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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4)] 수양대군에 맞선 안평대군의 책사 이현로

풍월 사선암 2012. 1. 8. 22:32

[이한우의 朝鮮이야기(24)] 수양대군에 맞선 안평대군의 책사 이현로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연결고리 역할한명회에게도 안평 쪽에 줄 서라고 권유

수양의 쿠데타 성공 후 반역죄로 효수 당해세종과 문종이 인정할 만큼 풍수와 시문에 능해

 

역사를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조선왕조실록은 특히 승자 일방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실록을 읽을 때는 늘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정변(政變)이 일어났을 때 승자와 패자의 길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다.

 

수양대군에게 한명회가 있었다면 안평대군에게는 이현로(李賢老)라는 책사(策士)가 있었다. 이현로는 문과급제자 출신으로 세종 때는 촉망받는 문신이기도 했다. 세종29(1447) 216일자에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때 그의 관직은 집현전 부교리다. 5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당시 성삼문이 정6품 수찬으로 그의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현로는 정5품 병조정랑으로 승진한다. 하지만 이현로는 이 자리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았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받아 전라도 순창, 경상도 사천 등지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가 받은 뇌물의 규모는 대단히 컸던 것 같다. 그는 장리(贓吏)’라는 처벌을 받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때 40관 이상의 뇌물을 받았을 때 해당하는 것으로 원래는 참형에 처해지게 돼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현로가 공신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사형은 감해 주었다. 이후 이현로는 세종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관직에 복귀할 수 없었다.

 

이현로는 당대의 대표적인 풍수지리 전문가이기도 했다. 세종도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을 마련할 때 이현로를 불러서 터를 보도록 할 정도였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면서 이현로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문종은 세자의 책봉일을 정하면서 은밀하게 이현로를 불러 택일을 부탁했다. 이현로가 다시 관직에 복귀하는 길을 열어준 인물은 다름 아닌 김종서였다. 문종1(1451) 113일 평안도 도체찰사로 떠나게 된 김종서는 군에서는 부대의 출동여부를 결정하는 데 방위의 점을 아는 것이 매우 중대한데 이현로가 그런 재주가 있으니 고신을 돌려주고 관직에 복귀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문종에게 건의를 했고 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현로는 술학(術學)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그래서 예술을 좋아하던 안평대군 이용의 눈에 들어 일찍부터 안평의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실록에는 안평과 이현로가 서로 시로 묻고 답하는 장면도 여러 차례 나온다. 당시 부사직으로 관직에 복귀한 이현로가 맡은 임무는 왕실에 보관 중인 풍수관련 지리서를 열람하고 공부하는 일이었다. 문종 때 그가 주로 한 일도 왕실의 풍수와 관련된 자문이었다.

 

병약한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와 안평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고 수양이 대항세력이 되었다. 김종서와 안평의 연결고리가 다름 아닌 이현로였다. 단종1(1452) 66일 동생 안평대군의 집을 방문한 수양대군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현로와 가까이 하지 말 것을 권유하며 장차 이현로와 얽혀들게 될지 모르니 내 말을 절대 잊지 말라고 경고성 당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등에 업은 이현로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이 무렵 이현로는 조선왕실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문제를 풍수의 입장에서 제기하고 있었다. “궁을 백악산 뒤에 짓지 않으면 정룡(正龍)이 쇠하고 방룡(傍龍)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원래 이 풍수설은 김보명이란 사람이 처음 제기한 것으로 경복궁이 들어앉은 자리로 인하여 조선 왕실은 적장자가 아닌 자식이 연이어 왕위를 맡게 될 것임을 암시한 것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풍수를 빌려 수양의 뜻을 꺾어보려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현로는 수양대군과 정면대결을 벌이기 시작했다. 안평대군이 과연 수양대군처럼 단종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상황은 단종을 둘러싼 김종서와 안평이 유리한 입장에 있었고 수양은 수세 정도가 아니라 궁지에 몰린 지경이었다. 이 무렵 권람과 한명회가 나섰다. 사실 한명회는 일찍부터 이현로의 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 안평 쪽에 줄을 서라는 요청이었다. 그만큼 이현로는 한명회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명회는 당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김종서와 안평 쪽을 버리고 수양대군에게 올인한다. 친구인 권람을 찾아가 수양대군과 만남을 주선해줄 것을 요청했고 결국 거사를 향한 책사 역할을 맡게 된다.

 

당시 단종의 즉위 승인을 명나라로부터 받아오는 고명사은사로 누가 갈 것인지를 놓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안평도 이현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그 중요성을 깨달아 자신이 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사실 당시 쿠데타를 꿈꾸던 수양으로서는 사전에 명나라와 면식을 갖는 것이 절실했다. 그 점을 이현로도 알았지만 결국 그것을 막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운명도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치밀함에서 수양과 한명회 쪽이 앞섰다. 북경(北京??행을 앞둔 수양대군은 자기가 없는 동안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이현로의 기를 미리 확 꺾어둘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이현로 구타사건이 발생한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왕실인사가 조정의 문신을 구타한 것이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김종서 쪽에서는 그 같은 논리로 수양을 몰아세웠다. 그러나 수양은 이현로는 조신(朝臣)이 아니라 안평의 가노(家奴)일 뿐이라고 맞받아쳤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도 이현로가 분명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일 것이라며 오히려 이현로를 국문해야 한다고 나왔다. 이현로의 거들먹거리는 행태를 평소 좋지 않게 보았던 양사에서 수양을 거들었던 것이다.

 

이현로 구타는 효과만점이었다. 김종서가 이현로는 정직한 사람이라며 거들었지만 결국 관직에서 내쫓겼다. 이듬해 4월 이현로는 북경에서 돌아온 수양대군을 찾아온다. 그러나 수양은 내 당장 포박하여 사헌부에 보내리라고 협박해 내쫓아버렸다. 자신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찾아온 것임을 수양은 꿰뚫어보고 있었다.

 

세종과 문종의 각별한 인정을 받을 만큼 풍수와 지리에 뛰어났지만 자신의 명운에 대해서는 보지 못한 때문일까? 그해 1010일 수양대군이 선수를 쳤고 안평대군과 김종서 일파는 죽음을 당했다. 이현로도 반역죄로 효수를 당했다. 역사는 이현로에게 가혹했다. 실록은 그의 동료였던 강희안의 이름을 빌려 이렇게 매도하고 있다. 강희안은 늘 자식들에게 이현로를 거론하며 이렇게 경계시켰다고 한다. “이 녀석을 가까이 하지 말라. 종국에 가서는 자기 집에서 죽을 자가 못 된다. 내가 일찍이 이 녀석의 두상을 보니 피에 얼룩진 형상이다.”

 

정말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뛰어난 재예에도 불구하고 패자가 됨으로써 당하게 된 매도인지는 알 길이 없다. 수양대군은 정란 직후 이현로의 집에 있는 모든 책과 글을 태워버리도록 명했다. “신비하고 괴상한 글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수양은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에 관련된 자의 아내, , 딸을 공신에게 하사하는 비인륜적인조치를 취한다. 이때 이현로의 아내 소사는 우의정 이사철의 몫이 되었고 첩의 딸 이생은 좌의정 한확이 차지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