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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기사들의 휘호부채 어떤 것들이 있나?

풍월 사선암 2008. 8. 14. 20:19

프로기사들의 휘호부채 어떤 것들이 있나?

최고 명필은 천주더, 조치훈은 개성이 뛰어난 필체

 

 

무더운 여름, 누구나 부채를 한번쯤은 펼쳐 봤을 것이다. 요즘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패션부채, 헝겊부채 등 다양한 종류가 많지만 역시 종이로 만든 부채는 운치가 넘친다. 여기에 펼친 부채에 멋있는 붓글씨 한 점이 쓰여 있다면 그 운치는 더욱 감칠맛이다.


바둑에 기념이 될만한 상품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채이다. 특히 국내외 유명 프로기사들의 부채는 바둑 문화 기념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부채에 써 있는 휘호들은 주로 한자로 많이 되어있으며 하나같이 그 프로기사의 특징이나 바둑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깊이와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바둑 부채 중에는 개인이 좋아하는 문구나 단어를 한자로 쓰는 것과 특정 대회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부채에 출전선수들이 모두 자신의 이름을 사인한 부채 등이 있다. 여기에 바둑 격언이나 사활 문제 등을 넣어 만든 부채들도 있다. 이들 부채의 가격은 약 10000원~20000원 사이이며, 특정 대회에 출전한 기사들이 단체로 본인의 사인을 하거나 대회로고를 새긴 부채등은 비매품인 경우도 있다.


90년대 후반부터 휘호 부채를 만들기 시작한 한국은 조남철 9단, 김인 9단,이창호 9단, 서봉수 9단, 유창혁 9단 등 정상급 기사들이 휘호를 담은 부채를 내놓았다. 휘호 부채는 대부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합죽선으로 고급스런 재료를 써서 만들었다. 하지만 수량면에서는 일본 프로기사들의 휘호 부채와 비교해서 그다지 많지 않다.


한국 바둑계의 대부 조남철 9단은 바둑으로 삶의 근심을 잊는다는 수담망우(手談忘憂)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역대 세계최강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창호 9단은 한국 고유의 전통부채인 합죽선에 “성의(誠意)”라는 휘호를 썼다.


또한 조남철 시대에 제동을 걸며 당대 최강자로 부상한 영원한 국수 김인 9단은 현묘함을 낚는다는 뜻의 구현(鉤玄)이라는 휘호 부채를 남겼다. 김인 9단의 휘호는 국내 프로 본인이 쓴 거로는 최고의 경지로 평가 받고 있다.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은 “무심(無心)”이라는 휘호를 즐겨 썼으며, 세계최강의 공격수 유창혁 9단은 나날이 새로워 진다는 우일신(又日新)의 휘호를 썼다.


이외에도 명지대학교 정수현 교수의 부성무물(不誠無物), 권경언 6단의 망물아(忘物我), 백성호 9단의 기선일여(棋仙一如), 이미 고인 된 전 한국기원 총장 임선근 9단의 휘호는 노장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여기에 루이나이웨이 9단의 몽(夢)은 그 사람의 기사 실려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한국기원 바둑용품매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부채가 바로 조남철 9단의 부채와 이창호 9단의 휘호부채라고 하며, 가격은 12000원.

 


일본은 휘호 부채가 아주 많다. 살아있는 기성 우칭위엔 9단은 <중용> 제33장 가운데 군자의 도에 관한 내용중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이라는 말을 휘호로 선택했는데 이는 군자의 도는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시 바둑의 기예를 중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1950년대 전성기를 누리면서 일본 최고(最古) 본인방 타이틀 9연패(7기~15기)의 금자탑을 쌓은 故 다카가와 가쿠(高川格) 9단의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는 뜻의 휘호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는 당시 많은 바둑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한국의 윤기현 9단도 이 휘호를 즐겨 썼다.


37년 만에 다카가와9단의 9연패 기록을 깨뜨리고 10연패(44기~53기)를 달성한 조치훈 9단이 본인방 5연패 달성 당시 하객들에게 나누어 준 기념부채에 당대(唐代)의 문인 이익(李益)의 시 중 한 구인 '君看白日馳 何異弦上箭(시간의 흐름은 막 쏘아지려는 화살과 같다)'라는 휘호를 남겼다. 이후 조치훈 9단은 “소심(素心)”이라는 휘호를 담은 부채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프로기사 가운데 가장 개성이 뛰어난 필체라는 찬사를 받는다.

