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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Knowhow]기보복기 편

풍월 사선암 2007. 9. 18. 08:29

[나만의 Knowhow]기보복기 편


통신바둑 동호회에서 '싸부'로 통하는 K씨. 하지만 K씨의 기력은 고작(?) 3급에 불과하다. 아마 5단 이상의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거친 무림(武林)의 세계에서, 과연 K씨는 무슨 수로 뭇 하수들이 우러러마지 않는 '싸부'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

이는 입문을 갓 벗어난 초급자들을 단기간에 중급자 수준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그의 비상한 능력에 기인한다. 그의 독특한 교수법을 통해 '단기완성'의 짜릿한 맛을 본 제자들도 어언 10여명이 넘고 개중에는 청출어람(靑出於藍)하여 1급에 도달한 이들도 2명이나 된다.


그렇다면 과연 K씨의 일류 트레이닝법은 어떤 것일까?


알고보면 새로울 것도 없다. 바둑을 두는 이라면 누구나 다 하고 있는 '명국복기'가 전부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같은 칼이라도 사용하는 방법과 노하우에 따라 고수와 하수의 갈림길이 생기듯, 같은 '명국복기'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것이 K씨의 주장.


그럼 K씨가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는 그만의 독특한 명국복기법을 살짝 엿보자. 대체 뭔 조화를 부리고 있는 걸까? 일단 기보집을 한권 구한다. 가급적이면 자신의 기풍, 또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프로기사의 기보집을 구한다.


K씨의 명국 복기법 노하우


조훈현의 현란한 포석감각과 전투기술에 매료된 사람이라면(참고로 K씨는 조훈현 九단의 기보집으로 공부했다고 함) 조九단의 기보집을, 섬세한 끝내기와 두터움을 좋아한다면 이창호 九단의 것을, 행마의 효율과 미학에 깜빡 넘어가는 이라면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九단의 기보집을 사면 된다.


조금 고풍적인 기보집도 나쁘지 않다. 감각파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나 접근전의 귀신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九단의 기보집은 언제 펼쳐 보아도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 마력이 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렵지만 과거 명국복기용의 바이블로 꼽혔던 우 칭위엔(吳淸源) 대국집도 좋다. 지금 프로기사로 활동하는 사람치고 우 칭위엔의 대국집 한번 독파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일단 기보집을 구했으면 당분간 다른 책들은 박스에 정리해 창고에 넣어 두자. 마치 고시 준비생들이 각종 수험서를 나름대로 정리 '단권화'를 시도하듯. 당장은 기보집 한권만으로 충분하다.


처음에는 스적스적 놓아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면 짬을 내어서라도 바둑판 앞에 앉아 기보집을 들고 차례대로 복기를 해나간다. 대개 3개월쯤 지나면 그럭저럭 두터운 기보집 한권을 놓아볼 수 있다. 일독이 끝나면 바로 2회독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번에는 처음에 비해 조금 시간을 들여 복기해 나간다.


'과연 왜 이곳에서 이렇게 두었을까'하는 생각을 해가며, 역시 목차에 따라 꼼꼼히 놓아본다. 이래서 또 3개월. 3회독부터는 뭔가 달라진다. 스스로 머리가, 몸이 그걸 느끼게 되는데, K씨는 이를 마라톤에서의 20km지점으로 비유한다.


마라톤 완주를 해본 사람이라면 20km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프로, 아마 할 것 없이 모두 공통되는 이야기로 황영조, 이봉주에게도 20km지점은 '악마의 계곡'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계곡을 통과하게 되면 돌연 구름 위를 달리듯, 꿈결처럼 질주하게 된다는 것. 마치 다리에 터보엔진이라도 가동한 것처럼 탄력이 붙게 되고, '아, 내가 지금 달리고 있구나'하는 충족감이 온 몸과 정신을 감싸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20km를 달려본 사람은 누구라도 '달리는 행위'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만단다.


3회독을 마치게 되면, 바둑에 대한 나름대로의 눈이 트인다. 돌의 방향이 보이고, 머리에 앞서 손이 먼저 그 지점을 찾는 신비한 능력이 붙는다.


이제는 박스 속에 쑤셔박아 두었던 사활집이며, 정석책 등을 꺼내어 들추어볼 차례. 과연 독자는 무릎을 친다. '아, 이게 이런 것이었구나'. 예전에 볼 때엔 안개 너머 아물거리던 내용들이 해면에 스며드는 물처럼 빨려오는 느낌. 만사는 결국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신비의 5단계 복기법


사실 프로기사들의 공부는 실전을 제외하면 99% 기보복기로 이루어진다. 뭐니뭐니 해도 기력향상 및 유지에 이 만한 공부가 없기 때문이다.


'공부벌레'로 소문난 양재호 九단은 기보복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반드시 다음 수를 놓아보기 전에 나라면 어디를 둘 것인가를 생각하는 습관을 들일 것. 틀리면 왜 틀렸을까를 생각할 것. 그저 무의식적으로 반상에 돌을 늘어놓는 것은 팔운동에 불과할 뿐이다."


바둑계 '명강사'로 알려진 한철균 六단은 '정독이냐, 다독이냐'의 문제를 놓고 다음과 같은 요령을 제시한다.


"끝까지 놓아보려 욕심을 부리지 마라. 처음에는 30수 정도 늘어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다음엔 50수, 또 다음엔 70수. 어차피 후반은 실전에서도 거의 만나기 어려운 변화들인 데다 수를 찾기도 힘들어 지나친 인내를 요한다. 특히 초반을 강조하는 것은 바둑을 두는 데에 가장 중요한 '돌의 방향'에 대한 올바른 감각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아마5단 L씨는 독특한 공부법으로 쏠쏠한 성과를 올린 사람이다. L씨의 공부법은 이른바 '연상기억법'.


프로의 명국을 30여수 언저리까지 두어보며 암기한 뒤, 시간 나는 대로 이를 머릿 속에 떠올려보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10여수 정도로도 벅차겠지만 차츰 이력이 붙으면 30수가 아니라 50수 이상도 가능해진다고 한다. L씨는 이 방법으로 그토록 힘들었던 1급의 관문을 무난히 돌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견기사 유병호 八단은 '5단계 복기법'을 강조한다. 즉, 이것저것 중구난방으로 놓아보는 것보다는 하나의 기보를 가지고 최소한 다섯 번 정도는 복기해 봐야 뚜렷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

1단계에서는 부담없이 슬슬 놓아보며,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한다. 그리고 2단계에서는 '과연 왜 이곳에 두었을까'하고 생각하면서 또 한번 복기해 본다.


3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참고도와 해설을 꼼꼼히 챙기며 연구다운 연구에 들어간다. 4단계에서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실전을 비교 검토하는 시간이다. 이 단계쯤 다다르면 어느 정도 기보 하나가 통째로 머릿속에 조각칼 음각하듯 새겨지게 된다.


최종 5단계는 책을 내려놓고 외워서 복기를 해보는 코스이다. 유九단은 만약 여력이 된다면 기보의 위치를 거꾸로 하여 한번 놓아볼 것을 권장한다. 이는 일종의 5단계 코스의 보너스 트랙인 셈.


이렇게 5번 정도 기보를 놓는 데에는 대략 서너 시간 가량이 소요된다. 꽤 시간과 품이 드는 일이긴 하지만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몸보신용 '백사' 한 마리 고아먹는 것보다 낫다고 하니 짬을 내어 한번쯤 도전해 보시길.


(양형모 기자/ryuhon@baduk.or.kr 구성: Cybero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