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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7)] 명나라 영락제의 총애를 받은 조선여인 현인비

풍월 사선암 2012. 1. 8. 12:42

[이한우의 朝鮮이야기(7)] 명나라 영락제의 총애를 받은 조선여인 현인비

 

공조판서 지낸 권집중의 딸태종 때 18세의 나이로 명나라에 진헌녀로 보내져

미모 뛰어나고 현명한 처신으로 인기황후에 준하는 대접 받았지만 2년 만에 독살돼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생긴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해 오라태종8(1408) 416일 한양에 도착한 명나라 사신 황엄은 황제의 명을 태종에게 전한다.

 

건국 초 늘 갈등과 불화를 빚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겨우 정상화시켜 놓으니 여자를 내놓으라? 그러나 태종은 명 황제 영락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여차하면 조선 따위는 단숨에 정복해 버릴 그런 성품의 소유자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신생국 조선은 이렇게 해서 진헌녀(進獻女)들을 명나라에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태종이 명 황제의 명을 얼마나 엄중하게 생각했는지는 바로 그날 처녀 간택을 담당하게 될 임시기구인 진헌색(進獻色)이 발족된 데서 알 수 있다.

 

전국적으로 13세 이상 25세 이하의 양갓집 처녀가 선발 대상이었다. 노비나 서얼 출신은 제외되었다. 물론 온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두 달여의 탐문 끝에 63일 전국에서 뽑힌 처녀들이 한양에 집결했다. 경상도에서 6, 전라도에서 4, 충청도에서 3, 개성에서 12, 경기도에서 4, 황해도에서 1인 등 모두 30명이었다.

 

의정부에서는 일단 이 중에서 7명을 추려냈다. 처녀 간택을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는 의정부에서 맡은 것이다.

 

이들 중에서 권집중의 딸이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권씨의 미모는 다음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처녀 간택 작업이 한창이던 828일 평주(지금의 황해도 평산)지사 권문의가 순금사에 투옥되었다. 죄목은 의정부에서 절색으로 유명한 그의 딸을 데리고 가려했는데 끝까지 거부했던 것. 당시 명나라 사신 황엄이 권문의의 딸이 권집중의 딸 못지 않은 자색(姿色)을 갖고 있다는 비밀보고를 받고서 권문의의 딸을 선발하려 했으나 권문의가 딸이 아프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끝까지 보내지 않았다.

 

이 일은 권문의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날 수 없었다. 황엄이 저런 미관말직에 있는 신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데 이번에 선발된 여성들이 제대로 된 집안의 딸들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며 태종을 압박해 왔다. 결국 태종은 권문의의 투옥을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권문의는 딸을 내놓지 않았다. 잠깐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태종 때 실시된 호패법은 바로 이 권문의가 태종 63월 건의를 올려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결국 기존의 7명 중에서 5명을 태종과 황엄이 함께 고르기로 방침을 정한 직후인 106일 태종은 권문의의 석방을 명한다.

 

1011일 경복궁에서 태종과 황엄이 직접 고른 5인의 여성은 공조판서를 지낸 권집중의 딸, 판서를 지낸 임첨년의 딸, 영주지사를 지낸 이문명의 딸, 사직(司直) 여귀진의 딸, 수원기관(記官) 최득비의 딸 등이었다. 아마도 미모의 순서도 이대로였던 것 같은데 그 평점은 황엄이 독단적으로 결정했던 것 같다. 이날 태종은 간택을 끝낸 후 집무실로 돌아와 승정원 대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2등을 한 임씨는 관음보살의 상과 같아서 애교가 없고 여씨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으니 그게 무슨 인물이냐?” 황엄의 사람보는 눈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태종도 1등을 한 권집중의 딸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한 달 후인 1112일 황엄은 진헌녀 5명을 데리고 명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조정에서는 예문관 대제학 이문화를 진헌사(進獻使)로 임명해 황엄과 함께 보냈다. 그런데 이문화의 진헌의 명목은 처녀 진헌이 아니고 명 황제가 요구한 두꺼운 순백지 6000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 강한 태종으로서는 향후 역사에 조선 최초로 진헌녀를 명에 보낸 국왕으로 남게 될 것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5명의 처녀 중에는 이문화의 조카도 포함돼 있었다. 이문화는 이문명의 형이었다. 그들이 떠나던 날 그 부모 친척의 울음소리가 길에 끝없이 이어졌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이때 권집중의 딸 18, 임첨년의 딸 17, 이문명의 딸 17, 여귀진의 딸 16, 최득비의 딸 14세였다.

