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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내가 나를 1급이라 부르자 1급이 되었다

풍월 사선암 2007. 9. 18. 08:06

 

[성석제]내가 나를 1급이라 부르자 1급이 되었다

 

내가 바둑을 처음 접한 때는 초등학교 1학년 쯤이다. 아홉살 위인 형이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와서는 동네의 형들과 어울려 종이에다 돌을 올려 놓는 이상한 놀이를 시작했다. 몇 차례 구경을 하는데 형이 두는 족족 이겼고 이긴 다음에는 상대에게 '너는 13급', 너는 15급'학 판정을 해주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형의 실력은 대략 9급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형은 내가 바둑을 가르쳐 달라하자 따먹는 것과 축을 가르쳐 주고는 곧장 대국을 강요했다. 형에게 스물다섯점을 깔고 첫판을 두게 되었다. 그 판에서 내 말들이 한마리도 남김없이 일제히, 장렬히 산화했음에도 형은 내게 18급이라고 말해주었고 나는 그로부터 한동안 18급이라고 으스대며 동네를 활개치고 다녔다. 18급이 있으면 19급도, 50급도, 2백만 급도 있는 줄 알았다.


바둑 덕분에 개구리잡고 멱감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나이가 대여섯 살 위인 형들과 자주 어울리게 됐고 그 덕분에 그들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미리 맛볼 수도 있게 되었으며 그들의 주 관심사인 여학생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역할도 자원해서 받아들이면서 장차 우체부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내 실력은 일취월장해서 무려 10급에 도달했다. 그 때는 동네에 적수가 없었고 읍내에서 길거리에서 바둑두는 사람들과 자웅을 겨루는 수준이었다. 아, 친구의 형 가운데 9급이 있어서 좋은 상대가 되어 주었다. 내 관심은 친구의 여동생에게 더 많이 가 있었지만.


중학교에 입학한 뒤, 어느 봄날 가족과 어울려 풍광이 좋은 절에 놀러 갔다. 그 절 마루에서 어느 스님과 고시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다람쥐 쫓고 가재잡고 물장구치는 일행과는 떨어져 내내 바둑을 구경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도까자루가 썩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청년이 내게 몇 급이나 두느냐고 묻고 있었다. 난 어깨를 펴고 9급이라고 말한 뒤, 그렇게 묻는 그대는 몇급인가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청년은 픽 웃더니 자신은 4급이라고 했다. 오오, 4급이라니, 그런 현묘한 급수도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는 흑을 쥐고 세 판인가 네 판인가 연속으로 무참히 박살나고 말았다. 백을 든 스님은 자신은 '무급'이라고 선문답처럼 말했다.


그 때부터다, 내가 무급을 향하여 매진하기 시작한 것은.


서울에 있는 외가에 가면 바둑책과 바둑 잡지가 서가 한 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때 월간 바둑의 연재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그 제목이 '방랑기객'이었던가. 방랑기객, 그도 무급이었다. 나는 스님의 이미지에 방랑하는 무사 같은 이미지를 겹쳐 이상적인 무급자의 모델을 완성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와서 처음으로 기원이란데를 드나들게 되었다. 동네의 큰 길가에 있던 기원이었는데 세상의 1급들은 모두 거기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는 나중에 프로기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첫 출입에서 나는 원장으로부터 8급으로 판정받았다. 그런데 나보다 한 학년 위이고 사람 깔보고 기죽이는 데 천재인 4급이 거기에 있을 줄이야. 그가 나에게 안겨준 다종 다양하고 복잡미묘하며 가지각색의 창의적인 수모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우체부 겸 무급자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일단 미루고 그 4급부터 타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때까지 나와 있는 한글로 된 바둑책은 모조리 독파하는 한편 수백 가지의 정석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 가운데 사카다의 속임수인가 뭔가 하는 게 있었는데 그게 그 4급이 나를 물먹일 때 써먹던 방법이 들어 있는 비급일 줄은 정말 몰랐다. 역시 공부는 하고 볼 일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4급은 내가 7급이 되자 3급이 되더니 내게 그 속임수를 써먹어 주지 않았다. 내가 6급이 되자 그는 2급이 됐으며 내가 5급이 되자 1급이 되었다. 내가 5급에서 요지 부동 급수를 올릴 수 없는 것은 그 1급이 자신에게 넉점으로 이기지 못하는 한 결코 4급으로 승급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를 넉점으로 박살을 내지 않는 한 절대4급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한창 바둑이 늘 나이에 죽으라고 바둑만 공부하는 5급이 단 한 번도 그 얄미운 1급을 이기지 못했다. 나중에야 1급에도 열여덟 단계의 급수만큼이나 다양한 실력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다 보니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듯 빠르게 중학교 시절이 끝났다.


