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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4)] 세조 때… “조선의 동남쪽 어딘가에 여인국(女人國)이”

풍월 사선암 2012. 1. 8. 11:20

[이한우의 朝鮮이야기(4)] 세조 때조선의 동남쪽 어딘가에 여인국(女人國)

 

제주 관리 최부, 중국 절강성 부근에서 표류돌아와서 쓴 기행문에 여인국을 언급

오키나와 사신 서역에 여인국 있다

삼국사기엔 신라 석탈해왕이 여인국의 후손으로 기록

 

1541년 남미의 안데스 고원 동쪽에 존재한다는 보물의 왕국 엘도라도를 찾아나선 곤살로 피사로의 스페인 탐험대는 결국 200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밀림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사로의 참모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Francisco de Orellana)가 선발대로 나서 동쪽으로 난 큰 강을 따라 탐험을 계속했다.

 

이 항해 도중 오레야나 일행은 여인들의 부족을 발견하게 된다. “여인들은 하얀 피부에 키가 크고 머리를 여러 갈래로 길게 땋아 내렸다. 이들은 체격이 매우 건장했고 은밀한 부위만 살짝 가린 채 알몸으로 돌아다녔다.”

    

그들은 이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인국 아마조네스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후 그 강의 이름도 아마존이라 불리게 됐다. 이처럼 서양에 아마조네스가 있었다면 동아시아에는 여국(女國) 혹은 여인국의 신화가 있었다.

 

오레야나가 아마조네스를 발견하기 53년 전인 1488년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조선에서는 제주도에 근무하던 최부(崔溥·1454~1504)라는 관리가 부친상을 당해 급히 육지로 돌아오려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 절강성 쪽으로 표류하게 된다. 이후 최부는 6개월여에 걸친 고행 끝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표해록(漂海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한글로 번역도 돼 있다.

 

여기에 보면 표류 초기에 최부가 당시의 지리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반도 주변에 대한 지리 정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서남방을 향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면 곧 섬라(暹羅, 태국), 점성(占城참파, 베트남 중남부), 만랄가(滿剌加말레이시아의 말라카) 등의 나라요, 정남방은 유구국(오키나와)이요, 정남방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면 여인국(女人國)과 일기도(一岐島), 정동방은 일본국과 대마주(대마도).”

 

현대적 지리정보를 바탕으로 보자면 여인국하나를 빼면 나머지는 대부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당시 최부는 육지를 향해 올라오던 중 서북풍을 만나 배가 동남방으로 표류하고 있으니 유구국이나 여인국에 닿게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전망하기도 했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하더라도 그는 유구국에는 혹시 닿았을지 몰라도 여인국에 닿을 리는 없었다. 여인국은 애당초 이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나라였다.

 

그런데도 최부가 여인국에 관해 자신감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영향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여인국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당나라 때 편찬된 책 양서(梁書)’에 보면 부상국(扶桑國일본으로 추정) 동쪽에 여인국이 있다면서 그 풍속을 상세하게 적어 놓고 있다.

 

용모가 단정하고, 얼굴은 매우 깨끗하지만 몸에 털이 있어서 털 길이가 땅에 닿을 정도다. 2월과 3월에는 물 속에 들어가서 임신을 하며, 6월과 7월에 아이를 낳는다. 여인의 가슴에서는 젖이 나오지 않지만 목 뒤에 있는 털 속에서 즙이 나와서 아이를 먹인다.”

 

물론 황당한 이야기다. 명나라 때 저술된 서유기에는 삼장법사가 여인국의 여황으로부터 유혹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의 경우에도 신라의 석탈해왕이 바로 여인국의 후손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일본의 동북쪽 1000리에 있는 다파야국의 임금이 여국(女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이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고 한다. 이에 다파야국 임금이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고 여국의 딸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싸서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 것이 진한의 아진이라는 포구에 닿았다.

 

바닷가의 한 할머니가 이 궤를 끌어당겨 열어 보니 어린아이가 들어 있었다. 이 아이가 크자 신장이 9척이요, 풍채가 빼어나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나 마침내 제2대 남해왕이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고 제3대 유리왕과 함께 형제처럼 지내다가 마침내 유리왕이 석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다파야국이 정확히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약간의 신화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본다면 이 이야기는 상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석탈해의 키가 9척에 이르렀다는 것을 볼 때 어쩌면 그는 서양 계통의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는 해상을 통한 동서교류가 어느 정도 이뤄지던 때다. 흥미롭게도 석탈해왕이나 인도 아유타왕의 공주였다는 허황옥을 아내로 맞은 김수로왕 모두 서기 1세기 때의 인물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여국(女國)은 적어도 2000년이 넘는 오랜 전통을 가진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 여국에 관한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도 딱 한 차례 나온다. 그만큼 여인만이 사는 여국에 관한 호기심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조8(1462) 228일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의 사신 보수고(普須古)를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던 선위사(宣慰使) 이계손이 사신들과 나눈 상세한 대화록을 세조에게 보고했다. 이계손은 훗날 성종 때 형조와 병조판서까지 지내게 되는 인물이다.

 

유구국의 풍속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던 이계손은 여국(女國)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느냐고 보수고에게 물었다. 그것은 옛날부터 여국이 한반도의 동남쪽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동남쪽 유구국에서 온 그가 혹시라도 알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여국이 어디에 있는지 들은 바가 없다고 답한 보수고는 이어 다만 서량(西良) 땅에 있다고 들었는데 물의 흐름이 힘이 없고 거위의 털을 던지면 곧 가라앉으므로 사람들이 얕게 보지 않는다고 한다고 말했다. 뭔가 자신도 들은 바는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알지 못한다는 대답이었다.

 

여기서 서량이란 서역 일대를 말한다. 여국이 서량 땅에 있다는 말은 서유기에도 나온다. 따라서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은 서역쪽에 여인만이 사는 여국이 있다고 믿어왔고 그것이 흘러 흘러 조선시대 고위관리의 귀에까지 전해진 것이었다. 물론 여국이 반드시 서역 근처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계손의 질문이 이어진다. “내가 전에 들으니 여국 사람이 중국 조정에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수고의 답변은 단호했다. “그것은 허황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는 중국 조정 사람이 많이 살고, 또 매년 중국 조정에 우리도 들어가는데 무슨 일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아직 여국이 중국 조정에 조공을 올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면서 보수고는 여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 때 섬라국에서 여관(女官)을 입조시켰는데 당시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전후맥락을 알지 못하고 그 여관을 여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잘못 생각하면서 여국에 관한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해명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미 당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여국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조네스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신화였다. 그리고 아마조네스 신화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한 지리상의 대발견과 함께 탈()신화화했다.

 

달에 착륙한 아폴로11호가 방아 찧는 토끼의 신화를 추방했듯이 500년 전 대항해시대는 아마조네스의 신화를 쫓아내 버린 것이다. 이후 아마조네스에 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다. 아마존강만이 유유히 흐를 뿐이다. 그나마 조선의 경우에는 최부 이후 더 이상 여인국을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신화도 사라졌지만 애당초 모험심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