 

◀명()의 영락제

이때 명나라로 간 처녀 일행은 이듬해인 140929일 베이징(北京)으로 거동한 황제와 직접 알현하게 된다. 당시 명나라의 수도는 아직 난징(南京)이었다. 그 자리에서 권씨에게 마음이 빼앗긴 영락제는 권씨를 현인비(顯仁妃)에 봉하고 권씨를 수행했던 오빠 권영균은 광록시 경에 임명하였다. 3품의 벼슬이었다. 권영균은 훗날 광록시 대경으로 승진한다.

 

이때부터 현인비 권씨와 광록시 경 권영균이 누리게 되는 권력은 조선의 국왕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오히려 조선 국왕도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할 지경이었다. 현인비에 대한 영락제의 총애는 남달랐다. 현인비 또한 고려 말 원나라 황후가 되었던 공녀 출신 기황후와 달리 현명한 처신으로 크게 신망을 얻었다. 반면 그 오빠 권영균은 조선에서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게 되자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던 것 같다. 1424년 세종 6년 권영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갑자기 귀하고 부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권력자와 교제하여 자못 교만하였으며 주색(酒色)을 좋아하여 일찍 죽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현인비가 누린 권세는 너무나도 짧았다. 현인비에 봉해진 지 불과 2년도 채 안된 14101024일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권영균이 이듬해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조선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병사(病死)가 아니라 독살(毒殺)이었다. 황후에 준하는 예로 현인비를 대했던 영락제는 조사에 착수했고 황엄을 비롯한 측근인사들은 여씨가 현인비를 시기질투하여 독살한 것처럼 사건을 조작했다. 여씨란 태종이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으니 그게 무슨 인물이야고 했던 바로 그 여귀진의 딸이다. 그 바람에 태종 14919일 명나라에서 돌아온 통사 원민생이 그 같은 사실을 보고하자마자 태종은 여씨의 어머니와 친족들을 모두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기도 했다. 여씨는 명나라 조정의 한 달여에 걸친 단근질형(烙刑)을 당한 끝에 숨을 거두었다. 이어 임첨년의 딸도 불려가 목을 매 자살했고 이문명의 딸은 모진 국문 끝에 참형을 당했다. 결국 최득비의 딸을 제외한 4인의 진헌녀는 모두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다. 당시 현인비 독살사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죽어나간 사람만 3000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조선에서 간 환관이나 몸종들도 대거 포함돼 있었다. 태종 10102차 진헌녀로 뽑혀갔던 정윤후의 딸도 임첨년의 딸처럼 목매 자살했고 3차 진헌녀 둘 중 하나인 황하신의 딸도 참형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국인 궁녀 어씨와 여씨가 황엄과 손잡고 벌인 무고사건이라 하여 어여의 난이라고 한다. 이때의 여씨는 조선인 여씨가 아니라 중국 상인의 딸 여씨이다.

 

3차 진헌녀 두 사람 중 또 한 명은 한영정의 딸이자 한확의 누이다. 당시 한영정의 딸도 죽을 뻔했으나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그러나 결국 10여년 후인 1424년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자 30여명의 궁인과 함께 순장을 당했다. 역시 비명횡사를 했다. 그러고 보면 3차에 걸쳐 모두 8명이 진헌녀로 가서 최씨의 딸을 제외한 7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세종이라고 해서 진헌녀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세종 10년 이번에는 광록시 경 한확의 막내 여동생이 진헌녀로 뽑혀 갔다. 권영균과 달리 늘 조심하고 처신이 뛰어났던 한확은 세종 세조대를 거치며 좌의정에까지 오르고 그의 딸은 세조의 큰며느리가 된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바로 그다. 이로써 한확은 명나라 황실과 조선 왕실을 동시에 사돈집안으로 두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