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바둑,오락

[나만의 Knowhow]정석암기 편

풍월 사선암 2007. 9. 18. 08:37

  [나만의 Knowhow]정석암기 편

 

정석, 절대로 공부하지 마라


바둑 한 점 늘어보기를 소원하는 이들에게 정석은 ‘애물단지’, ‘뜨거운 감자’이다. 공부를 하자니 전화번호부를 닮은 정석사전 앞에서 한숨이요, 그렇다고 속 시원히 집어치우자니 만년 하수의 설움에 눈물을 뽑는다.


거참, 정석공부같은 거 안하고 바둑 좀 쑥쑥 느는 비결 없나? 입맛을 쓰게 다셔보지만 시원한 비결이란 게 눈에 띌 리 없다. 시중에는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란 책이 잘 팔린다는데 누가 ‘정석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책 하나 안 쓰나?


걱정은 접어두자. 모로 가든 뒤로 가든 한양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길이란 길은 로마로 통하지 않던가? 꼭 머리 싸매고 정석공부 안 해도 실전에서 잘 써먹고 안 당하면 되는 것 아니던가?


공부 많이 하기로 소문난(본인은 극구 소문을 부인하고 있지만) 최규병 九단은 한 마디로 “정석? 그거 공부하지 마세요.”라 잘라 말한다. 조금 더 들어보자.


“저기 제 책장에 꽂혀 있는 정석대사전 보이시죠? 그런데 저기 사전에 안 나와 있는 정석의 수가 아마 저 책 분량 정도 될 겁니다. 그러니 공부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죠.”


뿐만 아니다. 최九단은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정석이란 게 흑백 서로간의 균형을 맞추자는 거죠?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그 균형이란 것도 어쩔 수 없이 바뀌게 돼요. 서로 균등한 갈림으로 알았던 것이 다시 재조명되기도 하고, 덤이 변함에 따라 어느 한쪽에게 유리하게 판명되기도 하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석은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원리의 대상이라는 것.”


그렇다. 정석공부의 목적은 암송에 있는 것이 아니다. 원리를 제대로 깨닫고 기리(棋理)를 터득하는게 중요하다.


기본형 50개만 외우자


오래 전 우리 아버지, 형님 세대에서는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우는 무지막지한 공부법이 유행한 시절이 있었다. 한 페이지를 다 외우면 자랑스레 사전 한 장을 뜯어 입에 넣고 염소마냥 질겅질겅 씹어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외국인 앞에 서는 순간 머릿속이 하얀 A4 용지로 변하고 마는 비극이여.


영어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듯 영어단어는 단어 자체만 외워서는 백날 소용없다. 반드시 문장과 함께 통째로 외워야 혓바닥에 제대로 들러붙게 된다.


정석 또한 다를 게 없다. 단어장에 적은 영어단어 달달 외워봐야 별 효험이 없듯 정석사전 침 발라가며 제1장「화점편」부터 눈에 불을 켜봐야 돌아앉으면 잊게 된다.


이쯤에서 최九단이 제시하는 정석암기 비법을 챙겨보자. 이미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는 박영훈 二단을 길러낸 최九단이니 만큼 남다른 교육 노하우가 있지는 않을까?


우선 기본형 50개를 외우자. 이건 이해고, 원리 터득이고 따질 게 없다. 서당 아이들이 앉아 몸을 흔들어가며 천자문을 외듯 냅다 반상 위에 돌을 두드려가며 확실히 외워두자. 말이 50개이지 기본형이기 때문에 사흘이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오로지 기본형만을 외울 것이지 파생형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것이다. 파생형, 변화형은 나중에 힘이 붙은 뒤 눈으로만 쓰윽 훑어봐도 충분하다.


다음은 포석이다. 정석과 포석은 70 평생을 함께 한 노부부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최九단은 정석 100개를 외느니 잘된 포석 100국을 놓아보는 것이 훨씬 득이라고 말한다. 포석 안에서 정석을 대하다 보면 돌의 흐름, 정석이 만들어지는 원리 등이 훤하게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판세에 따라 정석을 선택할 수 있는 고급 능력도 함께 붙는다.


구슬 서말? 꿰어야 보배지


신문 관전기를 맡고 있는 한 아마고수는 대학시절 ‘일주일에 바둑책 한 권 떼기’를 철저히 시행한 결과 1급에 올랐다는 전형적인 이론파. 그는 정석공부를 할 때 무조건 소목정석 편부터 보라고 주장한다.


화점바둑이 주류인 최근 경향에 따라 ‘실용적’이라는 이유 하나로 많은 바둑팬들이 화점정석 공부에 주력하는 경향이 있는데(이런 이유로 대개의 정석책에는 화점편이 맨 앞에 나와 있다) 행마와 맥을 배우기 위해서는 소목정석이 최고라는 것.


한국기원 사이버대국실에서 괴력의 해머펀치로 소문난 K 4단은 기자와의 채팅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석공부 노하우를 밝혔다. 잡초류답지 않게 정석에 강하다는 평을 듣는 그의 노하우는 그야말로 순도 100%의 실전형.


K씨는 정석 한가지를 익히면 최소한 30여 판에 걸쳐 실전에 응용한다. 즉, 중국식 포석에 자주 등장하는 정석을 배웠을 경우 흑을 들었다 하면 무조건 중국식 포석을 펼치고 본다. 세력형 화점정석을 써먹기 위해 3연성만 수백 판 두었다는데, 이쯤되고 보니 그 정석에 관한 한 입신(?)의 안목을 지니게 됐다는 것.


이 말을 들은 양재호 九단이 미소를 짓는다.


“정석 하나를 외우면 바로 실전에서 써먹는 게 최고죠. 복잡한 정석을 사용해서 초반에 상대방을 호되게 혼내 주었을 경우 그 짜릿한 쾌감으로 인해 다시는 그 정석을 잊지 않게 됩니다. 반대로 왕창 당해 바둑을 망쳐버렸을 때에도 나중에 정석 책을 뒤져 반드시 그 정석을 익혀두는 게 중요하죠.”


정석을 모르고선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없다. 정석 중독증 환자가 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거꾸로 정석 불감증 환자가 되는 것 역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정석을 배우고 싶다고? 정석 속에 숨겨져 있는 행마, 맥, 사활의 보고(寶庫)를 찾아내고 싶다고?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벼운 정석책 한 권을 사자. 그리고 기본형 정석 50개만 눈 딱 감고 외워버리자. 그 후엔 50발의 탄환을 장전하고 반상의 전선으로 뛰어들어가 닥치는 대로 한판 전투를 벌여보자. 장렬한 전사면 어떻고, 빛나는 승전이면 어떠한가. 이렇게 쌓인 당신만의 노하우. 그게 진짜 힘이다. 내년도「나만의 노하우」편에 실릴 당신의 수기를 기대한다.


[양형모 기자/ryuhon@baduk.or.kr 구성 : Cybero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