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朝鮮이야기(22)] 명종 때 ‘뇌물 삼총사’ 윤원형·심통원·이양
실세 윤원형은 최고급 집만 13채… 왕의 친척인 심통원·이양은 벼슬 팔아 뇌물 챙겨
배 4척에 뇌물 실어 바친 윤선지는 지역 육군·해군 사령관 역임하며 벼슬길 승승장구
실록을 읽다 보면 왕권이 확립되어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를 구분하는 의미있는 기준의 하나로 뇌물에 주목하게 된다. 실록에 ‘뇌물’이란 단어를 검색했더니 왕권이 비교적 강력했던 태조 때는 10건, 태종 때는 33건, 세종 때는 175건, 세조 때는 71건이 검색된 반면 권력실세들이 설쳤던 성종 때는 367건, 중종 때 387건, 명종 때 204건 등이었다.
물론 검색 건수만으로 그 시대의 뇌물수수 건수를 추산해서는 안된다. 재위기간이 다르고 그 성격도 판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종 때 175건이지만 대부분은 명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불가피하게 공여해야 했던 뇌물과 관련된 기록이 많고 또 ‘뇌물을 준 사람과 뇌물을 받은 사람을 모두 처벌하라고 사헌부에 명을 내리다’와 같은 기록도 검색에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 중종, 명종 때 특히 뇌물과 관련된 검색 건수가 많은 데는 그만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성종 때의 최고 실력자는 누가 뭐래도 한명회였다. 재위 25년 중 18년 동안 한명회는 2인자로 군림했다. 한명회가 뇌물을 좋아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그런 뇌물은 관리의 진급과 연결되어 있었다.
연산군을 내몰고 반정(反正)을 일으킨 공신이 주도했던 중종시대에도 뇌물은 횡행했다. 심지어 반정공신을 정할 때도 공공연하게 뇌물이 오갔을 정도로 당시 반정주역에 대한 세간의 평은 좋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뇌물과 관련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시대는 누나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20년 동안 휘둘렀던 윤원형이 사실상 집권자라고 할 수 있었던 명종 때다. 이름만 명종(明宗)이지 그는 실은 조선 임금 중에서도 대표적인 암군(暗君)이었다.
당시 윤원형은 자타가 공인하는 뇌물수수 랭킹1위의 권세가였다. 윤원형의 뇌물수수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증언한다. “뇌물이 몰려들어 그 부가 왕실에 못지 않았다. 따라서 서울 장안에 1급 저택이 13채나 되었고 그 사치스럽고 웅대함이 극도에 달했다.” “기탄없이 문을 열어놓고 뇌물을 받아들이고 관직을 팔았다.” “윤원형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여러 번 하면서 벼슬을 팔고 뇌물을 받기를 시장의 장사꾼처럼 하였다.”
랭킹2위는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작은 할아버지였던 심통원이었다. 그에 관한 실록 사관의 악평도 윤원형에 대한 비평 못지않다. “심통원은 시세를 타고 위엄을 빌리며 벼슬을 팔아서 뇌물이 폭주하고 청탁하는 사람이 대문에 그득했다.” “심통원은 욕심이 많고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외척이라는 이유로 정승이 되어 뇌물을 받고 노비를 빼앗는데 겨를이 없었다. 윤원형·이양과 결탁하여 ‘3굴(窟)’이라고 일컬어졌다.” 뇌물 트리오였던 셈이다.
이양은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부였다. 그에 관한 사관의 혹평도 만만치 않다. “이양은 젊어서부터 경망스러워 천한 사람조차 그를 업신여겼다. 당시 인척치고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으나 이양에 대해서는 특히 명종의 은총이 컸다. 이양은 이 같은 은총을 빙자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니 뇌물 실은 수레들이 모두 그의 문으로 모여들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명종 때 정승이나 판서치고 이들 ‘3굴’에게 이리저리 줄을 대거나 뇌물을 주지 않은 사람은 열 중 하나가 될까말까 하였다. 이들은 심지어 지방의 작은 관직까지도 뇌물을 받고 팔았다.
뇌물받기로 유명한 윤원·심통원·이양이 트리오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뇌물주기로는 윤선지라는 인물이 가장 화끈했다. 윤선지는 무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명종7년 6월 22일 동부승지에 오르는데 무인이 승지가 된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배경에 대해 실록은 “대비(문정왕후)의 외척인 이귀령의 첩의 딸을 첩으로 삼았으며 윤원형이 그로부터 뇌물을 받고 천거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윤원형이라는 세력을 등에 업은 윤선지는 이후 출세가도를 달린다. 경상좌도 수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명종16년(1561년) 청홍도 수사에 임명된다. 청홍도란 곧 충청도이다. 삼남지방의 육군과 해군 사령관을 두루 역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7월 19일 윤선지는 ‘해군사령관답게’ 배 4척을 만들어 뇌물을 가득 싣고 각각 윤원형·심통원·이준경·권철에게 바쳤다. 이때 영부사 윤원형과 우의정 심통원은 윤선지의 뇌물을 받았고 좌의정 이준경과 형조판서 권철은 받지 않았다. 그 바람에 윤선지는 이준경과 권철에게 주려던 뇌물의 반은 자기 집으로 가져가고 나머지 반은 왕실 종친에게 주었다가 발각이 되었다. 이에 사간원이 명종에게 여러 차례 주청을 올려 결국 윤선지는 청홍도 수사에서 물러나야 했다.
애당초 좌의정 이준경은 뇌물을 받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이준경은 병조판서로 있을 때 당시의 실력자 이기가 뇌물을 받고서 무관직의 핵심 요직을 청탁해도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준경은 한때 이기의 사주를 받은 사간원 관리들의 탄핵을 받아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의 청렴결백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으니 윤선지 따위가 건넨 뇌물을 받을 리 만무했다. 배 1척이 아니라 선단으로 뇌물을 실어온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할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훗날 영의정에 오르게 되는 권철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명종16년 1월 그가 형조판서로 제수받았을 때 실록의 사관은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외모는 위엄과 무게가 있어 보이나 속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서, 말년에 이양에게 빌붙어 사람들이 더러운 인간이라고 침을 뱉었다.” 특히 중종·명종 시대의 사관은 다소 엄격한 데가 있었다.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당시는 권간(權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때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건 고위직에 오르려면 ‘3굴’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이준경도 “윤원형에게 빌붙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런 점에서 두 시대의 사관은 원리주의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오히려 선조11년(1578년) 이준경의 뒤를 이어 영의정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난 권철에 대한 졸기(卒記)가 보다 객관적이다. “작은 벼슬자리에 있을 때부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직무를 수행해 왔으므로 이미 재상의 물망이 있었다. 중년에 진복창(陳復昌)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해 동안 진로가 막혔는데 진복창이 패망하자 다시 등용되어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정승으로 들어오자 이준경·홍섬·박순·노수신 등과 마음을 같이하여 보좌하였다.
어떤 때는 체직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복직되기도 한 것이 무릇 13년이었다. 당시에 중앙과 지방이 무사하였고 조정이 다스려졌다고 일컬어졌다. 비록 건의하여 밝힌 것은 없었지만 신중하게 법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의 흠을 논하지 않았고 복있는 정승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아들 율(慄)도 명신이었다.” 즉 권철은 권율 장군의 아버지였다.
아마도 이준경이나 권철 모두 깨끗했기 때문에 명종 때의 권간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다는 오점에도 불구하고 사림의 신망 속에 영의정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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