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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6) | 이탈리아 로마]

풍월 사선암 2015. 3. 26. 01:16

[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6) | 이탈리아 로마]

로마의 건축물, 상하수도, 도로동양보다 훨씬 발달하고 위대했다!

 

콜로세움, 아파트 10층보다 높아기하학 없이는 불가능

 

동양(아시아)은 언제부터 서양에 밀리기 시작했나?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가졌던 의문이다.

 

왜 동양은 열등한가?

 

동양이 서양에 밀리기 시작한 시기는 대개 르네상스부터라고 보는 게 정설이다. 르네상스로 활력을 찾은 유럽이 콜럼부스 이래로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아시아는 유럽의 밥이 되었다고 본다.

 

그리스에서는 극장이 반달 모양인 반면 로마에서는 보름달 모양으로 발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로마의 원형극장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땠는가? 중국의 당·송 문명은 대단하다. 유럽에 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마에 가서 직접 현장을 보니까 필자가 그동안 지녀왔던 이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르네상스 이전의 고대문명에서도 유럽이 이미 앞서지 않았나 싶다. 그 증거가 모두 로마에 있다. 오늘날 서양문명의 기본 틀은 로마다. 로마가 퍼져 나가서 오늘날 서양문명이 됐다. 유럽의 범위도 로마법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까지를 유럽으로 본다. 로마법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지역은 유럽의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로마의 트레비분수에는 언제나 세계 각국의 사람들로 붐빈다.

 

로마에 들어서니까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은 역시 콜로세움이다. 문명의 깊이를 보여 주는 물적인 증거는 건축물이다. 건축이 남는다. 후대에 보여 주어야 믿을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건축은 문명의 총화이다. 콜로세움은 그 높이와 규모가 상식을 뛰어 넘는다. 2,000년 전에 어떻게 이러한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아파트 10층 정도의 높이에 원형으로 돌계단을 빙 둘러쌓았다.

 

로마문명, 즉 서양문명의 특징은 석조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목조가 주종을 이룬다. 로마는 석조다. 누가 오래 남는가? 돌이다. 목조는 불에 타 없어져 버리니까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아방궁도 없어져 버렸지 않은가? 이 정도 높이와 넓이의 석조 경기장을 세우려면 우선 수학이 발달해야 한다. 수학적 뒷받침 없이는 이렇게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없다. 수학하면 역시 기하학이다. 피타고라스 이래로 기하학의 발달이 로마 석조건축에 모두 바탕이 됐다. 중국에도 구장산술이라 하는 고등수학이 있었지만 이게 실전 건축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 성당의 웅장한 모습.

 

석조 건축의 위대함은 희랍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이 남김없이 보여 준다. 언덕 위에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앙천혈’(獅子仰天穴)의 명당자리에 지은 건물이 파르테논신전인데, 로마의 콜로세움은 이 파르테논보다 한 술 더 뜬 건축이다. 높이와 규모에서 그렇다. 희랍은 극장건축이 특징이다. 곳곳에 극장이 있었다. 물론 극장은 신전의 일부분이었다. 종교적 집회를 위해서 극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극장은 반달 모양이다. 콜로세움은 보름달처럼 원형이다. 반달에서 보름달로 진화한 셈이다. 희랍문명이 반달이었다면 로마는 보름달이었다고나 할까.

 

희랍의 극장은 대중이 모이는 공간이다. 대중집회에서는 오락이 필요하다. 연극, 음악 공연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종교지도자 또는 정치지도자의 연설이 있었을 것이다. 대중의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주는 역할이 극장의 역할이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서는 특별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극장이다. 콜로세움은 이 극장의 역할을 포함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갔다. 살생이다. 사자, 표범 같은 맹수들과 인간이 싸우는 경지를 새로 포함시켰던 것이다. 검투사끼리의 경기도 포함시켰다. 희랍의 극장에는 없었던 종목이다. 피를 보는 것이다. 로마는 전쟁국가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끊임없이 전쟁을 하려면 피에 익숙해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살생을 일상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 잔인한 검투사 경기를 운영한 것 같다. 칼로 싸우다 피를 흘리며 죽는 삶을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죽음의 축제가 검투사 시합이다. 이 점이 동양과 다른 점이다. 동양문명에서 이처럼 잔인하게 죽음을 경기로 보여 주는 문화는 없었다. 공격성과 잔인도로 보면 로마는 대단했다.

