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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3)] 임진왜란 때 흑인 처음 본 선조(宣祖), “사람 맞나?”

풍월 사선암 2012. 1. 8. 11:15

[이한우의 朝鮮이야기(3)] 임진왜란 때 흑인 처음 본 선조(宣祖), “사람 맞나?”

 

() 병사로 참전마카오를 점령한 포르투갈이 교류 차원서 명에 군사고문단 파견

조선실록,“온몸이 검고 곱슬머리

바다 밑에서 물고기 잡아먹으며 적을 공격하는 물귀신

 

지난 914일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삼덕항에서는 칼로스 프로타 주한 포르투갈 대사 일행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제막식이 열렸다. 주앙 멘데스라는 인물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이름 앞에 최초의 서양 도래인(渡來人)’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는 점이다. 멘데스가 조선에 표착한 것이 1604년이니, 1653(효종 4)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나 1627년 조선에 표류한 베르테브르(박연)보다 각각 49, 23년 앞서 조선 땅에 도착한 셈이다.

 

적어도 기록만 놓고 본다면 조선을 찾은 첫 번째 서양인은 주앙 멘데스다. 조선시대 국경일지인 등록유초(謄錄類抄)’지완 면제수(之緩面第愁)’로 기록돼 있는 무역상 멘데스는 캄보디아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충무 앞바다로 표류하는 바람에 조선 수군에 붙잡혔다.

 

기록에 따르면 중국인 선원 16명과 일본인 선원 32명 그리고 흑인 1명이 함께 체포되었다고 한다. 관동대 박태근 연구교수가 최근 한 학술세미나에서 밝힌 결과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려는 것은, 실은 멘데스보다는 흑인 1이다. 물론 이 흑인이 아프리카 계통인지 동남아 계통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거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태조 이성계 시절에 지금의 태국인 섬라곡국의 흑인이 조선을 방문한 이후 근 200여년 만에 한반도 땅에 흑인이 찾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완 면제수가 충무 앞바다에 표착하기 6년 전인 1598526일 정유재란을 맞아 선조(宣祖)는 한양에서 명나라 장수인 팽신고(彭信古)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경상도에 머물고 있는 왜군과의 전투를 독촉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팽신고는 자랑하는 듯 제가 데리고 온 병사 중에서 얼굴 모습이 특이한 신병(神兵)으로 하여금 전하를 뵙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잠시 후 흑인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조는 내심 깜짝 놀랐다. ‘저게 사람인가 귀신인가?’ 팽신고는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파랑국은 바다 셋을 건너 있으며 조선에서부터 15만여리 떨어져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당시의 어설픈 항해술 수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설명이다. ‘파랑은 다름 아닌 포르투갈이다. 참고로 지금은 한자어로 포도아(葡萄牙)’라고 쓴다. 선조와 팽신고의 만남과 대화는 실록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어째서 지구 반대편의 포르투갈 흑인이 임진왜란(정유재란)에까지 참전하게 되어 한양의 한복판에서 선조를 만나볼 수 있었던 것일까? 실마리는 마카오에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를 열어젖히면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일본에까지 이르는 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항로를 유지하려면 중간중간에 거점도시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마카오는 최적지(最適地)였다.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강점한 것은 이미 40년 전인 1557년이었다. 마카오를 확보한 포르투갈은 대신 각종 신문물을 명나라에 제공했고 임진왜란 참전을 결정한 명나라 군대에 흑인이 다수 포함된 군사고문단을 파견한 것도 마카오 점령의 대가였다.

 

일본에 처음 서양인이 도래한 것은 1543년이다. 우리나라 중종(中宗) 38년 때이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주로 포르투갈 계통의 선교사에 의한 가톨릭 포교가 활성화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때 가톨릭 포교를 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점령에 나섰던 일본의 3대 장군 중 한 명인 고니시 유키나가 가톨릭신자였을 만큼 가톨릭은 이미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서양은 조총과 가톨릭을 함께 일본에 전해주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15만여명의 왜군 중 5만여명이 가톨릭신자였고 특히 고니시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가톨릭신자였다. 그래서 고니시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병사의 신앙지도와 전사한 병사의 영혼 위로를 위해 포르투갈인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신부를 조선으로 불렀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부산포에 발을 디딘 날은 1227일이다.

 

적어도 지완 면제수보다 11년 앞서 조선을 찾았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을 따라왔다는 국제정치적 요인을 제거할 경우 조선을 찾은 최초의 서양 도래인은 멘데스가 아니라 세스페데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세스페데스는 조선에 있을 때 전쟁고아들을 돌보아 주었고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멘데스와 세스페데스, 두 사람 모두 포르투갈 사람이라는 사실도 우리로서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편 팽신고는 선조에게 흑인병사를 소개하면서 이들은 조총을 잘 쏘고 여러 가지 무예를 지녔다고 자랑하고 있다. 다행히 실록을 쓴 사관은 자신의 눈에 비친 흑인병사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해 놓고 있다.

 

일명 해귀(海鬼).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이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처럼 짧게 고부라졌다. 이마는 대머리가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비단을 복숭아 모양으로 휘감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군인으로서 흑인의 능력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고 있다.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敵船)을 공격할 수 있고 며칠 동안 물 속에 있으면서 어류들을 잡아먹고 지낸다.” 과장이 섞여 있지만 이미 서양에서 해전을 할 때 흑인들은 날카로운 줄톱으로 배 밑창에 구멍을 내는 전술로 이름이 높았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물귀신 작전이란 말도 그때 이후 사용되기 시작했다. 어떤 안 좋은 일에 주변사람을 끌고 들어가려는 행위를 뜻하는 물귀신 작전이란 말은 선조 이전에는 전혀 사용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흑인의 그 같은 군사기술을 모르고서는 그런 맥락에서 물귀신 작전이라는 말을 쓸 수도 없다.

 

아쉽게도 실록에는 흑인병사들이 실제 해전에서 뛰어난 전공(戰功)을 세웠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명나라 장수들은 과시용으로 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데 불과했는지 모른다. 실학자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짤막하게 나온다. 명나라 장수 총병관 유정에 관한 구절이다. “유정은 왜를 공격할 때 한번도 공을 세우지 못했다. 왜 해귀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의 밑창을 뚫어 침몰시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해귀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있었다. 적어도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이 일본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순신에게는 자신의 해귀가 있었다. 거북선이다. 사실 일본 해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명군에 몇 명 포함된 흑인병사보다는 해전마다 앞을 가로막고 각종 화포를 쏘아대는 거북선이 바로 해귀요, 물귀신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