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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6)] 세종 때 최정예 포병부대인 총통위를 설치

풍월 사선암 2012. 1. 8. 12:35

[이한우의 朝鮮이야기(6)] 세종 때 최정예 포병부대인 총통위를 설치

 

최대 4000명 규모세조는 총통위 파워에 두려움을 느끼고 오히려 총통위를 해체

명종 때 많은 총통 제작해 왜적의 침입 물리쳐천자·지자 총통도 이때 만들어져

 

세종은 문치(文治)뿐만 아니라 국방력 강화 면에서도 첫손 꼽히는 조선의 국왕이다. 어쩌면 세종시대의 국방력이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특히 세종은 신무기 개발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지도자였다. 당시의 첨단 신무기라면 화포(火砲), 즉 총통이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국왕수업을 시키면서 화포는 군국(軍國)의 중대사임을 역설했다. 태종이 대마도 정벌에 나서고 세종이 김종서(金宗瑞)를 통해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도 단순한 용맹 때문이라기보다는 성능이 뛰어난 화포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준한 화포 개발을 통해 마침내 세종 277182400명 규모의 최정예 포병부대인 총통위(銃筒衛)가 설치된다. 우리 역사 최초의 포병부대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3년 후인 세종30128일 총통위의 규모를 4000명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총통위의 통제하기 힘든 막강 파워에 두려움을 느껴 총통위를 혁파해버렸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를 위해 내린 오판(誤判)이었다. 이후 조선의 국방력은 쇠퇴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화포의 성능 개량 또한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1510(중종 5) 부산과 울산 등 소위 3포를 왜인 5000여명이 점령해 난동을 부린 3포왜란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화포 제작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왜구들을 제압하는 데 화포만큼 위력적인 무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기력했던 중종도 2년 후인 중종 76월 공조에 명을 내려 흥천사와 흥덕사에 있는 큰 종을 녹여 총통을 만들 것을 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623일 중종은 다시 그 종은 이미 대비전에서 그릇을 만들기 위해 내수사(內需司)에서 가져갔으니 없었던 일로 하라고 명하고 있다. 내수사란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대비의 결정으로 무기가 아닌 그릇이 돼버렸다. 그릇으로 나라를 지킨 경우는 세계사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명종 즉위년(1545),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정왕후와 동생 윤원형이 정권을 장악한 바로 그 해다. 명종은 허수아비였고 모든 권력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손에 있던 시절이다. 같은 해 11월 제주도에 다수의 중국 사람이 표류해왔다. 그 중에 총통을 만들 줄 아는 기술자가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만들 줄 아는 총통은 과거처럼 화살을 쏘는 총통이 아니라 포탄(鐵丸)을 쏘는 신식 총통이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표류된 중국인들을 세 차례에 나눠 돌려보내기로 하고 총통기술자를 마지막까지 잡아두고서 조선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기술을 전수 받도록 했다. 아마도 이 기술이 요즘 우리가 보는 천자(千字)총통이나 지자(地字)총통 등의 모태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세종 때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총통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실제로 명종 9년 북쪽의 오랑캐와의 싸움에서는 현자(玄字)총통이 실전 배치되기도 했다.

 

당시 조선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마디로 위협 그 자체였다. 같은 해 68일 제주목사 남치근과 전라우수사 김빈이 최근 제주도와 전라도 해안에 왜적선의 출몰이 잦다며 서둘러 조정에서 총통을 내려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총통은 적을 막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인데 절반 이상이 부족합니다. 각자(各字)총통을 서둘러 보내주소서.” 각자란 천(((()자 총통을 통칭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총통의 개량 작업은 지속적으로 이뤄졌는데 흥미로운 것은 거기에 일본인의 기여가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명종 10521일 일본인 평장친(平長親)은 직접 총통을 들고 귀화를 요청해왔다. 그가 갖고 온 총통은 지극히 정교했고 그가 제조한 화약 또한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평장친에게 당상관의 벼슬을 내렸다.

