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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화 여사와 林王來弟

풍월 사선암 2007. 7. 23. 11:25

정미화 여사와 林王來弟

 

성공한 남자 뒤에는 항상 좋은 여자가 있기 마련이다. 바둑계에도 조훈현 9단과 린하이펑(林海峰) 9단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만약 정미화 여사의 무한한 희생이 없다면 오늘의 조훈현이 없었을 것이며, 이창호같이 세계바둑을 호령하는 인재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林王來弟가 33년을 하루와 같이 보살펴 주지 않았더라면 린하이펑은 아마도 오늘날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며, 일본바둑계에 장쉬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부인들의 지지가 오늘날의 조훈현과 린하이펑을 초일류 승부사로 만들었다.

최근에 조훈현, 린하이펑 일가는 중국 윈난성(云南省) 따리(大理)에 자리잡은 창산(蒼山) 대협곡에서 ‘2004년 따리창산바둑 문화제'에 참석하였다.


그 동안 기자가 취재한 두 부인의 이야기를 옮긴다.

두 부인은 성격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일 처리 방식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예컨대 실제연령보다 많이 젊어 보인다거나, 비록 모두 가정주부이지만 견식이 남자들보다 못지않은 점등 등이다. 중국의 가정주부들과는 많이 달랐는데 두 부인의 얼굴에서 세월의 노련함과 피곤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말이 나오자 영원히 변함없을 부드러움이 두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정미화 여사, 활발하고 호기심 많다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는 40세를 넘었지만 35세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 나이에 비해 피부, 몸매뿐만 아니라 마음이 더욱 젊었다. 그는 딸과 아들을 거느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편 조훈현 주위를 맴돌았는데, 활력으로 충만된 가정에 정미화 여사의 공로가 얼마나 컸겠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정미화 여사는 자신이 모르는 모든 일에 흥미를 가지며 항상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찾아내고야 마는 성격이다. 민족문화음식점에서 밥을 먹을 때 정미화 여사는 모든 음식에 호기심을 가졌으며 음식마다 맛을 보았다. 그러나 많이 먹진 않았는데 "어느 것은 한국 음식과 비슷하고, 대략 어떻게 조리한다" 등에 대해 말했다.


대국장에 정찰원 파견

승부사의 부인으로서 정미화 여사는 대국 결과에 항상 관심을 기울인다. 매번 조훈현 9단이 바둑을 두고 돌아올 때면 다급히 결과를 물어보는데 한번은 조훈현이 졌다고 알려 주었다. 이튿날 정미화 여사는 뉴스를 보고 사실은 이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훈현 9단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뉴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게 된 정미화 여사는 중요한 대회가 있을 때면 대국장에 정찰원을 파견했다. 바로 차민수 4단.


조훈현 9단은 항상 부인과 농담하길 즐긴다. 한번은 부인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에 가서 대회에 참가했다. 쉬는 날 정미화 여사가 거리구경을 하자고 했고 이에 조훈현은 상해 출신 기사인 장주주·루이나이웨이 부부를 불러 같이 가자고 했다. 네 사람은 호텔 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며 호텔문을 나서자 조훈현이 장주주 부부에게 "부인을 두 사람에게 맡기니 천천히 잘 구경하기 바란다. 안녕히!" 라고 말하며 자신은 카드게임을 하러 갔다.


가정부는 안 둬

한국 관습에 따라 보통 부모는 큰아들과 함께 지낸다. 조훈현 9단은 비록 큰아들은 아니지만 효심이 깊고 경제조건도 좋은지라 꼭 부모를 모시려 했다. 게다가 세 아이가 태어난 뒤부터는 긴 기간 동안 무려 7~8명의 가족을 돌봐 왔으며 그 중에는 제자 이창호 9단도 포함된다. 하지만 가정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정미화 여사는 가정부를 두려 하지 않으며 스스로 일을 처리했다.


이번 창사 여행에서 자녀들은 무슨 물건이 떨어지기만 하면 어머니 가방을 찾았고, 정미화 여사는 연신 과일을 벗기고 깎으며 주변 사람들을 돌봤다.


