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이한우의 朝鮮이야기(5)] 광해군 때인 1616년에 일본에서 담배가 건너와

풍월 사선암 2012. 1. 8. 11:27

[이한우의 朝鮮이야기(5)] 광해군 때인 1616년에 일본에서 담배가 건너와

 

손님에게 술과 차 대신 담배를 내놓을 만큼 급속히 확산정승 판서들도 즐겨 피워

당시남쪽에서 온 풀이라는 뜻으로 남초(南草)라 불려청나라로 밀수출하기도

 

예전에 이런저런 목적으로 조선을 찾았거나 항해 도중 표류했던 유럽인의 기록 중에서 조선의 모습을 담은 삽화들을 정리해 명지전문대 백성현 교수와 함께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이란 책을 낸 적이 있다.

 

당시 자료를 정리하면서 백 교수는 모자에 주목했다.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 사람들은 정말로 모자를 좋아했던 것 같다. 모양이나 종류가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나고 다양했다. 반면 내가 주목했던 것은 담배였다.

 

1816년 두 척의 영국 군함이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안 일대에 대한 탐사를 하면서 조선인과 여러 차례 접촉을 가졌다. 그리고 1817년 알세스트호의 군의관 맥레오드가 항해기를 출간했고 다음해에는 라이라호의 함장 바질 홀이 역시 항해기를 출간했다. 두 사람의 항해기에는 각각 당시 조선사람의 모습이 그림과 함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관리나 백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 1817212일 홀 함장은 영국으로 돌아가던 중 남대서양에 있는 영국령 세인트 헬레나섬을 방문했는데 마침 나폴레옹이 그곳에 유배 중이었다. 나폴레옹을 만난 홀 함장은 자신이 극동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스케치해온 각종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때 나폴레옹이 흰 수염에 장죽을 물고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 이 긴 담뱃대, 참 보기 좋다.”

 

홀의 채색판화 조선 관리와 그 수행원들’.

 

여기서 잠깐 옆길로 샌다. 실제로 순조 16(1816) 719일자 조선실록에 영길리국(英吉利國·잉글랜드)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충청도 마량진(지금의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표류한 내용에 관한 충청수사 이재홍의 장계(狀啓·국왕에게 올리는 보고서)가 실려 있다. 이 문건은 당시 조선사람들이 서양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다. 그 중 알파벳에 대한 당시 조선사람들의 인식이다.

 

필담을 시도해 보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도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도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조사를 담당했던 조선 관리들이 배에서 내릴 때 작은 진서(眞書)’를 선물로 받았다고 적고 있다.

 

이 진서란 다름 아닌 성경으로, 지금 학계에서는 마량진 사건을 한국 최초의 성경 전래로 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 동안에는 홀 함장 일행이 백령도에 도착한 게 먼저였기에 백령도가 최초의 성경 전래지라는 시각이 강했었다. 학계의 논쟁을 좀 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다시 담배로 돌아간다. 아직 우리나라에 담배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구구하다. 아마도 그 전까지는 조선왕조실록을 충분히 참고하지 않고 이런저런 야사(野史)에만 의존한 탓인 듯하다.

 

동래 왜관에서 화재가 발생해 80칸을 모두 태웠다.’ 오늘날 신문의 사회면 한 구석을 차지할 만한 이 짤막한 문장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5(1623) 215일자의 기록이다. 화재원인에 대해 실록의 사관은 왜인이 담배를 즐겨 피우므로 떨어진 담뱃불로 화재가 일어난 듯하다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것이 담배와 관련해 실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담배가 조선땅에 들어온 것 자체는 이 화재사건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실록(인조 1684일자)은 담배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해를 병진년부터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병진년이면 광해군 8년으로 서기 1616년이다. ‘처음에는 피우는 사람이 많지 않다가 신유년(광해군 13·1621)부터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할 때면 술과 차 대신 담배를 내놓을 만큼 급속하게 확산되었다고 적고 있다.

 

남미에서 처음 시작된 담배는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우리보다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사람들은 이를 남초(南草)’라고도 불렀다. ‘남쪽 나라에서 온 풀이라는 뜻이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성호사설에서 세상에 전하기로는 남쪽 바다 한가운데 담파국(湛巴國)이 있는데 이 담배가 그 나라에서 들어온 까닭에 속칭 담배라고 부른다고 써놓고 있다. 그러나 담파국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담배의 포르투갈어 타바코(tabacco)’의 음역일 뿐이다.

 

◀ 맥 레오드의 채색삽화. 큰 모자와 긴 담뱃대가 부각되어 있다.

 

광해군 이후 철종 때까지 실록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조선의 임금 중에 담배를 즐긴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대신 담배 재배나 지나친 흡연문화에 대해 걱정하는 대목은 여러 차례 나온다. 반면에 정승 판서들은 이미 인조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인조 6(1628) 819일 경기도 광주에 사는 이오라는 선비가 시국을 걱정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중에 신하들은 비변사(국정의 중요사안을 논의하던 곳)에 모여 우스갯소리나 하며 담배를 피울 뿐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거의 비슷한 비판이 150여년이 지난 영조 51(1775) 79일 사헌부 집의 유의양의 입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국(備局·비변사)에서는 날마다 모여서 군국기무(軍國機務)에 대한 것은 듣지 않고 오직 담배나 몇 대씩 피우고 돌아갈 뿐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국무회의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서 고위관리들이 잡담이나 하고 담배나 피우던 것이 당시 조선 조정의 문화로 자리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담배의 나라답게 조선은 곧바로 담배 수출에 나선다. 인조 16(1638) 84우리나라 사람들이 몰래 담배를 선양(瀋陽)에 들여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되어 크게 힐책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병자호란이 난 지 2년 후였다.

 

청나라에서는 토산물이 아니고 재물을 소모시킬 뿐이라고 하여 담배 재배와 흡연을 금하고 있었다. 담배 금지의 강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청나라 군대는 조선에서 물러가면서 군중(軍中)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을 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담배맛에 빠진 선양 사람조차 조선을 통해 담배를 입수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이런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조선의 밀수업자 입장에서는 큰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단속은 그때나 지금이나 돈길을 막지 못한다. 인조 18419,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의 호송을 맡았던 빈객 이행원이 베이징(北京)에서 돌아와 담배밀수로 인한 청나라와의 갈등에 대해 보고서를 올렸다.

 

청나라에서 담배를 금함이 요즘 들어 더욱 심하고 엄준합니다. 그런데 이익을 탐하여 목숨을 걸고 온갖 방법으로 숨겨 가지고 가서 나라를 욕되게 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금법을 범하는 자를, 1근 이상은 현장에서 참수하고 1근 미만인 자는 의주(義州)에 가두고서 경중에 따라 죄를 주게 하소서.” 의주에 밀무역을 감시하는 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6년 후인 인조 24년 동지사로 베이징에 간 이기조가 보낸 보고서에는 정반대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병자호란 때 조선 침공의 선봉장이었던 용골대(龍骨大)가 조선 사신을 만나 은밀하게 이야기한다. “황제가 남초와 매를 좋아하니 남초와 매를 들여보내라.” 남초는 앞서 본 대로 담배였다. 자기는 피면서 백성들에게는 못 피우게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조는 차라리 현실을 직시했다. 정조 2178일 정조는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면서 지금 남초를 심은 땅에 곡식을 심게 하면 몇 만 섬은 더 얻을 수 있다남초 재배를 금할 수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해당 관청의 책임자가 이미 백성이 즐기는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라며 현실적 어려움을 이야기하자 남초 재배를 금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참고로 나는 아직도 미개하다는 소리를 듣는 애연가의 한 사람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