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일반인들에게는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신달자 시인. 그녀가 2008년 3월 [민음사]를 통해 펴낸 에세이집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를 중심으로 카톨릭 신문과 조선타운플러스에 게재된 기사를 발췌하여 그녀 내면의 일단을 들여다본다. - 솔의향기 -
“어쩌면 나는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절체절명으로 불행한 일은 없다. 사람들은 아직 벗어날 방도가 있는데도 너무 일찍 절망하는지 모른다. 인간은 희망에 속는 일보다 절망에 속은 일이 더 많다. 내가 그랬다. 너무 빨리 불행하다고 외쳐 버렸는지 모른다. 그러고는 지쳐 쓰러지고 희망이 없다고 단정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어느 현자는 말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마음이 편안할 때 그것이 지고의 경지라고. 그래, 나는 지금 물처럼 편안하고 고요하다.” - 본문 중에서 - 시인 신달자는 시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리고 세상을 통해 시를 본다. 그에게 시와 세상은 우주로 향한 통로이다. 1964년‘여상’에서 여류신인문학상을 수상한 후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서 재 등단 한 시인은 시집 <봉헌문자> <아버지의 빛> <오래 말하는 사이> <열애> 외에 수필집 <백치애인> 소설 <물위를 걷는 여자> 등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로도 유명하다. ■ 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어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를 통해 아름답고 따뜻하기만 했을 것 같은 시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음이 공개되었다. 결혼 후 남편이 쓰러지고 무려 24년 동안 병간호는 물론 가장의 역할까지 떠안아야 했던 시인은 묵묵히 그 시간들을 이겨낸다. 장래가 촉망되는 진보적 경제학 교수였던 남편(고 심현성, 전 숙명여대 교수)이 1977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23일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남편은 반신불수가 되었고 그때부터 시인은 남편과 팔순 시어머니, 어린 세 딸아이(당시 막내는 세 살)를 뒷바라지하며 지옥 같은 현실을 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다섯이었다. 남편은, 그녀가 구걸하다시피 하여 간신히 학교에 복귀하지만 뇌졸중 후유증으로 사회생활이 쉽지 않았다. 그는 자괴감과 절망감에 빠져 자살소동으로 정신병원 생활도 하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희귀병을 앓기도 하였다. 심지어 시인에게 매질을 하는 등 점점 난폭해져만 간다. 그러한 와중에, 그녀에게는 기둥이나 다름없었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까지 쓰러져 9년 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신다. 기구한 운명 앞에 신을 원망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종교에 귀의한 후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그녀는 보따리 장사를 하며 생활을 꾸려가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문학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한다. 마흔 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쉰 살에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가 된다. 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난생 처음으로 집을 나섰어요. 동대문에 가서 옷가지를 떼어와 지인들에게 팔았는데 하루는 너무 속상한 일이 생겨서(보따리를 들고 찾아간 친척집에서 멸시를 당하는 일이 발생) 보따리를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생각을 다시 했어요. 딸들이 결혼 할 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약속도 지키고 싶었어요.” 시인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세 가지를 당부했다고 한다. 첫째, 평생 공부를 할 것과 둘째,돈을 많이 벌 것, 마지막으로 행복할 것이었다. 시인은 늦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세 가지 약속을 모두 지켰다고 한다. “교수가 되었으니 평생 공부하는 것은 이루었고, 또 월급이 나오니 그것도 되었고 행복한 것은 내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면 되니 어머니가 당부한 세 가지를 다 이룬 셈이죠.”
■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2000년 10월, 점심으로 국수를 먹다가 젓가락을 놓치면서 그녀의 남편은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그 순간 남편의 운명을 떠안아 버린다. 24년간 그녀를 괴롭혔던 그 운명이 마지막 잠이 든 것이다. 시인이 피를 토하듯 쏟아내는 인생사를보면 우선은 작가에게 그러한 삶의 고난이 있었음에 놀라고,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에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온 가족 집단자살’을 생각하고, ‘남편의 심장을 쏘기 위해 소리 없는 총’을 구하고 다녔으며, ‘시어머니를 너무 미워해 여름 밤 벼락이 치면 벼락 맞을까봐 나가지를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당시의 수난을 한 마디로 함축했다.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죽었고, 그는 아팠지만 살아있었다.’ 남편은, 결국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남편이 참 복되게 떠났다고, 스스로도 지나고 보니 고통스러웠던 일보다 잘 견뎌낸 일만 남더라고 했다. 시인은 이제 홀로 남아 시를 쓴다. 이제는 ‘다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됐고, 더 이상 세상에 진 ‘빚’도 없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그 남자 때문에 콱 혀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다시금 아내이고 싶다.’고 고백한다. 신명나게 도마질을 하고 수다를 떨면서 ‘여보! 여보!’ 그렇게 자꾸 남편을 부르며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그에게 맛보라고 권하고 싶단다.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여보! 비가 와요> 부분] 원수 같은 남편을 묻고 나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와 보냈던 세월이 좋았다고 회상한다. 긴 대화는 아니었지만, 간단한 이야기도 당시에는 좋은 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여보! 비가 와요> 부분] 얼마 전 그녀는 유방암 환자가 되었다. 