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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썬글래스에 비친 바둑

풍월 사선암 2007. 9. 18. 08:11

[Photo]썬글래스에 비친 바둑

 

김종필(金鍾泌 충남부여 1926~) : 정치인,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5.16정변을 성공시켰으며, 중앙정보부 창설, 공화당 창설, 3공화국의 정치및 경제, 외교 정책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좋든 싫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의 정치 및 권력기관의 골격을 형성한 사람중 하나. 43년간 정치현역이었이며, 국무총리를 다수 역임했고, 국회의원 8선을 지냈다.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정치지형인 '3김시대'를 끌어 갔으나, 2004년 4월 19일 '삼성채권수수'혐의와 함께 정치고향이기도한 충청권에서의 영향력 감소로 마침내 은퇴를 결정.


여기에선 정치인으로서 김종필씨의 '공과 실'을 논하기 전 그가 바둑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 원인은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한장의 사진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서슬 푸른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김종필씨의 야릇한 미소와 썬글래스에 비친 '바둑한판'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사진을 누가 찍었을까? 자기가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두던 바둑을 구경하던 것일까? 썬글래스를 끼고 바둑을 두는 건 약간 불편할 테니까 구경하는게 아닐까 하지만, 당시 저게 큰 유행이었다면 대국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김종필 '총리'를 직접 본 일이 있긴 있었다. 정확한 날짜와 장소도 기억해 낼 수 있다. 99년 1월 7일 서울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의 삼청당(三淸堂)에서였다. 제10기 기성전 도전3번기 제1국, 이창호 9단과 목진석 4단의 대국이 그곳에서 그 날짜에 열리고 있었다.


아무튼 총리공관에서 도전기가 열린 것은 그때가 최초였다고 한다. 바둑계의 사람들도 재미있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일속에 가려진(^^;) 총리공관을 구경할 기회니까. 점심이후에 총리공관에 도착해 총리실에서 제공한 점심을 먹어보지 못한게 유감이었지만, 어쨌든 정계와는 전혀 관련없던 많은 사람들이 도전기 덕분에 총리공관을 구경할 기회를 얻게 됐다.


기념사진이야 아침에 다 찍었을 테니까, 대국이 속개되는 오후에는 달리 행사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공관에 마련된 검토실에서 검토를 하거나, 대국자가 장고를 오래하면 그냥 바둑을 두기도 하고 그랬다. 아무튼 그러한 오후의 한때 총리가 불쑥 검토실에 나타났다.


이날 73회 생일을 맞은 총리는 굉장히 젊어 보였다. TV에서 보던 모습보다 훨씬 젊어 보였으니까 말이다. 흔히 '유명 정치인들을 직접 보면 놀랄정도로 젊다'라는 말을 듣긴 했어도 목소리와 외모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총리란 자리 자체가 '실세'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총리'가 높긴 높은 자리였나보다. 총리는 진행중인 바둑이 궁금해서 검토실에 잠깐 들른 것일텐데, 검토실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기립했다. 일어날 생각이 크게 없던 사람도 이럴때면 덩달아 엉거주춤 일어나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 총리를 보게 된다.


실제로는 처음 듣는 김종필 총리 특유의 음색이 흘러나왔다. "아, 이런, 여러분 일어나지 마세요, 앉아서 검토하던 것 하시고, 구경하던 것 구경하세요. 바둑두고 계시면 마저 두세요. 여러분 앉으세요."


검토실을 지나던 총리가 문득 멈춰선 것은 권경언 6단의 앞에서 였다. 총리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듯이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을 하고서는 권 6단에게 인사를 하고 두손으로 권 6단의 손을 꼭 잡기도 했다. "바둑TV에서 많이 �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고전을 잘 알고 계신지요? 바둑TV에서 나오는 그 프로, 아주 잘보고 있습니다."


권경언 6단은 바둑TV에서 '현현기경'을 강의중이었는데 주로 고전의 이야기를 이용해 사활문제를 소개하고는 했었다. 한학에 조예가 있는 권경언 6단을 보자 역시 인문교양에 관심이 많던 총리가 반색을 한 것이다. 바둑계의 다른 유명한 사람들보다도 권 6단에게 보인 총리의 관심은 일단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총리의 생일이었지만 특별히 다른 일은 공관에서 없었다. 총리가 생일상을 특별히 차리거나 하객을 받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둑이 끝난 뒤 총리는 고급 비자 바둑판을 (재)한국기원에 선물했다. 아무리 적게 부른다고 해도 수백만원은 아주 가볍게 '훌렁' 넘겨버릴 만한 고급바둑판이었다. 보통이라면 '그날 대국자(이창호, 목진석)의 사인을 얻은 바둑판을 한국기원이 선물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리가 한국기원에 넘겨준 바둑판이 워낙 고급이라, 아무리 유명기사의 사인을 얻는다 한들 한국기원이 다시 바둑판을 총리에게 선물한다는게 무척 쑥쓰러운 일이 되버렸다.


총리는 "내가 그렇게 좋은 고급 바둑판을 소유할 필요가 없겠다. 한국기원 같은데 있어야, 이창호, 조훈현 같은 진짜 고수들이 그 바둑판을 의미있게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아무튼 총리를 정치적으로 지지하거나 좋아했었던 일은 없었지만, '그날 총리가 권 6단을 보고 반색했던 것이나, 바둑판을 선물했던 얘기를 듣고 나니 총리가 그토록 오래 정계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런 것들에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총리가 선물한 그 바둑판은 한국기원이 지금도 보유중일 것이고, 가끔씩 고택이나 사찰등에서 열리는 특별대국에서 활용했던 것도 가끔 봤다. 물론 그때도 그랬지만 요즘에 와서 주요대국 거의 대부분이, 탁자에 2치판을 놓고 의자에 앉아서 두니까 활용도는 예전에 비해서도 약간 더 낮아졌다. 그러나 언제고 고풍스러운 곳에 대국장소가 결정된다면 그 바둑판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빛깔이 고운 최고급판이었다.


※총리공관에서의 바둑은 월간바둑 99년 2월호에 자세히 소개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