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4) | 이탈리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피렌체는 훌륭한 풍수지형
가운데 강도 흘러…베네치아는 해상, 피렌체는 육지에서 성공한 도시
동양학을 한 사람으로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가서 가장 크게 느낀 이질감은 바다를 안마당처럼 이용했다는 점과, 장사를 통해서 돈을 버는 일을 인생의 중대한 가치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뱃사람에 대한 대접이 조선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베네치아는 배를 타고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에 운하 주위로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들이 엄청 화려하다는 점이 방문객을 놀라게 만든다.
건물의 재질은 대리석이고 디자인은 천장이 둥그런 돔형이 많고, 성당건물과 종탑, 그리고 모든 건물들이 품격이 있다. 수백 년 된 앤티크 건물들이 밀집된 사이로 배를 타고 들어가다 보면 환상의 도시에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어떻게 이렇게 화려한 건물들을 갯벌의 섬과 석호(潟湖)로 된 지역에 지을 수 있었단 말인가. 결론은 돈이다. 돈이 그만큼 많았기에 이러한 건축이 가능했다. 육지에 짓는 것보다 3배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위대한 문명인지 아닌지를 가장 쉽게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건축이다. 건축도 돌로 된 석조건축이어야만 후대에 오래 남는다. 이렇게 많은 천문학적인 돈은 어떻게 벌었는가. 무역이다. 무역은 배를 타고 하는 해상무역이다. 모든 돈은 바다를 건너다니는 뱃사람과 유능한 선장의 능력에서 나왔다. 세계에서 뱃사람과 상인을 가장 우대한 공화국은 아마도 베네치아일 것이다. 조선은 뱃사람을 천시하는 문화였다. ‘뱃놈’이라고 불렀다. 유교문화권에서는 글을 읽는 사대부가 되고, 농자(農者)가 천하의 근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유교문화권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이 ‘뱃놈’들이 쌓아올린 무력과 사회시스템에 완전히 정복당해 버렸다.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서양 뱃놈 문화의 원조였다. 뱃놈들이 이렇게 우아하고 정교하고 화려한 문명을 이룩해서 세계에 보여 준 것이다.
◀피렌체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가운데로 강이 흘러 동양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당 터 지형이다. 베네치아가 해상으로 성공한 도시라면, 피렌체는 육지로 성공한 도시였다.
서양 고대문명에서 노를 젓는 뱃사람은 하층민으로 지도자를 뽑는 투표권을 얻게 된 시기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일어났던 살라미스해전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아테네가 침략군인 페르시아해군을 격파한 해전이 바로 살라미스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공을 세운 계층이 바로 배의 밑바닥에서 죽어라 노를 저어야만 했던 노꾼들이었다. 아테네해군의 배 한 척당 승선 인원이 평균 200명이었고, 이 가운데 170명이 배의 밑바닥에서 노를 젓던 노꾼들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전까지 천대받았던 이 노꾼들에게 발언권이 생겼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시민권자로서 대접 받게 되었던 것이다. 투표권을 얻어서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계층이 되었다. 서양 고대문명에서 뱃놈에 대한 대접이 시작된 사건은 바로 이 살라미스해전이 아닌가 싶다. 살라미스해전이 전개되었던 아테네 근해(近海)는 나중에 베네치아가 활동하게 되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앞마당이 됐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는 지중해, 에게해, 이오니아해, 아드리아해, 티레니아해가 둘러싸고 있다. 그 바다의 사이사이에 수많은 섬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고대부터 배를 타고 다니면서 터키 쪽과 아프리카 대륙을 상대로 장사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이었다. 조금만 가면 섬이 나오고, 육지가 바로 옆에 있고, 태풍도 없었다. 태평양과 같이 끝도 없는 거대한 바다가 아니고, 오밀조밀한 사이즈의 바다였으므로 배를 타고 다닌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동아시아 쪽보다는 훨씬 덜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고대 그리스는 여름에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 없다. 그 대신 겨울에 비가 온다. 여름에 비가 오지 않으므로 과실농사는 되지만 곡식농사가 안 된다. 식량은 외부에서 조달해야 하는 것이다. 배를 타고 나가야만 하는 조건이었다. 베네치아도 역시 태풍이 없었다.
◀피렌체 광장 앞에서 한국 관광객과 외국인이 함께 허공을 향해 날고 있다.
