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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는 왕도가 없다

풍월 사선암 2007. 9. 18. 08:17

    바둑에는 왕도가 없다


바둑을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은 가끔 이런 질문을 한다. '바둑은 참 어려워요. 좀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없나요?'글쎄, 흔히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는데 바둑이라고 그런 길이 있을까?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이 말은, BC 300년경에 활약한 '기하학의 성자' 유클리드의 일화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 마케도니아의 귀족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학문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은 인물로서 알렉산드리아에 학교와 도서관을 세우고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해 학문을 연구하도록 했다. 아울러 자신도 초빙한 학자들의 강의를 즐겨 들었는데 학문의 즐거움을 익히 아는 왕에게도 기하학만은 매우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루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강의도중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

'기하학은 정말 어렵군. 좀 쉽고 빠르게 배우는 방법이 없을까?'


유클리드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돈으로 학위를 매매하고 강단에 서기보다 정치판에 불려다니기를 좋아하는 요즘의 '무늬만 학자'들이라면 그저 넙죽 엎드려 '황공하옵니다'를 연발하겠지만 유클리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기하학에는 왕도가 따로 없습니다.'


과연, 기하학의 성자다운 말이다. 그렇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따로 없다'는 이 말이 오늘날, '수학에는 왕도가 없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로 확대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둑에도 왕도는 없다. 학문을 배우고 익히듯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걸음 정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바둑을 왜 배우려고 하는가?'라고 스스로 질문해보는 것이다. 머리가 좋아진다니까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려고? 여가선용? 치매예방에 좋다니까? 아니면 직장 상사가 바둑을 좋아하니까?


이유는 많겠지만 바둑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겸손'이다.


잠깐 바둑판을 보자. 흑1을 중심으로 좌우, 상하가 꼭 같은 형태로 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로 한번씩 교대로 두는 규칙을 가진 바둑에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장치다.


우리는 이 장치에서 '내가 두는 곳과 꼭 같은 가치를 지닌 곳을 상대도 둘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상대도 나와 동등한 환경과 조건을 가졌으니 가볍게 대하지 말고 겸손하게 시작하라는 뜻이다.


아울러 이 장치는, 바둑이 '마지막까지 균형을 유지해나가는 게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상대도 나와 꼭 같은 가치를 지닌 곳을 두게 되므로 가장 큰 곳부터 가장 작은 곳까지 순서대로 두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쌍방의 우열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둑의 본질은 전쟁이라기보다 기업의 경영에 더 가깝다. 전쟁의 병법이 고전적 의미 그대로 '상대를 속이는 것'이라면 바둑에는 병법이 없다. 즉, 춘추전국시대의 천재 병법가 손무(孫武)는 자신의 병법 13편 중 시계편(始計篇)에서 '전쟁은 속이는 방법[兵者詭道也]'이라고 했는데 평면의 바둑판은 상대도 나와 꼭 같이 볼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코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바둑에서 '함정수에 빠졌다'든가 '속아서 졌다'는 것은 수읽기가 약해서 제대로 응수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바둑은 결코, 한순간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런 욕심을 품는 순간 단숨에 무너진다.


기업의 경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편법과 부조리로 어느 날 갑자기 거대그룹으로 떠오른 신흥기업들이 그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을 질리도록 보아왔다.


느린 듯하지만 균형을 잃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두텁게 나아가는 이창호의 바둑이 세계를 평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빨리 빨리'를 외치는 이 시대의 기업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탄탄한 기초 위에 한 걸음, 한 걸음 두텁게 나아간다. 어떤가. 너무 평범해서 잊기 쉬운 이 겸손한 마음가짐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기업경영의 지침이 아닐까? 바로 그런 마음의 기초가 돼 있다면 당신은 이제 바둑은 물론, 그 어떤 세계의 창업자가 되어도 좋다.


(손종수 wbstone@baduk.or.kr 2002-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