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바둑,오락

바둑시편 - 장석주

풍월 사선암 2008. 7. 28. 18:52

  

 

詩 바둑시편 - 장석주

 

바둑 1

낮과 밤이다.

하늘과 땅이다.

남자와 여자다.

흑과 백이 공존하는 태극이다.

흑과 백은 한 점의 돌로써 평등하다.

이 無等의 나라에

피비린내 자욱한 전쟁이 휘몰아친다.

천원을 중심으로

흑백이 어울려 추는 한 판 춤,

삶과 죽음이 뒤엉겨

천변만화하는 우주의 춤이다.


바둑 2

선점할 자리를 놓친 포석,

주도권은 상대에게 넘어간다.


적의 급소는

나의 급소인데,

상대에게 선점을 당해 돌들이 끊긴다.

판세가 금세 상대쪽으로 기운다.

살 길을 찾아 고단한 행마를 하며

천지를 떠도는

내 곤마여, 유민들이여,


오오, 내내 쫓기는 한 판의 삶이다,

한 수 늘어진 수상전이다.


바둑 3

착오로 패착을 놓은 뒤에

고통스러운 후회가 밀려온다.


돌들은 회돌이를 당하거나

아차, 하는 사이에 축에 걸렸다.

회돌이로 몰사를 하고

축에 걸려 숨통이 끊겼다.

이번 생은 그르쳤다 !

아득바득하던 생사의 끈을 놓아버리니

차라리 마음이 고요하다.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돌들이 뿜는

피로 선혈이 낭자한 판,

오, 그 피들 위로

수정의 무지개가 선다.


바둑 4

새파랗게 젊은 나이다.

벌써 이승의 인연을 놓아야 하나,

억울하다.

한 판의 승부는 이미 끝났다.


정석을 따랐으니

행마가 잘못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번 기울어진 국면을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들이여,

낙화여.


바둑 5

꽃놀이 패다 !

그래,

비로소 승기를 잡았다.

상대가 당황하는 기색이 확연하다.

상대의 대마가 한오라기 살 길을 찾아

꿈틀대며 앞으로 나간다.

상대가 나가는 길은 欲界의 불길 속,

그 길은 얼마나 뜨거우랴.


한 수로 판을 그르쳤으니

아쉽겠지만 차라리 빨리 돌을 거두어라 !

나는 이미 그대의 死後를 보았다.

유리한 국면일수록 냉정해진다.

한 수 한 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착점으로

상대의 숨통을 죈다.


바둑 6

간밤의 패국이 아쉬워

혼자 돌을 놓아가며 복기를 한다.

복기를 하니 어지럽던 한 판의 국면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된다.


아하, 이 수가 과수였구나.

상대가 강한 곳에서 싸움을 벌인 것은

만용이었다.

끝내 패국의 빌미가 된 한 수를 찾아낸다.


이렇게 뻔한 수를 보지 못했다니,

몇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욕심이 화근이었다.

성급한 욕심을 버려야

이기는 수순이 환하게 보이는 법이다.


오, 뒤늦게 깨닫는 한 수의

과욕 !


바둑 7

내 자존심을 짓밟고

호주머니 푼돈을 갈취한

내기 바둑꾼은 돌아갔다.


그는 내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고수였다.

다시는 그와 내기바둑을 두지 않으리라.

글러먹은 세월이듯

아직 쓸어담지 않은 흑돌과 백돌들은

바둑판 위에 흩어져 있다.


모둠발을 딛고 오는 저녁,

축에 걸린 돌처럼

아담한 고독에도 꼼짝 못하는 인생 !


바둑 8

국면이 아주 미세한 채

판은 종국으로 치닫는다.

피가 마르는 싸움은 이제 끝나고

몇 수를 더 두면

판을 거둬야 한다.

상대도 나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 없는 和局이다.


남은 곳은 공배 자리뿐.

아무리 치밀하게 계가를 해봐도

한 집 반이 모자란다.

상대의 승리는 부동이다.

한 점 한 점

판 위에 돌을 올려놓을 때마다

상대의 힘찬 기상이 전해진다.

결국 한 집 반의 장벽을

넘지 못하는가.


인생이란 늘 간발의 차로

승패가 갈리는 법,

남은 것은 패배를 승복하는 일뿐이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공배 자리를 메꾸는데,

자욱한 피로가 몰려온다.


바둑 9

강산이 피로 물들고

대마 숨통이 끊긴 뒤 비로소 깨닫는다.

눈앞의 몇 푼 실익에 현혹되어

두 눈 못낸 대마는 쫓기는 신세다.

설마 대마가 죽으랴,

방심했는데 대마의 퇴로는 다 끊겼다.

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대마의 살 길은 없다.


이긴 이유는 단 하나다.

돌이 놓여야 할 자리를 놓치지 않고

둔 것이다.

그러나 진 이유는 천 가지다.

인내심이 부족했고

전체를 놓치고 부분에만 집착했다.

진실은 늘 거울의 背面에 있는 것,

그것을 못봤기 때문에 판을 그르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