 

제조기술은 갖춰졌다. 남은 것은 양산(量産)체제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조선왕실은 다시 한계를 드러낸다. 평장친에게 벼슬을 내린 이후 열흘 동안 네 차례에 걸쳐 당시 최고의 권력기관이던 비변사를 비롯해 사간원, 승정원 등에서 사찰의 종을 녹여 총통을 만들 것을 연일 건의했다. 그러나 명종은 한사코 대비인 문정왕후의 뜻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정왕후의 숭불(崇佛)은 워낙 유명한 것이었다.

 

심지어 동대문과 남대문에 뒹굴고 있던 큰 종 2개라도 녹여서 총통을 만들어야 한다고 신하들이 빌 듯이 요청했으나 역시 명종의 대답은 였다. 원래 그 종은 정릉 원각사에 있던 것을 중종 당시 권신(權臣)이던 김안로가 중종을 설득해 두 대문에 갖다 두었다. 이후 김안로가 실각하자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방치된 종조차 총통 제작에 쓸 수 없을 정도로 숭불하는 문정왕후의 권세는 막강했다.

 

◀ 현자 총통

재앙은 준비하지 않는 자를 정확히 가려서 찾아온다. ‘종을 총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던 614일 전라도에서 대규모 왜적이 침입했다는 급보가 조정에 날아들었다. 을묘왜변의 발발이었다. 사흘 후 전라좌도 방어사 남치근은 전라좌도에 있는 사찰의 종을 녹여서 총통을 만들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긴급요청을 올렸다. 이에 대한 명종의 답변이 황당하다.

 

오래된 물건은 신령스러우니 손대지 말라.” 같은 날 3정승까지 나서 사찰의 종은 그대로 총통을 만들어도 될 만큼 성분이 총통에 적합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조처를 내려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주청을 올렸지만 명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서울의 민가에서 철과 동으로 된 것들을 사들여 총통을 만들어 내려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민간의 잡철(雜鐵)로 총통을 만들어보았으나 발사 순간 포신(砲身)이 파열되었다고 반론을 펴는데도 명종은 막무가내였다. 이런 암군(暗君)에게 명종(明宗)이란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뭘까?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조정에서는 명망을 얻고 있던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로 임명해 전라도로 내려 보냈다. 현장에 내려간 이준경은 사태를 진압하면서 인근 사찰에 있는 종을 녹여 총통을 만들도록 지시를 했다. 두 달여 만에 왜적은 물러갔고 총통이 기여한 바도 컸다. 912일 제주목사 김수문이 올린 장계에는 총통을 가지고 적선을 불사르니 적왜가 모두 타죽고 빠져 죽었으므로 드디어 54급을 베었습니다.”

 

이준경은 전라도 지역을 점령했던 왜적들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정으로 돌아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 사찰의 종을 녹여 총통을 만든 문제 때문에 한동안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문정왕후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준경에 대한 명종의 신뢰가 워낙 컸기 때문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을묘왜변을 겪은 조정은 서둘러 총통의 대량생산에 나선다. 문제는 사찰의 종은 손대지 못하게 하고 민간에 그 부담을 전가했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이 여간 크지 않았다. 명종 11105일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를 보면 총통제작에 따른 민폐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계획하는 대로 총통을 만드는 데 들어가야 할 쇠가 모두 10만근이다 보니 집안에 쇠붙이라고는 그릇 하나가 전부이다시피 했던 백성들로서는 죽을 노릇이었다. 보상도 미미했다. 오죽했으면 사헌부는 이 같은 요구는 백성에게 뿔 없는 양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라며 명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어쨌거나 명종 10년부터 몇 년 동안은 총통 제작 정국이라 부를 만했다. 그 때문일까? 보물 647호인 천자총통은 명종 10, 보물 862·863호인 지자총통 등은 명종 12년에 제작되었다. 박물관에서 혹시 총통을 직접 보게 되거든 그 속에 녹아든 당시 조선 백성의 피와 땀도 함께 읽어내야 할 듯하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