다른 지역에 장사를 하러 다니다 보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게 되고, 다른 문화에 눈을 뜨게 된다. 이질적인 문화들이 융합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의 극치에는 돈을 숭배하는 황금만능주의적인 가치관이 자리 잡는다. 베네치아는 뱃사람들이 철저하게 해상무역만을 통해서 재물을 축적했고, 이 재물을 벌기 위해서 수만리 뱃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배에 물건을 싣고 날랐다. 그리고 보란 듯이 집을 짓고 떵떵거리는 인생을 살았다. 세계사에서 뱃사람들이 돈 벌어서 신분제약을 받지 않고 으스대는 삶을 살았던 것도 베네치아가 처음이다. 장사를 하던 상인이 권력과 문화의 주도권을 쥐는 시민계급으로 등장한 사회가 베네치아이다. 이 점이 아시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이다. 바다와 돈, 그리고 상인의 메카가 베네치아였다.
상인이 일찌감치 사회 주도권 잡은 베네치아
그러다보니 베네치아는 ‘오로지 돈만 아는 천박한 놈들’이란 비난도 받았다. 돈 놀이, 요즘으로 치면 금융업이 또한 발달한 곳이 베네치아였다. 복잡한 복리계산과 대출해 줄 때 철저하게 담보를 잡아놓는 능력, 그리고 복식부기와 어음이 발달한 곳이 또한 이곳이다. 셰익스피어가 쓴 <베네치아의 상인>은 이러한 돈놀이에 대한 당대 유럽인의 경멸의 시선이 깔려 있는 작품이다.
10세기 무렵부터 베네치아는 지중해권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돈이 최고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장사를 해야 한다. 장사 중에서 가장 이득이 되는 장사는 바다를 건너는 해상무역이다. 해상무역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의리고 명분이고 필요 없다. 오직 우리에게 누가 이득을 줄 것인지만 냉철하게 계산하면 된다.’ 배금주의가 베네치아의 가치관이자 철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돈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가 주된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으니까, 베네치아와 비교해 보면 대략 1,000년이나 늦은 셈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너무 타락했다고 슬퍼하지 말자. 유럽의 오늘날 복지와 사회민주주의가 이러한 배금주의라는 밑바닥을 경험하고 생성된 시스템이다. 밑바닥을 쳐봐야 새것이 솟는다. 궁즉변(窮卽變)이요 변즉통(變卽通)이라고 생각하는 게 주역의 가르침 아닌가! 유교문화권이 그동안 지나치게 소박했다. ‘군자가 되어야 한다, 공자님의 인(仁)을 실천해야 한다’고 매일 다짐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고, 장사를 천시했고, 배타고 바다 나가는 것을 꺼리다 보니 아편전쟁 이래로 서양의 해군과 장사세력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던 것이다. 돈 되는 것을 다 뺏기고, 불리한 조약을 강제로 맺어서 서양에게 착취당했고, 월등한 해군력과 정교한 계약방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산호섬에 해상도시를 건설하고 고대부터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해 온 베네치아는 서양 해군 군사력의 원천이 됐으며, 상인이 일찌감치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도시로 발전했다.
이러한 서양 문명의 노하우는 베네치아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베네치아는 월등한 화력의 대포를 장착한 해군을 앞세워 식민지를 무력으로 굴복시켜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서양 제국주의의 원조였다.
지금은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의 일개 도시지만, 13~16세기에는 지중해권을 호령하는 해상제국이었다. 단순한 도시국가가 아니었다. 엄청난 무력을 갖춘 제국이었다. 베네치아는 인구 5만~10만 명 내외의 크기였지만, 해군력은 중세 서양문명의 패권자였다. 지중해, 에게해, 아드리아해는 물론 멀리 흑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섬들과 항구들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 해상물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강력한 해상제국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크레타 같은 섬은 베네치아의 봉이었다. 터키와 이탈리아, 그리고 아프리카 해상교통의 복판이었기 때문이다. 크레타 같은 섬은 엄청나게 착취당한 지역이다. 대략 400년간 지중해의 주인은 베네치아였다. 장사를 하려면 베네치아의 허가를 받고 세금을 바쳐야만 했다.
피렌체의 풍수는 경주·한양·전주와 유사
주역의 핵심이 ‘음중양, 양중음’이다. 현상과 사물은 이중적이라는 이야기이다. 베네치아의 눈부신 화려함 속에는 어두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역적 관점이다. 우아함과 세련됨 속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살육과 이익을 앞에 두고는 눈곱만큼도 상대를 봐주지 않는 상업적 타산이 감추어져 있다고 예측해야 한다.
◀피렌체의 도심은 항상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세계적인 브랜드의 상점들이 눈에 띈다.
영국의 작가 로저 크롤리(Roger Crowley)가 쓴 <부의 도시 베네치아>(다른세상)라는 역사책을 보면, 1204년 베네치아는 당시 기독교 문명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을 무력으로 침탈했다. 같은 기독교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돈 때문에 침략해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던 것이다. 교황의 명령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모인 제4차 십자군 병력과 베네치아의 함선이 합착해서 아무 죄도 없는 콘스탄티노플을 초토화시켰던 것이다.