내가 나를 1급이라 부르자 1급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키, 몸무게, 취미, 특기 가족사항 따위를 적어 제출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슬쩍 내 짝의 보고서를 훔쳐보니 그 역시 취미난에 바둑이라고 쓰는 게 아닌가. 그는 자신이 짭쪼름한 4급이라고 했다. 우리는 당장 모눈종이를 구해 연필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중반이 되기도 전에 수업종이 울렸고 매타작으로 명성이 자자한 국어 선생님이 몽둥이를 옆에 끼고 들어 오셨다.


우리는 대국장을 책상밑으로 옮겼고 선생님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중반 전투에 열중했다. 독수리처럼 날아와 사자처럼 우리의 범죄 대국 현장을 덮쳐 우리의 바둑판 겸 기보를 낚아챈 선생님은 "교직생활 15년에 너희처럼 눈치없고 대담한 놈들은 처음이다"라고 평하신 다음, 매타작 직전의 관례에 따라 약간의 심문을 하셨다.


"공부도 못하면서 가방과 머리만 큰 아해들이 있는데 본인은 너희에 대해서도 바둑도 못 두는 것들이 요란한 궁상을 떨고 있다고 판단한다. 딴 선생도 아닌 본인의 첫 시간에, 할 말이 있느뇨?"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이 1급이었다. 바둑, 펀치력, 당구, 도박, 주량 공히 학교에서 가장 셌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할 말은 하고 맞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못한다는 말씀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자존심을 가질 나이이며 바둑에도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네 실력이 얼마나 되길래 자긍심과 자존심, 두 '자'씨 형제의 이름을 들먹거리느냐?"


그 때 내입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3급입니다."


중학교 때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넉점으로 그를 이기지 못하면 4급은 될 수 없다 해도 3급,2급,1급, 심지어는 무급도 될 수 있지 않은가.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쳐들었던 매를 내리고 수업 후에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다. 그날부터 방과후에 거의 매일 숙직실로, 또는 기원으로 가는 사제간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선생님도 적수를 못 만나 한동안 무척 심심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 실력이 기원의 3급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꽃이라고 부르자 꽃이 되었다." 는 누군가의 시처럼 "내가 나를 3급이라고 부르자 3급이 되었다"의 이치였다.


그 이치를 깨닫자 마자 나는 재빨리 2급이라고 외쳤고 그에 따라 2급이 되었으며 한 달도 가기 전에 다시 1급이라고 주장해서 가볍게 1급이 되었다(그 때 9단! 했으면 9단이 되었을까?). 선생님과의 대국에서도 차츰 칫수가 내려갔다. 나는 두점으로 쉽게 이겼고 정선으로도 힘들이지 않고 이겼으며 호선으로도 지지 않았다. 원수 같은 1급을 이기기 위한 혹독한 훈련과 비분의 눈물이 내실력을 생각 이상으로 올려 주었던 것이다.


1급이 되자 무급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가 생각나긴 했지만 주변의 4급, 3급, 특히 5급에게서 내기 바둑으로 자장면 얻어먹는 데 재미를 들이는 바람에 당분간은 목표달성을 미룰 수 밖에 없었다. 대학 들어가서도 바둑과 자장면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고 대학 졸업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둑동네서 만난 관전필자들 - 문학과 바둑의 즐거운 만남


