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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1)] 임진왜란 때 평양성을 탈환한 영웅 김응서

풍월 사선암 2012. 1. 8. 22:21

[이한우의 朝鮮이야기(21)] 임진왜란 때 평양성을 탈환한 영웅 김응서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를 직접 만나 강화 교섭 추진적과 내통으로 몰려 백의종군하기도

광해군 때 강홍립과 함께 후금 정벌군으로 갔다가 포로 돼올해 북한 우표에 등장

 

올해 초 북한은 역사인물 7명을 그려 넣은 새로운 우표 7종을 발표했다. 그들은 고구려의 을지문덕·연개소문, 고려의 강감찬·서희·이규보·문익점, 조선의 김응서 등이다. 문신보다는 무장을 중심으로 선정한 것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눈길이 갔던 사람은 김응서였다.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인물로 유일하게 그가 선정된 이유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응서(金應瑞)1564(명종19)에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스물여덟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그에 앞서 1586(선조19) 84일자 실록에 김응서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이 나온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주요 관청에 대한 관리 감독을 위해 감찰을 파견했는데 이를 분대(分臺)감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날 사간원에서는 감찰 김응서는 가문이 한미하여 남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으니 교체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이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2년 후에도 김응서는 감찰로 복귀했다가 똑같은 이유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신 중심의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무신(武臣)’ 김응서는 주변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도 마찬가지지만 김응서의 운명을 180도로 바꿔놓은 것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었다. 수탄장이라는 중견장교였던 김응서는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평양성 방어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퇴각하는 바람에 징계를 받아 군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비변사는 김응서가 용맹하다며 곧바로 복직시켰다. 이후 김응서는 적의 목을 10여급 베는 등 큰 공을 세워 우방어사로 승진한다. 우방어사는 각도의 군사령관인 병마절도사 바로 아래의 직급이다. 그만큼 복직 후 김응서가 보여준 용맹은 뛰어났던 것이다.

 

장수로서 김응서의 용맹성이 두드러진 것은 1593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탈환작전을 감행했을 때였다. 김응서는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일 등을 도와 함구문 돌파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 평양수복전투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의 전공으로 김응서는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른다. 이후 김응서는 명군과 함께 경상도 우방어사가 되어 밀양까지 내려가 남해안에 머물고 있던 왜군의 소탕작전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김응서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난다. 용맹성은 인정되나 변란을 제어할 만한 지략이 모자라고 가는 곳마다 창기를 가까이 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응서는 평양성 전투와 관련해서도 평양기생 계월향과 염문설이 유명하다. 계월향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에 은밀히 침투해 공을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허나 큰 처벌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의 무공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그 무렵 바다에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에 대한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면 육전에서는 김응서가 고언백과 서로 공을 다투고 있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싸우는 이유도 이순신·원균의 갈등처럼 나이 어린 김응서가 자신과 같은 방어사라는 데 대해 고언백이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조정을 도원수 권율이 맡고 있었다. 선조278월 권율은 두 사람의 화해를 위해 조정에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가자 김응서는 왜군의 소서행장 등을 직접 만나 강화교섭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장을 직접 만난 일로 인해 김응서는 큰 고초를 겪게 된다. 그것은 선조의 주전론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화론은 유성룡이 이끌고 있었고 육군의 김응서와 해군의 이순신은 유성룡의 주화론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고언백과 김응서가 다툴 때도 유성룡은 김응서를 지켜주었다. 결국 선조는 1595(선조28) 51일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를 추국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비변사에 글을 올려 지금은 전란 중이고 김응서가 세운 공이 적지 않은데 김응서를 처벌했다가는 적의 사기를 올려주고 백성에게 괜한 걱정을 만들 수 있다며 처벌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결국 김응서는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자리에서 쫓겨나 백의종군한다. 명나라 장수를 따라 종군하던 김응서는 다시 군공을 세웠고 명 장수의 건의에 따라 선조는 다시 김응서를 복직시킨다.

 

전쟁이 끝난 후 1601년 김응서는 전라도 병마절도사, 즉 전라도 전체를 책임지는 군사령관으로 승진한다. 그의 행실과 관련된 사헌부 등의 탄핵이 이어졌지만 그의 전공이 워낙 혁혁하였기 때문에 선조도 그를 신임했다. 김응서는 이듬해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오르지만 다시 부하직원을 거칠게 다룬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절도사에서 물러났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영웅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우는 다시 나빠졌다. 그는 평안도 정주, 함경도 길주 등의 목사를 전전하고 있었다. 평화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광해군5(1613)에는 그가 역모를 꾸몄다는 거짓 고변까지 조정에 들어왔다. 아마도 안주목사로 근무할 때 백성에게 지나치게 많은 부역을 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힘들어 한 백성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그런 글을 올렸던 것 같다. 김응서는 탐오하기는 했지만 역모를 꾸밀 사람은 아니었다.

 

곧 석방된 김응서는 한동안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임진왜란 때 그가 세운 전공과 용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광해군이 1618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했다. 서북지방의 국경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명나라에서는 후금 정벌을 위해 원군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국내 사정을 이유로 파병을 여러 차례 미뤘으나, 칙사까지 파견하는 등 압박해 오는 명나라의 강력한 요구를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침내 김응서는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강홍립과 함께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광해군을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강홍립에게 별도의 비밀명령을 내렸다.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 현지 상황에 맞게 적당히 싸우는 척하며 시간을 끌고 싸우는 시늉만 하라는 것이었다. 1619년에는 심하라는 곳에서 후금 군대와 맞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부차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했고 그 바람에 김응서는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응서의 처신은 갈렸다. 강홍립은 훗날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 후금의 왕 누르하치에게 조선이 처해 있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며 조선군의 무사귀환을 요청했다. 이에 반해 김응서는 후금의 자세한 정세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여 비밀리에 조선으로 보내려고 시도했다.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과 직접 면담을 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김응서는 정보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장수였다.

 

그러나 이런 김응서를 지켜보는 강홍립의 생각은 달랐다. 자칫 김응서의 이런 행동이 발각될 경우 후금의 조선에 대한 의심은 더욱 커질 것이고 포로가 된 조선군의 석방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결국 강홍립은 김응서의 일기 작성 사실을 누르하치에게 고발했고 김응서는 이국땅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다.

 

계속 억류돼 있던 강홍립도 김응서가 죽은 지 3년 후인 인조5년 정묘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선도가 되어 조선에 들어왔다가 역신(逆臣)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게 된다. 힘없는 나라의 두 장수는 원치 않던 원정에 동원됐다가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야 했다.

 

북한이 조선의 인물 중에서도 무장인 김응서를 대표적인 인물로 선정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평양성 탈환 때 그가 세운 공 때문이 아닐까? 자신들 조국의 수도인 평양을 지키겠다는 수호의지를 간접으로라도 밝히려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