왜 십자군이 적국인 이슬람 국가를 치지 않고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했는가? 서기 5세기 무렵에 로마, 즉 동로마가 망하고 5세기 이후부터는 서로마의 수도가 바로 콘스탄티노플 아니었던가. 여기에는 그리스인들이 주로 살았고, 종교는 그리스정교회를 믿었다. 로마의 가톨릭과는 경쟁관계에 있는 그리스정교회라고 해도 같은 십자가와 예수를 믿는 기독교 국가였는데, 베네치아가 이교도를 잡도리하겠다는 대의명분을 가진 십자군을 배에 태우고 이집트로 가지 않았다. 방향을 틀어서 같은 기독교 제국의 비잔틴(콘스탄티노플)을 노략질한 것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유럽 각지에서 모인 십자군들이 베네치아와 처음 계약한 해상운송비와 군량미 값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해서 십자군을 볼모로 잡아 비잔틴을 친 것이다. 이러한 침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돈 앞에서는 종교도, 예수도, 신성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다. 베네치아로서는 십자군 태울 배를 만드느라 국가재정이 바닥난 형편이니 체면이고 명분이고 앞뒤 가릴 수 없는 처지라는 점도 고려해야 하지만 말이다.
◀(위) 피렌체 성당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어 많은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 피렌체 성당을 보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1204년에 베네치아 해군과 십자군의 연합공격으로 콘스탄티노플은 파괴되었고, 여기에서 약탈한 예술품과 문화재들이 베네치아를 재건축하는 데 동원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뼈대를 이루고 있는 베네치아의 대리석 건물들은 1250~1300년대에 건축되었는데, 이 시기는 당시 인구 50만 명에 육박하는 세계 최대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약탈문화재들이 유입되었다. 아편전쟁 때 영국, 프랑스 연합군 함대가 쳐들어와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과 세계 최고의 정원이었던 원명원(圓明園)을 분탕질하면서 수많은 보물들을 약탈해 간 것과 똑같은 상황이라고 하겠다. 영국과 프랑스가 원명원에서 약탈해 간 문화재들이 가끔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 나오고 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약탈 문화재와 건축자재들은 지금도 베네치아의 건물 뼈대에 박혀 있는 것이다.
어찌됐든 금전을 향한 강력한 욕망으로 바다에 나간 베네치아는 같은 라이벌이었던 제노아와 치고받는 경쟁을 하면서 항해술, 선박건조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이러한 중세 이탈리아 해양제국의 축적된 노하우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양기술들이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으로 이어지면서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서양이 아시아를 잡아먹을 수 있었던 해군력으로 발전했다고 보인다.
◀다소 엄숙한 피렌체 성당의 내부 모습. 맨 앞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조형물이 걸려 있다.
베네치아가 바다에서 성공했다면, 피렌체는 육지에서 성공한 도시였다. 피렌체 역시 독립된 공화국이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를 일으켰던 도시 아닌가. 피렌체에 가보니까 풍수가 좋았다. 넓은 평원 지역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동양 풍수에서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가운데 강이 흐르고 있는 곳을 선호한다. 도읍지가 될 만한 자격이 있다.
신라의 수도 경주도 동서남북에 산이 둘러싸고 있다. 인신사해(寅申巳亥) 사방(四方)에 산이 자리 잡은 경우이다. 고려의 수도 개성이 이런 조건이고, 한양도 마찬가지이다.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전주도 네 방향에 산이 포진하고 있는 형국이다. 피렌체가 이러한 동양의 도읍지 풍수 조건에 딱 맞는 곳이었다. 사방이 훤히 트였으면서도 멀리 산이 막아 주니까, 호방함과 안정감을 동시에 겸비한 터였다. 멀리 주변 산들도 험한 바위산이 아니라 흙으로 둘러싸인 부드러운 산들이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악산(嶽山)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메디치 가문이 주도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메디치 가문이 주도했다. 나중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집안으로 칭송받았지만, 원래 메디치 가(家)는 장사하던 상인 계급이었다. 처음에는 전쟁 나가는 군인들에게 약을 파는 장사를 했다고 한다. 약(藥)을 뜻하는 메디신(medicine)의 어원이 메디치가(家)에서 유래했다. 약을 팔아서 돈이 생기니까, 이번에는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노획한 노획물들을 저당잡고 돈을 빌려 주는 전당포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 메디치 가문이 거주했던 집은 우람한 석조건축인데, 겉으로는 4층이지만 내부에 들어가 보니까 요즘의 8층 높이에 맞먹는다. 궁전 수준이다.
글·조용헌 칼럼니스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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