 

 

◀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 행사에 참가한 한 여성이 로마의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보고 있다 

 

극장도 희랍의 반달에서 보름달로 진화

 

중국의 한()대 이후부터는 공자의 유교적 가르침이 보편화됐다. 논어의 핵심도 인()이다. 물론 전쟁도 하고 권력투쟁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인()을 내세웠기 때문에 수만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검투사 경기를 하는 발상은 할 수 없었다. 로마는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진보된 전쟁국가였던 것이다.

 

콜로세움이 상징하는 바는 살생 오락, 집회, 전쟁의지 고취, 여론수렴이다. 볼거리를 제공해 여론을 수렴하고 동시에 통합하는 공간으로 콜로세움의 의미가 있다. 이 부분이 동양과 다른 것 같다. 여론수렴을 하는 건축적 공간을 중시했다는 점. 이 점이 서양 사회제도의 특징이다. 동양에는 이 부분이 없었던 것 같다.

 

서양과 동양이 다른 점이 있다면 집터에 대한 것이다. 서양은 언덕 위의 높은 자리를 선호한다. 기왕이면 높은 지대에 있는 주택일수록 고급주택에 속한다.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한국은 높은 지대를 선호하지 않는다. 비교적 낮은 지대에 집터를 잡는다. 물론 불교 사찰이나 도교의 도관들은 산 위에 있지만, 일반 주택이나 또는 궁궐, 공적인 건물의 터를 높은 곳에 잡지 않는 전통이 있다.

 

로마는 수도시설 직접 조성동양은 물 나오는 곳 찾아

 

필자는 언제부터 서양이 높은 지대를 선호하게 되었는지 관심이 많았다. 로마 시내의 정치 발원지는 7개의 언덕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 일대이다. 이 언덕 7군데에 로마의 귀족들이 살았다. 직접 이 언덕들을 보니까 매우 작으면서도 비교적 낮은 언덕들이었다. 해발 100m나 될까. 서울의 성북동 언덕들보다 훨씬 작고 낮은 그야말로 뒷동산 정도의 언덕들이었다. 성북동은 여기에 비하면 엄청난 크기의 산악지형이다.

 

고대 로마의 건물들은 어디든 고지대에 지어져 있고, 도로도 넓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마 초창기부터 귀족들은 이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왜 언덕 위를 선호하였나? 언덕 아래쪽은 습기가 차고 하수구 냄새도 나고 모기를 비롯한 각종 해충들이 많았다.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시원하고 냄새도 덜 나고 모기도 적었다. 당연히 위로 올라갈 수밖에. 올라갈수록 쾌적한 공간이 된다. 문제는 상하수도 시설이다. 언덕 위로 가면 식수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고지대는 물이 문제다 

 

로마의 유적은 아직도 곳곳에서 발굴 중이다. 그래서 로마를 세계의 열린 박물관이라 부른다

 

동양에서는 고지대에 물이 샘솟는 곳을 중요시했다. 여기에 절터를 잡거나 또는 고대에 산성(山城) 터를 잡았다.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이자 산성인 오녀산성도 꼭대기에 샘물이 나온다. 산 위에서 물이 나오는 형국을 주역에서는 수화기제(水火旣濟)라고 표현한다. 매우 상서로운 징조로 본다. 백두산, 한라산이 모두 수화기제이다. 강원도 태백산이 중간지점쯤에 황지(黃池)가 있어서 수화기제에 해당하므로 성산으로 여겼던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서안 옆의 태백산도 산 정상 부근에 조그만 자연 호수가 있다. 중앙아시아 톈산(天山)의 이시쿨호수도 1,800m 지점에 커다란 호수가 있다. 이시쿨호수 옆에 자리 잡았던 도시가 바로 우리 고대사에서 중시하는 신시(神市) 아닌가! 경상도 경주의 양동마을은 자그마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양반촌이다. 우리나라에서 양동마을처럼 언덕 위에 양반들이 주택 터를 잡고 산 경우는 드물다. 물 문제가 있어서 우리나라 양반들은 위로 가는 것을 꺼렸다. 양동도 역시 이 물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하인들이 양동이로 물을 길어 날랐다. 언덕 위에 우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노비들이 물을 공급했기 때문에 양동마을의 양반들이 살 수 있었다.

