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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청원, 불멸의 棋聖 그러나 불운의 無冠이여

풍월 사선암 2007. 7. 23. 11:18

오청원, 불멸의 棋聖 그러나 불운의 無冠이여

[바둑 최고수 列傳] 현대 바둑의 창시자인 ‘기성’ 오청원 선생을 기억함

                                                                                                                             

吳淸源(오청원, 우칭웬) 선생은 현대바둑을 태동, 체계화시킨 지대한 바둑고수였다.


현재의 타이틀전보다 더 치열하고 비장한 승부의 그늘인  '치수고치기 10번기'의 제왕, 당대 일인자, 기라성과 같은 초일류 棋士의 치수를 모두 한단계 이상 낮춘 절대 고수( 치수고치기는  최고의 무사(劍客)가 목숨보다 중요시여겼던 그 명예를 위하여 일대일 혈전을 벌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비장한 자존심 대결인 것이다)라는 수식어를 항상 동반하고 있었지만, 선생의 이력엔 내놓을 만한 공식타이틀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 바둑의 전설이자 신화인 기성우칭위안의 일대기를

 그린 중국영화 

또 선생은 시대적 아픔에, 이후 비토 받아야 했던 뼈저린 민족반역자의 돌팔매 속으로 온전히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중공은 선생의 입국을 거부시켰고 이후 선생에 대한 재평가와 잉창치(응창기)씨와 섭위평 9단 등의 인물의 등장과 이후로 발전, 풍부해지는 중공의 바둑계는 오늘날 중국인민들의 '바둑' 광풍과 함께 棋聖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끝내 이룩하지 못한 바둑의 一家는, 선생의 민족적 바둑 己體를 계승한 린하이펑 9단에게로 이어져 일종의 현신으로 녹아든다.

 

지금으로부터 15여년전까지는, 일본은 바둑문화가 만발한 현실적인 바둑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바둑의 최강국이었다. 일본의 이같은 바둑의 발전은  '吳淸源'이라는 걸출한 고수의 등장으로 인하여 질적 성장을 밑바탕하기 때문인 점을 떼어 놓고서는 설명할 길이 막연하다.


선생은 1939년부터 제1기 명인전(1962년)이 등장하기까지의 25년여 동안 당시 최고단자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다카카와 가쿠(高川格), 후지사와 호사이(藤澤朋齋), 사카타 에이오(坂田榮男) 등을 치수고치기 십번기에서 연파하여 일본 바둑계의 제1인자가 되었다. 당시엔 뚜렷한 타이틀전이 없었을 뿐 아니라 과거 세습으로 이어지고 집안간 실력다툼으로 기계가 이어져 오던 관행과 현대적 프로바둑문화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과정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하며 현대바둑의 질을 상승, 태생시킨 장본인으로써 '오청원'선생은 더없이 가치가 높을 것이겠고 그 과정 과정에서 일본의부단한 민족적 차별을 딛고 실력으로 바둑의 역사를 드높인 선생의 거룩함은 더 없이 드높다.

 

선생은, 그 이전과 세습에서 현대로 이행되는 과도기의 九段(入神의 경지)은 당대 제 1인자에게만 주어진, 오직 당대 최고수 한 기사에게만 주어진 최고단의 영예였는데, 일본의 자국을 위한 배타적 문화는 후지사와 호사이에게 최고단인 九段의 영예를 부여하여 이후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호사이 9단을 두치수 아래, 즉 호선에서 선상선(先相先, 바둑에서 먼저두는 쪽이 훨씬 유리하므로 상대에게 먼저 두도록 하는 것은 곧 자신의 실력이 상대보다 높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치수가 낮춰진다는 것은 바둑을 둬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를, 목숨보다 중할 불명예와 수치 그리고 치욕을 동반한다. 호선은 두 대국자가 동등하게 돌을 가려 선후를 정하는 것이고 선상선은 3판의 대결일 때 하수가 먼저 흑을 쥐며 상수 흑, 하수 흑의 치수로서 하수가 유리하며 일종의 접바둑이다.

