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朝鮮이야기(20)] 명종 때 ‘독사’로 불린 진복창… 배신과 복수의 화신
권력실세 윤원형의 심복… 대사헌·대사간 맡아 정적을 모함해 내쫓거나 목숨 빼앗아
왕 앞에선 잇단 사의 표시로 강직함 위장… 유배 가서도 백성 땅 가로채고 뇌물 요구해
조선 최고의 천재는 누구일까?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학문 분야에서만큼은 율곡 이이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율곡 이이는 천재형이라기보다 대기만성형이었다. 이이는 7살 때인 1542년(중종37년)에 이미 ‘진복창전(陳復昌傳)’이라고 하는 짧은 전기를 썼다. 거기에서 이이는 진복창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내가 진복창이라는 사람됨을 보니, 속으로는 불평불만을 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려 한다. 그 사람이 만약 뜻을 얻게 된다면 나중에 닥칠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도대체 진복창이 어떤 인물이기에 7살짜리 소년이 그에 관한 약전(略傳)을 쓰고 또 그 인물됨에 대해 이렇게 평한 것일까?
진복창에 관한 실록의 첫 번째 기록은 1535년(중종30년) 문과에서 그가 장원급제를 해 성균관 전적(정6품)에 제수되었다는 것이다. 훗날 이이도 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했듯이 진복창도 일찍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3년 후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승진한 진복창에 관한 인물평이 나오는데 “사람됨이 경망하고 사독(邪毒)하다”라고 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중종 말년까지 진복창은 외직을 떠돌며 이렇다 할 중앙관직을 얻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이가 ‘진복창전’을 썼던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아마도 어른들이 문과에 장원급제까지 했던 진복창이 결국 경망스러운 사람됨으로 인해 배척을 당하게 되자 이이를 일깨우는 차원에서 언급했던 것 같고 이이는 군자의 길을 걷겠다는 자기다짐 차원에서 진복창에 관한 약전을 쓴 것으로 보인다.
명종이 즉위한 직후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대리청정을 하고 외삼촌 윤원형이 실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이 이끄는 대윤세력을 제거하고 이어 을사사화를 일으켜 잠재적 반대세력인 사림을 중앙정계에서 대거 축출했다. 이때 진복창은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림세력을 제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훗날 그가 죽었을 때 실록의 사관은 그를 ‘독사(毒蛇)’라고까지 불렀다.
실제로 명종 때 진복창이 보인 행적을 추적해 보면 오히려 ‘독사’라는 별명도 칭찬에 가까울 정도다. 을사사화 직후인 1545년 명종 즉위년 진복창은 부평부사라는 외직에 있다가 다시 사헌부 장령을 맡아 화려하게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요직을 오가며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핵하고 퇴출시켰다. 그 뒤에는 윤원형이라는 당대 실세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후에도 홍문관 응교와 부제학을 거친 진복창은 명종3년 2월 3일 마침내 사간원의 최고위직인 대사간에 오른다. 당시 실록의 사관은 “진복창은 권간(權奸겴굻幣? 이기)의 심복이 되어 그들의 지시에 따라 선한 사람을 마구 공격하였는데 그를 언론의 최고책임자로 두었으니 국사(國事)가 한심스럽다”고 평하고 있다.
그 해 4월 19일 대사헌 구수담이 당대의 실력자인 좌의정 이기의 부정부패를 정면으로 탄핵하고 나섰다. 구수담은 사림으로 내외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고 진복창도 구수담에게 학문을 배운 바 있다. 이때 대사간인 진복창도 구수담을 거들고 나섰다. 한때는 이기에게 빌붙어 영화를 누렸지만 이기가 윤원형의 견제를 받기 시작하자 미련 없이 배반한 것이다.
명종4년 5월 진복창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마침내 대사헌에 오른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자리를 맡은 것이다. 진복창은 대사간 때도 그랬지만 대사헌이 되어서도 적시에 여러 차례 사의를 표명하며 강직함을 과시했다. 문정왕후는 말할 것도 없고 명종도 여차하면 미련 없이 사직서를 내던지는 진복창의 이런 제스처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심이 없는 신하라고 오판했던 것이다.