직접 본인이 수술과 치료를 받아보니 그리도 자기를 못 살게 굴었던 남편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에세이는 ‘대학 정년퇴임 마지막 해를 앞두고 펴낸 책’이다. 남편이 타계한 이듬해인 2001년에 이미 써뒀으나, 치부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아 출판 결정을 수백 번은 번복했단다. 그러나 자신 같은 삶을 살았던 독자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어 출간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신달자의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참으로 솔직하게 쓰인 책이다. 남편의 폭력은 누구라도 쉽게 꺼낼 수 없는 얘기지만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글 어디에도 고고(呱呱)한 시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환자를 보살피는 동안 헛돈을 쓰는 일이 많으니 경계하라는 실용적인 충고도 잊지 않는다. "나는 지금 지난 세월이 아주 희미하다. 내가 결혼을 했었는지, 내가 그 남자 때문에 피를 토하며 죽는 고비를 넘겼는지, 내가 암 수술을 받은 환자인지 나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가 쓰러진 것도, 정신병원을 기어오르던 일도, 그가 쥐약을 먹고 널브러져 있었던 일도, 작은집 가듯 자주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도, 내 팔이 부러지고 눈알이 터졌던 일도, 온몸이 멍으로 푸른 바다를 짊어지고 다닌 것도, 하늘과 땅이 딱 들러붙는 생의 이상 현상도, 그가 숨을 거둔 일도 생각나지 않아. 24년이라는 그의 환자 생활 속에서 내가 열두 번도 더 곤두박질하며 죽음 연습을 했던 것도 나는 생각나지 않아. 시어머니가 9년이나 환자로 누워 있었던 사실도 기억나지 않아. 다 모르는 일이야. 나는 모든 걸 잊어버렸어.” 질곡의 세월 속에서 탁월한 감수성으로 건져 올린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깊은 사유를 때론 열정적으로, 때론 담담하게 풀어 나가는 시인의 이야기를 따라가노라면 삶의 한 고비를 넘어온 여성의 여유로움과 따스함, 모성과 포용력이 느껴진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시인의 눈이 뜨겁다.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딸 같은 제자인 ‘희수’에게 지난날을 말해주는 형식으로 4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산문 중간 중간에는 당시의 감정을 눈물로 쓴 1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들을 보는 독자들은 시인의 삶이 어떻게 그녀의 시의 뿌리를 이루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 낯선 것에 대한 매력을 동경한 시인의 첫사랑 1943년 12월 25일 경남 거창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시인은 어린 시절을 공주처럼 보냈다. 중학교 때는 한국무용과 피아노를 배우고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었던 소녀였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랑에 대한 감정이었다. “중3 때였어요. 서울 아이가 전학을 왔는데 얼굴이 하얗고 정말 잘생겼어요. 알고 보니 검사 아들로 배재중학교를 다니다 아버지의 전근과 함께 시골에 내려온 것이었어요.” 소녀는 서울 아이를 좋아했다. 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생전 처음이었어요.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편지를 써 본 것은...그런데 너무 엉뚱하게도 나는 처음 쓰는 편지에 김소월님의 진달래를 썼어요. 그 후 거의 매일 소월시집 전체를 베끼다시피 했을 거에요. 물론 한 통도 부치지 못했지만요.” 그렇게 시인의 첫사랑은 소월의 시집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나중에 친구들 모두 그 아이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단짝 친구도 그 아이를 좋아한다고 나한테 고백했으니까요.(웃음)" 시인은 낯선 것에 대한 매력을 동경했다고 한다. 서울아이를 좋아한 것도 그때까지 보았던 동네 아이들과 전혀 다른 느낌이 있어서였다.
■ 단어와 행간 사이에 함축된 언어가 바로 ‘詩’ 시인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시의 세계에 입문한다. 그 결과 경남백일장 당선과 함께 진로를 국문과로 결정하게 된다. 숙명여대 국문과에 입학한 시인은 시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배운다. “시 창작 시간이었는데 내가 쓴 15편의 시 중 최종 남겨진 것은 3구절뿐이었어요. 교수님은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쓰는 것은 시가 아니다’고 지적해 주셨어요.그 후 함축된 언어가 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잘 쓴 시는 단어와 행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뜻을 함축했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시인은 말한다. 시는 아주 질투가 많은 애인 같아서 자기만을 바라보지 않으면 무척 싫어한단다. 그래서 6년 동안 시만을 생각하고 시와 사랑에 빠진다. 2007년 10월 시집 ‘열애’를 출간한 시인은 이 시집으로 이듬해 3월 영랑문학상을 수상한다. “‘아버지의 빛’ 이후 6년 만에 쓴 열한 번 째 시집이었어요. 하지만 나에겐 첫 시집 같았어요. ‘열애’만큼 시를 뜨겁게 생각하고 집중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시야말로 남은 삶에서 가장 가까이 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깊게 깨달았어요. 그동안 독자들에게 잘 읽히고 문학적으로도 처지지 않은 시를 쓰려고 애썼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독자에 대한 염두, 문학성에 대한 집착을 모두 버렸습니다. 오직 나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성을 얻는 것이고, 독자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열애 - 신달자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 세상의 푸른 동맥속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잘 되었다 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 일회용 벤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고 군것질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면 열흘은 거뜬히 지나가겠다 피흘리는 사랑도 며칠은 잘 나가겠다 내 몸에 그런 흉터많아 상처가지고 노는 일로 늙어버려 고질병 류마티스 손가락 통증도 심해 오늘밤 그 통증과 엎치락 뒤치락 뒹굴겠다 연인몫을 하겠다 입술 꼭꼭 물어뜯어 내 사랑의 입 툭 터지고 허물어져 누가봐도 나 열애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작살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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