 


후지사와(藤沢秀行) 9단의 “대도무문(大道無門)”은 글씨가 가장 독창적이라는 평가이다. 깨달음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道理)나 정도(正道)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누구나 그 길을 걸으면 숨기거나 잔재주를 부릴 필요(必要)가 없다는 말이다. 국내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휘호를 즐겨 썼으며, 최근 벌어진 삼성화재배 예선결승에서 박지은 9단을 꺾고 본선에 진출한 중국의 정옌 2단이 대국중 사용한 사진이 소개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사카다 에이고(坂田栄男) 9단의 휘호는 유현(幽玄)이다. 이치나 아취(雅趣)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그윽하며 미묘하다는 뜻을 품고 있는 ‘유현’ 평생 반상 위에서 진리를 찾아 헤맸으나 아직까지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둑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다. 현재 일본기원의 인터넷 대국실 이름이 ‘유현의 공간’이다.


우주류의 창시자 다케미야(武宮正樹) 9단은 역시 “우주류(宇宙流)”라는 휘호의 부채를 선보였다. 다케미야9단의 “우주류(宇宙流)”는 반상 위의 천원을 중심으로 거대한 우주를 그려내는 화려함은 하나의 기풍으로 자리잡았다. 반상 위에 우주 삼라만상을 담아내는 그의 깨달음이 곧 그의 휘호인 것이다.


고인이 된 가토마사오(加藤正夫) 9단은 “화광(和光)”이라는 휘호를 썼다. 화광은 자기의 지덕(知德)을 감추고 밖으로 드러내지 아니하는 자만하지 않는 겸손의 뜻을 나타낸다.


“천도(天道)”는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의 휘호이다. 천지(天地) 자연(自然)의 도리(道理)는 물론 인간속세의 욕계ㆍ색계ㆍ무색계(無色界)를 총칭하는 말이다.

 


현재 일본바둑의 신4인방으로 꼽히는 야마시타 게이고 기성, 장쉬 명인, 하네나오키 본인방, 다카오신지 왕좌의 휘호는 어떨까? 야마시타 게이고(山下敬吾) 9단의 “천락(天樂)”은 바둑을 통해서 자연인 하늘과 조화되는 즐거움을 깨닫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장쉬 9단은 묘수풀이라는 뜻의 “詰碁”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카오신지(高尾紳路) 9단은 지극한 정성이라는 의미의 “지성(至誠)”을 휘호로 삼았다. 최근 3연패 끝에 4연승을 거두는 기적의 역전드라마를 쓴 하네나오키(羽根直樹)의 “사무사(思無邪)” 는 생각이 바르고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바둑을 통한 마음에는 사악함이 없다는 뜻일 게다.


반상의 악동 요다(依田紀基) 9단은 “일기일회(一期一會)”는 평생(平生)에 단 한 번 만나게 되는 기회(機會)를 소중(所重)히 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만 출신기사들 가운데 린하이펑(林海峰) 9단은 일체(一切)의 존재(存在)는 다 무상(無常)한 것이므로 '나'라는 존재(存在)를 부정(否定)하고 '나'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무아(無我)’라는 휘호를 썼다. 왕리청(王立誠) 9단은 “왕도(王道)”, 왕밍완 9단은 “동심(童心)”의 휘호 부채가 있다.


이외에도 오타케(大竹英雄) 9단의 석심(石心), 이시다(石田芳夫) 9단의 무문(無門), 고바야시사토루(小林覺)의 “천공(天空)”등이 있다. 일본기원 소속 기사들의 휘호 부채 가격은 1600엔 가량으로 동일하다.


중국은 이와 같이 부채에 휘호를 쓰는 문화에 익숙해 있지 않아서 인지 젊은 기사들의 휘호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원로기사와 스타급 기사들 몇 명이 휘호 부채를 만들었는데 녜웨이핑 9단이 ‘충천(冲天)’ 이라는 휘호를 쓰며, 그의 영원한 라이벌인 마샤오춘 9단은 ‘마음이 가는 데로’ 라는 뜻의 ‘수의(隨意)’라는 휘호를 썼다.


중국기원 원장을 지낸 천주더 9단은 바둑의 도를 가리키는 ‘기도(棋道)’ 왕루난 8단은 바둑의 즐거움을 강조한 “기락(棋樂)”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특히 천주더 9단의 휘호는 한-중-일을 통틀어 가장 명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 외에 휘호를 남긴 기사는 거의 없다. 휘호를 남기기에는 너무 젊거나 함량 미달이라는 의견이 있으며, 또한 이런 휘호는 서예를 어느 정도 공부하지 않으면 쓰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는 쓰기 힘들다는 이유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