린하이펑과 조훈현의 대국을 지켜볼 때 정미화 여사는 인삼과를 깎아 기자에게 넘겨주며 자신이 맛보았는데 아주 맛있다고 했다. 기자가 인삼과를 다 먹자 정미화 여사는 또 바나나를 넘겨주며 이처럼 빨간 껍질의 바나나는 한국에서 볼 수 없다며 맛보라고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돌보자면 힘들지 않는가는 물음에 정미화 여사는 "방법이 없다.

만약 내가 밥을 하지 않으면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배를 곯을 것이다. 조훈현 9단은 시간도 없지만 기타 한국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면 아마 라면을 끓이는 정도일 것이다."고 말했다.


동시에 "우리는 일찍 결혼한 전통적인 가정에 속한다. 남자는 바깥일을 책임지고 여자는 집안일을 책임지는 한국 전통 관념에 따라 그는 밖에서 일을 하고 가정일은 내가 도맡아 한다. 이는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다."고 말했다.


林王來弟, 33년 동안 얼굴 한번 붉혀본 적 없다.

활발한 정미화 여사에 비해 나이가 많은 林王來弟는 아주 조용한 스타일이었다.결혼 33년 동안 혼인 생활이 지겹게 느껴진 적이 없는가? 라는 물음에 林王來弟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떻게 그럴 수가? 지금부터 우리는 아직도 10~20년을 더 같이 살 것이고 현재까진 싫증을 느껴 본적이 없었다."고 답했다.


두 사람은 싸워 본적이 없는데 린하이펑 9단의 성격이 너무 좋다고 했다. "사실 프로기사는 아주 혹독한 직업이다. 그러나 린하이펑은 자신의 정서를 잘 조절하며 가족에게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린하이펑의 딸 린팡메이(林芳美)는 지금까지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며 얼굴 붉히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고 했다.


부친은 바둑에서 진 뒤 혼자 묵묵히 바둑을 복기하고 패배의 원인을 찾을 뿐 가족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린하이펑 9단은 세 아이가 모두 바둑을 둘 것을 바라지만 절대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린하이펑 9단의 제자 장쉬 9단도 林王來弟이 각별히 보살펴 주는 대상이다. 린하이펑과 부인의 서로 존중하는 모습과 화목한 분위기는 세 자녀와 장쉬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


처음엔 말썽 부리기 좋아하던 장쉬가 린선생의 가정에서 일년을 지내자 어느새 철이 들었고 예의바른 영특한 소년으로 자랐던 것이다.


"장쉬는 음식을 너무 적게 먹어 바둑을 둘 때 체력이 따라가지 못 할까봐 걱정이다."며 林王來弟는 이미 가정을 이룬 장쉬를 걱정하였다. 장쉬와 린팡메이(林芳美)는 함께 자랐는데 그들은 사이가 좋았다. "장쉬가 우리 집에 있은 후로 우리는 자식이 한명 더 생긴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린하이펑 9단은 집에 바둑연구회를 열었고 2주일에 한번씩 기사들이 그의 집에 모인다. 때로는 20여명에 달하기도 하며 그때마다 매번 음식은 모두 林王來弟 혼자서 한다. 린하이펑 9단은 다만 차와 물 등만 챙길 뿐 모든 손님접대는 부인 혼자서 도맡는다.


바둑을 배우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

바둑 인사들의 가족은 대부분 바둑을 둘 줄 아는데, 林王來弟는 자신의 가장 큰 유감이 바둑을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수십 번이나 바둑을 배우려고 아이들과 두려 했지만 매번 바둑을 두면 전화가 울리거나 손님이오는 바람에 한번도 제대로 두지 못했다. 나중에 아이들은 누구도 나와 두려 하지 않았으며 며칠이 지나자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실력 차이가 점점 커짐에 따라 더욱더 나와 두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林王來弟도 거의 60세에 이르는 사람이지만 피부가 좋아 실제 나이보다 많이 젊어 보였다. 자신의 마음 관리에 대해 그녀는 "집에 항상 손님이 오기 때문에 정보와 소식이 끊기지 않는다.


이것이 내 정신을 젊게 유지하는 비결이다. 생활이 힘겨울지라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화와 우려는 사람을 가장 쉽게 늙게 한다."고 말했다.


http://weiqi.tom.com 2004-10-06 北京靑年報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