 

프로기사가 프로를 상대로 접힘을 당하고 바둑을 둔다는 것은 대단히 자존심 상할 일이다. 정선은 하수가 매판 흑을 쥐고 두는 것을 말하며 이후로 두점, 석점..접바둑으로 칭해진다)으로 또 정선으로 내려놓으므로써 실력으로 명실상부하게 제일인자를 확실하게 증명하였다.


▲오청원은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멸시속에서도 일본

최고수들을 10번기라는 승부형식으로 무릎꿇려

전 중국인의 희망으로 떠오르게 됐다. 

이는 오청원 8단이 호사이 9단을 하수로서 대하여 대국을 벌인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대단히 센세이션할 일대 사건임에도 전일본 바둑인구는 이미 오청원 선생의 최고실력을 의심치 않았으며, 잘못된 단급인정의 문제에 관해 민족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였던 바였으므로 바둑팬들을 흥분으로 몰아세울 파란은 아니었다.


또 일본의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차별은 '名人(일본은 당대 최고수에게 최고단인 9단의단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바둑의 명인으로 별칭하는 문화를 가졌다.)'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런 차별에도 불구하고 오선생은 오직 실력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확인받았으며 최고의 흥행카드로 일본내 인기는 그치지 않았다.

 

선생이, 당대의 고수들을 차례로 치수를 고치며 제일인자로 명실상부하게 입지를 확고히 하자 일본바둑계와 요미우리신문은 더이상 대적할 흥행카드가 없음으로서 '치수고치기 10번기'를 제쳐두고 새로운 타이틀전, 명인전을 만드는데, 당대 최강자는 곧 '명인'이라는 바둑문화를 가진 일본이 새로운 통합타이틀로써의 명인전을 신설하는 자체가 아이러니하고 당대 제일인자에 대한 무시와 결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오청원 선생은 새로운 제도에 뛰어들어 당당히 승승장구했다.


그렇지만 제 1기 명인전 리그전 도중, 선생은 대단히 의문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같은 여파로 ‘괴물’이라 불린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8단 9승 1패, 사카타 에이오 9단 8승2패 그리고 오 선생도 사카타와 동률로 마지막 대국이 전일본 프로 기전 '명인전' 타이틀 홀드의 명암을 운명짓게 할 순간, 슈코 선생은 다른(이름을 모르겠음)기사와 대국하여 마지막 판을 일찍 패하게 됐고 오선생과 사카타 선생은 치열한 대국을 전일 오전부터 시작해서 익일 새벽녘까지 사투를 벌여 반면 빅, 당시엔 덤의 개념이 없었고 오직 돌가림으로 흑백간 유불리를 완충시켰는데 반면 빅은 그 승부를 정해야 하는 경우라면 백을 쥔 기사가 승리한 것으로 일본기원은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슈코 9단과 오선생은 동률 9승2패가 되었다. 그렇지만 기상천외한 일본기원의 대국규칙은 빅으로 승리한 1승은 온전한 1승보다 못하다고 유권해석을 내려 사실상 동률재대국은 물건너 가게되고 동시에 슈코9단이 영예의 '초대 "바둑명인"'에 등극하고 만다.

 

이후 선생은 뇌 손상을 입고 천식, 발작 등의 증상을 보임으로써 급격히 실력이 줄어든다. 선생은 결국 현대적 개념의 타이틀을 갖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역사적 사실말고도 선생의 棋譜를 뒤쫓다보면 선생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마, 치열하고 처절한 행마, 현대적 개념의 끝내기 발상 등은 조치훈, 사카타, 조훈현 등 특유한 치열함, 날렵함, 천재적 발상을 온전히 전율하며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선생의 기보는 선생의 제자 린하이펑의 기풍과 이창호와 같은 정중동의 두텁고도 인고하는 행마를 또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바둑의 발상이 선생의 기보에 산재해 있으며, 오늘날 정의된 수많은 정석들이 선생의 손길에서 비롯된 사실들을 선생과 사카타 등의 당대 최고수의 회고록을 쫓으며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이 선생의 기보에서도 선생의 초고수적 자유로움을 온전히 느끼게 되고 선생의 위대함을 전율하며 또한 느낄 수 있다.


2007/07/04 [11:35] ⓒ대자보 / 情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