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이한우의 朝鮮이야기(23)] 서모와 간통·부친 살해… 중종 때는 ‘패륜의 시대’

풍월 사선암 2012. 1. 8. 22:28

[이한우의 朝鮮이야기(23)] 서모와 간통·부친 살해중종 때는 패륜의 시대

 

혼란한 정치상 반영하듯 이연수·오여정·조만령 등 패륜아 날뛰어즉시 참형 당해

중종 범인의 집을 허물고 못을 파라대노마땅한 처벌 규정 없어 골머리 썩기도

 

충효(忠孝)의 나라 조선에서 패륜(悖倫)은 반역에 버금가는 중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앙의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패륜도 극성을 부린다. 중종은 명군(明君)과 암군(暗君) 사이를 오락가락한 임금이다. 조광조를 중용하는가 하면 그를 죽이기도 했다. 백성조차 원망하던 남곤???김안로 등을 요직에 앉혀 폭정(暴政)의 길을 열어놓기도 한 임금이다.

 

그래서인지 중종 26년부터 34년 사이에 연이어 패륜사건이 터졌다. 이후 부모를 구박하거나 못살게 구는 자식이 있으면 사람들이 저런 이연수 같은 놈이라는 욕이 생겼을 만큼 사회적 충격이 컸던 이연수(李連壽)사건은 중종26년에 일어났다. 그 해 627일 의금부에 잡혀온 이연수는 국문을 받은 끝에 자신이 아버지 이장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살해 동기는 부모의 구박이 날로 심해져서 원수처럼 여기게 되어 시해했다는 것이었다.

 

이연수는 즉시 참형을 당했다. 원래는 참형의 경우 군기시라는 정부기관 앞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머리를 군기시 문 앞에 내걸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나라에 큰일이 있어 대궐 밖 당고개 사형장에서 목이 달아났다.

 

당시 중종은 사형 집행 후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가 살던 집을 허물어버리고 그 자리에 못을 파라고 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대신들의 보고였다. “집을 허물고 못을 파는 일은 옛 글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역대 어느 임금도 행하지 않은 처벌이고 게다가 이연수는 집이 없습니다.”

 

그런데 5년 후인 중종31년에 보다 충격적인 패륜사건이 터진다. 이연수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죄질이 나빴다. 당시 판서를 두루 지낸 조정의 실력자 이항(李沆)의 매부이기도 했던 충청도 황간 사람 오여정(吳汝井)은 평소에도 행실이 좋지 않았다. 이미 중종25년에도 광흥창 부봉사라는 말직에 있으면서 광흥창에 소속된 종의 아내와 아들 한 명을 무참하게 구타해 살인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일로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에 물러나 있다가 다시 패륜을 저질렀던 것이다.

 

중종3137일 충청도관찰사 윤안인이 보고하기를 오여정이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상()을 지키지 않았고 또 자신의 종 두 명을 죽이려 할 때 어머니가 말리려 하자 어머니를 별실에 유폐시키고 끝내 종 두 명을 죽인 다음 도주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정도였다면 패륜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종을 죽이는 것이 살인죄이기는 했지만 신분제 조선사회에는 패륜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앞서 종의 아내와 아들을 때려 죽이고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막상 오여정을 잡아들이고 수사가 진행되자 훨씬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44일 윤안인은 전후맥락을 조사해 전혀 새로운 사실을 보고했다. 오여정이 일찍부터 아버지의 첩과 간통하고서 그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아버지를 죽였고 이어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두 종을 죽인 후 간통한 첩과 도주했다는 것이었다. 중종은 이때도 큰 충격을 받고 오여정을 반드시 체포해 국문할 것을 명했다.

 

보름 후 경상도에서 변복을 하고 생선장수로 위장해 숨어 지내던 오여정은 체포되었고 중종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영의정 김근사로 하여금 직접 추국토록 명했다. 결국 이틀 후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져 오여정은 군기시 앞에서 참수를 당하고 머리가 군기시 문 앞에 내걸렸다.

