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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5)] 조선에 10년간 망명했던 누르하치의 장남 귀영개

풍월 사선암 2012. 1. 8. 22:36

[이한우의 朝鮮이야기(25)] 조선에 10년간 망명했던 누르하치의 장남 귀영개

 

청나라의 왕권다툼에서 밀려나친조선파였지만 조선에서도 괄시 받아

병자호란 때 남양부사 윤계를 죽이고 다시 청나라에 귀화해 부귀영화

 

17세기 초 여진족을 통일해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북방의 영토를 확대해 갈 때 그의 곁에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추잉(猪英)과 둘째 따이샨(代善) 그리고 여덟째 홍타이시가 그들이었다. 그런데 추잉은 부친의 노여움을 받아 살해되고 따이샨이 사실상 적장자였다. 그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는 귀영개(貴永介)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당시 조선은 광해군 때였다.

 

1619(광해군11) 1217일 평안도 의주부윤이 조정에 보고서를 올렸다. 여진족에게 포로가 됐다가 도망쳐 온 전 강서현령 황덕영 등이 전하는 여진족 내부 상황이었다. 보고의 핵심은 노추(老酋?㈇G?의 장남은 조선과 화친을 주장하고 있고 여덟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조선을 치자고 강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장남은 추잉이 아닌 따이샨, 즉 귀영개를 말하고 여덟째 아들은 훗날 조선을 침략하는 청 태종 홍타이시다.

 

실은 이 때 조선은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망해 가던 명나라는 그 전해(1618)에 누르하치의 공격을 받자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왔던 양호, 유정 등에게 토벌을 명하면서 조선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광해군은 줄타기 외교를 하며 강홍립을 도원수, 김응서를 부원수로 삼아 부대를 파견하되 강홍립에게는 별도의 특명을 내렸다. 싸우는 시늉만 하라는 것이었다. 전장에 이르렀을 때 강홍립은 이렇다 할 전투도 해보지 않고 누르하치에게 항복을 했다.

 

그러나 김응서는 광해군과 강홍립의 밀약을 모른 채 열심히 싸우려고 하다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때 김응서를 사로잡은 부대가 바로 귀영개의 부대였다. 김응서의 신도비(神道碑)에 당시 상황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귀영개가 의자에 앉아 김응서에게 항복할 것을 협박했다. 그러자 김응서는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어찌 너에게 항복할 것인가?”라고 맞섰다. 이에 귀영개는 김응서를 의롭게 여겨 김응서의 손을 잡으며 그대야말로 진정한 충신이오라며 다시 회유했지만 김응서는 끝내 거절했다. 이후 줄곧 포로생활을 하던 김응서는 1624(인조2) 여진족의 내부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상세하게 적어 조선에 보내려고 하다가 강홍립의 밀고로 발각되어 살해되고 만다.

 

이런 귀영개도 1626년 아버지 누르하치가 세상을 떠나면서 위기에 처한다. 이복동생 홍타이시가 왕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귀영개는 43, 홍타이시는 34살이었다. 이미 누르하치가 살아 있을 때도 홍타이시의 파워가 귀영개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1621(광해군13) 여름이 두 사람의 파워게임의 절정기였던 것 같다. 그 해 8월 조선 조정이 파악한 여진족의 실상은 귀영개와 홍타이시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9월에 만포첨사 정충신을 일종의 사신 형식으로 여진족에 보낸 결과 정충신이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는 완전히 달랐다. 홍타이시가 병권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아우 홍타이시의 호방함을 두려워한 귀영개가 한 발 물러선 때문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그렇다면 귀영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살아 있는데도 홍타이시가 병권을 장악할 수 있었단 말인가?”라며 조선과 가까운 여진족에게서 저간의 사정을 정확히 알아올 것을 다시 정충신에게 명했다. 이처럼 광해군은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서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2년 후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러면 광해군이 그렇게도 궁금해 했던 귀영개의 처지는 어떻게 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실록에는 귀영개의 그 후 행방에 관해 이렇다 할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했겠지만 반정을 일으키고 집권한 인조는 애당초 오랑캐 여진과 화친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다행히 영??때의 문신이었던 성대중이라는 인물이 쓴 청성잡기란 책에 귀영개의 스토리가 상세하게 실려 있다.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기다시피 한 귀영개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가다 뜻밖에도 처자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망명했다. 그는 애당초 친()조선파였던 것이다. 광해군 때였다면 큰 환영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숭명반청을 기치로 내건 인조가 집권하던 시절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항복한 포로정도로만 대우했다. 그의 처지는 한마디로 비참했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들 정도였고 의지할 데도 마땅히 없었다. 자신의 혼인도 마음대로 할 형편이 안 되어 사랑하는 딸을 조선 무인 박륵에게 첩으로 줄 정도였다. 한때 북방을 호령하던 대장군으로 왕위에도 오를 뻔한 귀영개에게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귀영개의 불우한 망명생활은 동생 청 태종이 직접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1636, 인조14)까지 10여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아마도 귀영개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 쪽에 살았던 것 같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귀영개는 남양부사 윤계를 죽이고 다시 청나라에 항복했다. 당시 윤계는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하기 위한 근왕병을 모집하던 중 귀영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윤계는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다가 결국 청나라에 잡혀가 처형을 당한 삼학사(홍익한??오달제) 가운데 윤집의 형이었다. 청 태종은 조선에 망명해 있던 형을 다시 받아주었고 귀영개는 딸과 박륵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까지 데리고 심양으로 돌아간다.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성대중은 조선 정부의 근시안을 가차없이 질타하고 있다. 옛날부터 중국이 흉노와 같은 오랑캐를 회유할 때 했던 것처럼 귀화??오는 오랑캐를 진심으로 아끼고 재능을 활용하려 했다면 사정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즉 귀영개의 충심을 받아들여 병자호란 초기에 오히려 그에게 북쪽 지역의 군사를 내주고 곧바로 만주로 쳐들어가게 했다면 내분에 휩싸여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변은 미리 막을 수 있었지 않았겠냐는 가정에서다. 물론 그것은 가정일 뿐이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사실 귀영개의 조선사랑은 각별해서 아들들에게도 이어졌던 것 같다. 그는 망명했지만 아들들은 청나라에서 병권을 가진 왕자의 신분을 누리고 있었다. 홍타이시가 집권한 이듬해인 인조5(1627)에 청나라는 평안도를 공격했다. 여기에 귀영개의 아들 요토(要土)도 장군으로서 참전했는데 요토는 더 이상 남진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조선은 우리와 원수가 아닌 만큼 이미 1개 도를 쳐부순 것만으로 우리의 뜻은 전달했다. 더 이상 진군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나라임을 의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는 아버지의 온건론을 이어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인조정권의 외교 미숙으로 10년 후 청 태종은 조선 정벌을 결심했고 치욕의 삼전도 굴욕을 당하게 된다. 병자호란은 귀영개의 운명을 다시 바꿔놓았다. 홍타이시는 형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귀영개를 화석예친왕(和碩禮親王)으로 봉했다. 여기서 화석(和碩)’이란 말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청나라 황실에서는 적자의 작호에는 고륜(固倫), 서자에게는 화석(和碩)을 붙였다. 태종이 적통을 잇게 됨에 따라 귀영개는 서자가 된 셈이었기 때문에 화석왕에 봉해졌던 것이다. 그가 청나라에서 큰 영화를 누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신 조선의 입장에서는 성대중의 말대로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 차버린 것이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