파르마 현 브세토 근교 론콜레(Roncole)라는 농촌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88세로 세 상을 떠난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베르디'가 태어난 1813년은 바그너가 태어난 해이기도 한데, 이들 둘은 전 유럽을 휩쓴 오페라 작곡가이지만 그 음악의 성격은 사뭇 다르다. '베르디'는 바그너와 달라서 철학적 또 는 사상적 배경이 없고, 솔직하며 인간적인 작품을 썼다. 부자상인 바렛찌의 도움으로 부쎄토와 밀라노에서 기본적인 음악교육을 받고, 밀라노에서 음악원 낙방 후 파이지엘로의 제자인 라비냐에게서 개인수업을 받았다. 1836년 부쎄토 시립오케스트라와 음악학교의 지휘가가 됨. 같은 해 후원자 바렛찌의 딸과 결혼. 주로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 그의 교회관련적 음악들은 오페라가 갖는 극적인 요소들을 포용. 미사, 작은 합창곡등도 남김.
1839년 그의 첫 번째 오페라 「오베르토」를 밀라노에서 상연하여 성공을 거둠. 하지만 불행한 사건들(부인과 아이의 사망) 속에서 쓰여진 부파소재의 두 번째 오페라인 「왕궁의 하루」(1840)는 실패했다.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1842)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의 심각하고 극적인 양식은 이후 베르디 작곡방식의 모델로 정착한다. 또한 이 작품의 애국적인 소재는 한동안 지속되어 10여 개가 넘는 작품들에서 계속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베르디는 문학적 소재에도 관심을 가져 「멕베드」, 「루이자 밀러」 등을 작곡한다. 「루이자 밀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오페라는 특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나 그의 드라마 발전과정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르디는 1849년부터 부쎄토 근교에 산타가타 농장을 구입하여 여가수 스트렙포니와 함께 생활한다(결혼 1859).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50년대에 서로 다른 성격의 세 오페라를 통해 절정에 도달한다: 「리골렛토」(성격극), 「일 트로바토레」(성악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성격극과 성악오페라의 합성). 원래 1858년 나폴리를 위해서 쓰여졌으나 검열을 피해 1859년 로마에서 상연된 「가면무도회」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이후 긴 시간 간격들을 두고 세익스피어의「멕베드」제2판과 쉴러의 「돈 카를로스」 등이 쓰여졌다. 이들 작품에서 실험적으로 준비되던 것들은 1870년 수에즈운하의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쓰여진 「아이다」에서 결정체로 나타난다. 지금도 이 오페라는 창의력, 구성, 음악적 긴장, 형식을 가장 잘 조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1873년에는 「현악4중주 e단조」가, 그리고 1873/74년에는 소설가 만죠니의 추모를 위해 「레퀴엠」이 작곡된다. 이 레퀴엠의 초연 이후 오랫동안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중단된다. 1879년이 되어서야 베르디는 보이토의 권고로 다시 오페라를 쓰기 시작하여 「오텔로」를 작곡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에는 서정코믹작품인 그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1893)를 작곡한다.
아내의 죽음(1897)을 전후에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테데움」과 「스타바트 마테르」도 쓰여진다. 베르디는 밀라노에 음악인들의 양로원인 '휴식의 집'을 설립하고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모든 수입을 그 기금으로 사용했다.   베르디는 롯시니, 벨리니, 도니제티의 음악스타일을 따르면서도 단순하면서 힘있고 긴장감 있는 자신의 음악스타일을 발전시킨다. 일찍부터 반(半)대본가로도 활동해 그가 원하는 대로 운율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의 대본들의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 대오페라의 요소인 청각적이며 무대적인 효과들도 그의 오페라에 적용시켰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 내적인 감정들에 대한 표현과 상황에 맞게 세밀하게 구성되는 멜로디에 있었다. 그의 가장 개성적인 오페라 스타일의 하나는 복합선율적인 앙상블로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에서 서로 대립되는 선율들을 대치시켜 동시에 울리게 하는 것이다.
점차 베르디에게서 음향기법이 다소 풍부해졌다 해도 그의 오케스트라는 한번도 극의 전체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요소로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작품들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수법은 전통적이었으나 자연적으로 새로운 풍조도 도 입하고, 새로운 극적 구성도 시도할 뿐더러 관현악법도 무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살리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바 그너가 노래와 관현악을 동등한 위치에 놓은 것과는 달리 '베르디'의 작품의 중심은 성악의 선율에 있으며, 관현악도 섬세하지만 결국 노래의 반주의 역활에 그친다. '베르디' 오페라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생기에 차 있으며, 극적으로 힘 찬 박력이 있다는 것이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이태리 오페라의 전통 위에 서서, 극과 음악의 통일적 표현에 유의하고 있으면서도 독창의 가창성을 존중하고 또 중창의 충실화와 관현악을 연극에 참여시키는 등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다.  오페라 이외의 작품으로는 "레퀴엠", 현악사중주곡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