 

 

로마 문명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고지대에 집을 짓고 상하수도는 직접 건립해서 해결했다는 것이다.

 

로마는 언덕 위로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에 집중했다. 로마의 위대함은 바로 이 상하수도 시설에 있다고 본다. 저지대의 물을 고지대로 끌어 올리는 수도(水道)의 개발과 유지에 많은 투자를 했다. 수로는 물론 석조와 벽돌로 이루어졌다. 고지대로 물을 끌어 올리는 장치를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언덕 위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회 인프라는 이 수로가 최고다.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야말로 대도시 수십만 인구가 밀집해서 살 수 있는 사회간접자본이자, 로마 문명의 위대함이다. 사실 따지고 들어가면 희랍의 코린트 지역에 가 보아도 상하수도 유적이 남아 있다. 로마 문명 이전부터 희랍에서 이미 상하수도 시설에 집중해 왔지만, 로마에 들어와서 좀더 대규모로 보편화됐다. 로마 인근의 작은 고가도로처럼 길게 연결되어 있는 다리들이 보이는데, 이게 로마시대에 설치되었던 수로 시설인 것이다. 동양에는 이 시설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물이 공급되지 않는 고지대를 주택지로서 선호하지 않았다. 이는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곳곳의 지방 도시들을 가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로마의 건축물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로마 대웅전이 웅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전쟁 시 방어에 유리하다. 요새처럼 절벽을 끼고 있는 산들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방 영주들의 본거지이자 독립된 도시들이었다. 이탈리아 전체에 이러한 독립적인 도시들이 약 4,000개에 이른다. 평지 벌판보다는 대부분 평지 위에 솟은 산에 올라가 살았다. 모두 산꼭대기 도시들이다. 이 도시들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 상하수도 시설들이었다. 로마는 물을 다룰 줄 알았던 것이다. ‘라는 글자를 풀이하면 물(?)을 언덕()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광경이다. 통치자의 통치 행위는 물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양의 물 관리가 홍수를 관리하는 데에 집중되었다면, 로마의 물 관리는 홍수가 아니라 상하수도 시설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홍수는 농사를 위해서이지만, 상하수도는 도시 거주민들의 쾌적함이다. 물 관리의 용도가 다르다. 현대인에게 훨씬 어필하는 점은 상하수도 시설이다.

   

문명은 길에서 형성로마의 넓고 견고한 길이 놀라워

 

로마의 건축물은 대부분 고지대에 지어져, 상하수도 시설을 직접 조성해서 물을 해결했다.

 

로마문명을 논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부분이 도로다. 아피아 가도를 보면 반듯한 차돌들이 깔려 있어서 지금도 튼튼하다. 그 견고함에 놀라울 뿐이다. 2,000년을 버텼으니 말이다.

 

조선은 제대로 된 도로가 없었다. 겨우 파발마가 다니는 좁은 길이었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할이 산으로 되어 있는 탓도 있다. 외적이 침입하면 방어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문명국가는 길에서 형성된다.

 

제대로 된 고속도로를 2,000년 전부터 깔아 놓았다는 것은 아시아 고대국가에서 발견할 수 없다. 문명의 위대함은 하드웨어를 통해서 후대인들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다. 로마 문명은 콜로세움, 상하수도 시설, 그리고 도로이다. 3가지 요소는 지금도 어필한다. 동양 고대문명이 약했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조용헌 칼럼니스트·동양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