 

반면 오여정과 통정한 첩 돌비는 겨우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대명률에 따르면 돌지도 사형에 처해졌어야 했지만 그보다 상세한 규정을 담고 있던 율학 해이라는 일종의 해설서에 입각해 의금부에서는 100, 3000리 유배라는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율학 해이에 따르면 첩이 남편과 사이에 자식을 낳았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별했다. 자식을 낳아 놓고 본부인에게서 난 자식과 통정을 했을 경우는 사실상 근친상간에 해당되어 사형에 처해지지만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본부인 자식과 통정했을 경우 사형 바로 다음 단계인 100, 3000리 유배형에 처하도록 했다. 돌비는 남편과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의금부에서는 이런 경우에는 그 사람이 살던 고을의 읍호를 강등하고 집을 헐어 못을 파며 처자들은 노비를 만든다고 보고했고 이에 중종은 그가 살던 황간은 현감이 다스리는 작은 고을이라 읍호를 강등할 필요는 없고 다른 것은 법대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못까지 팠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집은 헐어버렸을 것이다. 못을 파는 것은 당시 형법인 대명률에는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4년 후인 중종345월에는 패륜을 넘어 엽기(獵奇)에 가까운 사건이 또 중종을 놀라게 했다. 경기도 김포의 통진 사람 조만령(趙萬齡)이 계모와 서모(庶母)를 간통했다가 붙잡혀 왔다는 보고가 의금부에서 올라온 것이다. 당시 중종이 차마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하루라도 세상에 살려둘 수 없다고 말한 데서 그가 이 사건을 얼마나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친어머니에 준하는 계모와의 통정(通情)에 대해서는 별도의 처벌규정이 없었다는 데 있다. 이때도 중종은 역시 집을 헐고 못을 파서 내가 미워한다는 뜻을 보이라고 명한다.

 

당시 법률에 따르면 아비의 첩을 범한 자는 참대시(斬待時)에 처하도록 돼 있었고 아비의 처를 범한 자는 무율(無律)이라 해서 명시해 놓지 않았다. 참대시란 일정한 시기를 기다려서 참형을 시행하는 것으로 즉각 시행하는 불참대시보다 나름대로 약한 형벌이었다. 정말로 운이 좋으면 기다리는 도중에 살아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율이었다. 실은 아비의 처란 다름 아닌 어머니이기 때문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처벌규정을 명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곧 불참대시와 같은 극형에 처하는 것으로도 제대로 처벌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조만령의 경우 조사 결과 계모인 옥지와는 무려 30년 동안 통간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만령은 즉시 참형을 당해 이연수?㈐ㅓ?머리가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문제는 다시 집을 헐고 못을 팔 것인지 여부였다. 사헌부에서는 그 같은 전례가 없고 또 법률에도 없는 처벌을 할 경우 임금이 법률을 무시하는 폐단을 열어놓을 수 있다며 그 문제에 관해서는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종도 물러서지 않았다. “반드시 집을 헐고 못을 팠던 전례가 있을 테니 해당기관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내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도 전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며칠간 중종과 사헌부 사이에는 집을 헐고 못을 파는 문제로 신경전이 계속됐다.

 

이에 중종은 공을 조정대신에게 넘겼다. 자신의 주장과 사헌부의 주장을 함께 대신에게 내보인 후 판정을 내리도록 명한 것이다. 사실 대신들의 생각도 사헌부 관리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중종의 고집이 워낙 강하니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영의정 윤은보와 좌의정 홍언필이 나섰다. 논리는 이것이었다. “조만령이 율문에 없는 죄를 지었으니 역시 율문에 없는 처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무율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전하의 뜻은 그의 더러운 자취까지 없애버리려는 것으로 조만령 같은 죄인에 대해서는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대신 조만령만큼 극악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집을 허물고 못을 파는처벌은 다시는 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이에 중종은 알았다고 답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중종시대 패륜아 트리오 3명 중에서 조만령의 집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못이 만들어졌다. 그때 못은 두 곳에 생겼을 것이다. 조만령의 집이 한양과 통진에 각각 있었기 때문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