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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바둑 이야기

풍월 사선암 2007. 7. 25. 06:43

흉내바둑 이야기 - 자료출처/월간 바둑 19853월호 

옛날 중국에서는 첫수를 천원(天元)에 두고 상대방이 두는 대로 대각선방향에서 흉내 내어 두면 무조건 이긴다는 설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일본에서는 흑이 첫 점을 천원에 두고 흉내 내는 바둑을 태합기(太閤碁)라고 했다. 태합기(太閤碁)란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이 바둑을 좋아했는데 그는 자기보다 고수와 대국 할 때면 항상 첫 점을 천원에 두어놓고 상대방 하는 대로 흉내 내기를 좋아했다는 전설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덤이 없는 승단대회 대국에서는 이따금씩 그런 바둑이 두어졌었다. 그러나 호선, 5집반의 덤이 있는 현대의 바둑에서는 흑이 흉내바둑을 두지 못하고 백쪽에서 오히려 흉내작전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흑이 백의 흉내를 중단시키는 방법은 천원에 두는 길 뿐인데 천원의 가치가 5집반의 덤을 과연 부담할 수 있느냐가 의문이고 또 바둑이란 어느 시기에 가서는 힘과 힘의 싸움이 되기 때문에 완력이 강하고 끝내기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엇비슷한 포석이 되는 흉내작전이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프로기사들의 공식에서 흉내바둑이 나타난 것은 1929년 여름철에 두어진 오청원3단과 목곡실4단의 대국이 처음이라고 전해온다. 그 당시 14의 중국의 천재소년기사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본에 바둑유학을 와서 단번에 3단을 인허 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승단시합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시사신보 주최로 일본 신예 기사들과 출세기7국을 두었는데 6국까지는 전승을 거둔 뒤 마지막 7국에서 어려운 상대인 목곡4단을 만나 흑으로 첫수를 천원에 두었다. 그리고는 백이 하는 대로 따라두는 흉내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1]

[1]가 바로 그 유명한 기보이다. 3단은 무려63 수까지 따라 두다가 65수만에 흉내를 중단했다. 그 바둑에서 목곡4단은 대국도중 몇 번이나 복도로 뛰어나와서 시사 신보 사회부기자였던 삼곡수평을 붙잡고 저런 식으로 바둑을 두면 신문사측도 곤란한 일이니 어떻게 조처를 취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얘기가 유명하다. 먼 훗날 오청원9단은 그때 그 바둑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바둑을 두기 전에 좀 체로 작전 같은 것을 세운 적이 없었는데 그 바둑에서는 전날부터 뚜렷한 계획을 세우고 대국에 임했다. 나의 바둑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첫수를 천원에 두고 목곡씨가 두는 대로 흉내를 내어갔다. 나의 작전은 다른 게 아니라 흉내를 계속내면 상대는 일찌감치 중앙에서 싸움을 걸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기회를 잡아 승부를 결정짓자는 것이었다. 목곡씨는 당황했는지 시간을 마냥 쓰며 생각하고 있었으나 나는 처음부터 흉내를 낼 작전이었기 때문에 거의 노타임으로 두었다.

 

63수만에 흉내를 중단했으나 나의 작전은 그때까지 성공을 거둬서 형세는 확실히 내가 유리했었다. 그것이 끝판에 해이되면서 끝내기에서 손해를 보아 3집을 지고 말았다. 그 바둑은 내가 지기는 했지만 퍽 좋은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바둑에 [] 제도가 생기면서부터 흑번 흉내바둑은 자취를 감추고 백번 흉내바둑이 두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원로기사 藤澤朋齊9단은 흉내바둑의 대명사로 불리 울 정도. 그는 백을 들면 거의 매번 흉내바둑을 둔다. 지금도 그러하다.

 

[2]

[2]1965년 일본 명인전 도전자 결정국 藤澤朋齊-임해봉 대국에서 나타난 흉내바둑이다. 藤澤9단은 이같이 대승부에서도 흉내작전을 거침없이 구사하여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바둑계에 이상한 파문을 던져 놓았다. 대다수 기사들은 藤澤朋齊9단의 흉내바둑을 맹렬히 비난했으나 일각에서는 오히려 용감한 시도라고 두둔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흉내바둑의 타당성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바둑판 위에서의 착수는 본질적으로 자유이다. 그러므로 흉내바둑이라고 해서 이것을 기피하거나 도덕적인 비난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3]를 보자. 흑의 입장에서 백이 흉내를 내지 못하도록 저지시키는 방법이다. 1밖으로 붙이는 정석을 선택한 뒤 흑9로 젖혀 올려서 축으로 유도해 나간다. 그러면 이하 41까지의 진행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이 망해 버린다. 따라서 흑9에서부터 백은 따라 둘 수가 없기 때문에 흉내를 중지할 수밖에 없다.

 

[4]

[4] 를 보자. 1,3 소목을 두고 나서 밑 붙임 정석으로 이끌고 나간다. 15, 23 호구 친 뒤 흑25,29 들여다보아 축과 관계되는 모양을 만들어 놓고 흑33 천원에 두면 흑은 ab의 곳을 마음 놓고 끊을 수 있으나 백은 c, d 어느 곳도 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흑33 천원에 둔 점이 네 군데 축머리를 보는 一石四鳥의 묘수가 되는 것이다.

 

[5]

[5]坂田榮男9藤澤朋齊9() 대국에서 두어진 흉내바둑의 기보. 43 천원에 둔점이 너무나 좋은 수가 되어 흑이 불계승을 거두었다. 흉내를 저지시키는 방법은 한마디로 천원의 가치를 최대한 이용하는 길 뿐이다. 1981년 제15기왕위전 도전기에서 도전자 서봉수8단이 조훈현 왕위에게 백번에서 두 번 흉내바둑을 두어 두 번 모두 이기고 타이틀을 쟁취해서 흉내바둑이 국내 기가의 화제가 되었었다. 그 직후 강훈5단은 서8단과 대국에서 백으로 두 번 흉내바둑을 두었는데 결과는 11패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