진복창이 이기를 배반한 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원래 진복창이 맨 처음 장령이 될 때 힘써 추천한 이는 훗날 을사사화에 ‘공’을 세우게 되는 허자라는 인물이었다. 당시 을사사화를 일으킨 세력의 4명이 위사공신에 책록되었는데 허자는 정순붕겴堅?임백령과 함께 1등공신이었고 윤원형은 2등공신이었다. 그런데 대사헌에 올라 실세로 떠오른 진복창은 이조판서 허자도 우습게 알기 시작했다. 결국 진복창은 허자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진복창의 권력욕은 그칠 줄을 몰랐다. 당시 병조판서 이준경은 윤원형도 함부로 못할 만큼 내외의 큰 신망을 얻는 인물이었다. 마침 사는 집도 가까워 진복창은 이준경과 친해지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한번은 이준경의 친척인 이사증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복창이 이준경의 곁에 앉게 되었다.
이때 진복창은 술에 취해 이준경에게 “왜 구수담이 나를 저버렸는가?”라며 원망의 말을 했다. 이준경과 구수담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이 날 잔치에 구수담의 며느리집 여종이 일을 거들기 위해 왔다가 진복창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구수담에게 전하였다. 이에 구수담은 “조만간 나에게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걱정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구수담은 진복창의 모함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된다.
게다가 뒤늦게 구수담이 자신이 한 말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전해들은 진복창은 필시 이준경이 그 말을 흘린 것으로 단정하고 이준경까지 미워하게 되어 결국 이준경도 형 이윤경과 함께 일시적이나마 병조판서에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이 정도가 아니었다. 원래 진복창이 대사헌이 되려고 실력자를 찾아다니며 로비를 하던 중 개성 유수로 있던 강직한 성품의 송순이 “진복창은 시시한 자로 조정을 시끄럽게 하니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며 먼저 대사헌이 된 적이 있다. 그러나 결국 진복창에게 대사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것을 진복창이 모를 리 없었다.
명종5년 5월 15일자 실록은 바로 이 같은 배경을 모르고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대사간 등이 구수담겮蒡?허자겴訣莫?이윤경 등을 귀양 보내고 훈작을 삭탈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허자를 제외하고 사림의 존경을 받고 있던 네 사람이 진복창의 공작에 의해 화를 입게 되자 홍문관 직제학 홍담을 비롯한 뜻있는 젊은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동안 진복창의 손발 노릇을 하던 사헌부, 사간원까지도 돌아섰고 조정 대신도 진복창을 멀리 내쳐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해서 올렸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통제하에 있던 명종은 한사코 “진복창은 강직하고 나라를 위하는 신하”라며 감싸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정치가이기도 했던 윤원형은 진복창을 더 이상 보호하다가는 화가 자신과 누님 문정왕후에게도 미칠 것을 예감하고 진복창을 삼수로 유배 보냈다. 삼수갑산 하는 그 삼수다.
진복창의 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명종16년(1561) 그의 아들 진극당이 과거에 급제했다. 그때 사간원에서 진복창의 출신을 문제 삼았다. 진복창의 어머니가 ‘음녀(淫女)’라는 것이었다. 기녀이거나 노비 출신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진복창은 말할 것도 없고 진극당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애당초 없었다. 결국 진극당의 급제는 취소되었고 그의 과거를 허용해준 관리들까지 처벌 받아야 했다.
삼수에 유배 간 진복창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백성의 땅을 빼앗고 공공연하게 뇌물을 요구하고 심지어 집에 개인적으로 형틀까지 설치하여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불러다가 곤장을 치곤 하였다. 30여명씩 졸개를 거느리고 매사냥도 했으며 사람을 때려죽이기까지 했다. 결국 조정에 보고가 올라가 진복창은 가중처벌에 해당하는 가죄(加罪)를 받아 위리안치(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던 일)되었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문과 장원급제자로서는 너무나도 비참한 일생의 마감이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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