회사(동양그룹)에서 동양증권배 세계바둑대회를 후원하고 내가 그 일에 다소간 관여하게 되면서 바둑 동네에 가까이 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사진으로만 보던 프로기사도 만날 수 있었고 바둑계의 동정에 대해 조금 알게도 외었다. 인사동의 해봉빌딩에서 일간지에 관전기를 쓰고 있던 노승일, 이인환, 이광구 제씨가 사무실을 열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갑을 꺼낼 때마다 내 바둑 스타일을 '깡패바둑', '돌바둑', '멧돼지바둑(猪棋)'이라고 논평하곤 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나는 바둑은 약하지만 승부에는 강하답니다. 아이고 미안해요"가 내 대답이다. 물론 내가 질 때도 있다. 그때는 무슨 수가 있더라도 내 지갑에서 빠져나온 콧물 묻은 돈 이상으로 술과 밥을 얻어먹는다는게 나의 전략이다. 실제로 내가 잃은 것보다는 먹고 마신게 훨씬 많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쏟아 졌던 수많은 어록은 바둑과 문학이 만나는 자리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지금도 나를 미소짓게 한다. 예컨대 '꽥','에고고고고','어머 저건 뭐야', '아, 나는 왜 진작에 프로가 되지 않았더란 말이더란 말인가', '으악, 이런 경천동지할 악수가', '지금 던지면 큰 바둑이야'등등. 언젠가 나보다 바둑이 훨씬 센이를 만났는데 그이의 입담도 프로급이라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대국이 끝나고 "상수가 되어 가지고 그래, 본을 보여주지는 못할 망정 경망스럽게 그게 뭡니까." 하고 항의를 해�니 그 이의 대답인즉, "상수가 바둑만 잘 둬서 상수인가?"


그래서 그 이의 입담을 격파하는 바둑을 연구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음풍기(吟風棋)'다. 상대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바둑을 두면서 같은 노래, 같은 구절을 계속 반복한다. '장부의 길 일러주신' 한다음 딱 두고, 또 '장부의 길 일러주신'하고 딱 두고...... 참다 못한 상대가 '어머님의 목소리' 하고 말려들면 성공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를 다시 반복하며서 상대의 입을 본격적으로 틀어막는 것이다. 말이 난 김에 또 다른 스타일의 바둑에 대해서도 말해보겠다.


'비두발한기(鼻頭發汗棋)'. 내가 아는 이 중에 지독한 포커페이스가 있는데 바둑이 불리해지면 코 끝으로 땀을 살짝 내뿜는 이가 있어 이렇게 이름붙였다.


'프로야구기'. 주로 토요일 오후에 바둑을 두는 사람으로 바둑을 두며 동시에 TV로 야구 중계를 보지 않으면 수가 안 보인다는 이를 일컫는다. 바둑을 처음 배울때 프로 야구가 출범해서 그렇게 되었다나.


'와기(臥棋)'. 누워서 두는 건방진 형이다.

와기를 격파하는 비술은 '면기(眠棋)'. 상대가 누워서 장고하면 아예 자버린다. 바둑은 이런 저런 모습, 전술, 방법에 대해 모두 악의없는 아마추어의 전술이라는 전제아래 앞으로도 계속 작명을 해보고 싶다.


네게 바둑과 글(문학)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역사가 몇천년 이상 되었다는 것, 깊고 아름답고 넓어 평생을 헤엄쳐도 끝을 볼 수 없다는 것,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한 판 한 판, 작품 하나 하나가 수의 높낮음이나 질에 무관하게 모두 개성적이고 다르다는 것,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게 있는데 최근까지만 해도 내가 바둑이나 글로 먹고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둑에서 아마추어 애호자이듯, 글에 대해서도 아마추어 애호자였다. 바둑에 대해서는 언제까지나 아마추어 애호자로 남을 것이지만(물론 실력이 조훈현, 조치훈, 유창혁, 이창호에 비해 조금 모자라니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것도 한판의 바둑이겠지 생각하긴 하지만.


지금은 바둑을 좋아하고 즐길 따름이다. 언젠가는 무급이 될 것이라는 가느다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성석제

▶1997년 월간바둑 12월호 '나는 이렇게 1급이 되었다.'시리즈中 소설가 성석제 편 '무급을

향하여'

▶성석제 소설가 (1960년 경북 상주 生)

- 86년 문학사상 통해 등단,

- 시집 : '낯선 길에 묻다', '검은 암소의 천국'

- 단편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재미나는 인생','새가 되었네',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아빠'

- 장편소설 : 왕을 찾아서, 궁전의 새, 순정

- 2002년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발표」동인문학상 수상

- 2003년 신작소설 〈인간의 힘〉(문학과지성사)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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