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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주몽 바로 보기 - 잃어버린 한민족의 고리, 부여

풍월 사선암 2006. 5. 31. 09:25

드라마 주몽 바로보기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부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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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모수 역할의 허준호

주몽의 아버지로 나오나 실제 해모수는 북부여를 건국한 분이다.

 

2주 전부터 MBC에서 드라마 '주몽'이 방영되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인 사실과 약간 다른 설정과 상상적인 구성으로 많은 불평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드라마 주몽 바로보기'라는 제목 아래 정리를 해보기로 한다.


'주몽'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다. 드라마 주몽의 시나리오를 짤 때 한민족 고대사에 대한 이야기가 적기 때문에 상상적으로 구성한 부분이 많았다고 하였다. 막상 드라마를 좀 보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구려를 창건하신 주몽이란 인물은 불과 대여섯살 먹어서 스스로 활을 만들어 쏘고, 인물이 출중해서 붙인 이름이 다름 아닌 '주몽'아닌가? 고주몽이 어린 시절 동부여에 있을 때, 활을 잘 쏴서 ‘선사자위주몽(善射者謂朱蒙)’이라는 말이 생겼다. 활을 잘 쏘는 자를 주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나이 20이 되도록 활을 고사하고 칼한번 들어보지 못한 겁쟁이로 나온다. 재미있게 하기 위한 '현대적 구성'이라 해도, 그것이 후에 어린이들의 정신에까지 박힐 수 있음을 생각하면, 후세에는 '역사왜곡'이란 아름답지 못한 이름으로 되돌아 올 수도 있는 것이다. 

 

▲ 드라마 주몽의 주인공 주몽 역의 송일국씨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

 

사소한 것을 짚으면 많겠지만, 이 글에서는 보다 굵직한 잘못된 역사맥 전체 틀을 짚고 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첫째로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드라마에서 그렇게 유치하게 고주몽이란 인물을드러내는 데는,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나온다. 우리 역사의 폐단은 지나치게 정치사, 전쟁사로 역사를 몰아가는 것이다. 물론 나라의 강역이나 흥망사가 역사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가 하는 것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학문 풍토는 옛사람들의 정신의 맥을 밝혀서 그것을 오늘날 되새겨보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야비한 다툼만을 부각시켜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간에 TV 역사극의 주된 소재로서 권력을 둘러싼 암투같은 것은 오랜 방송계의 습성이라 그런가보다 했지만, 삼국시대 이전 시대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그리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대의 인물들도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잘못된 발상이다. 역사에는 이런 말이 전해 온다. '금불여고(今不呂古)', 즉 옛날에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또 흔히 사가들이 말하기를, 역사의 흐름은 '황제웅패이적금수(皇帝雄覇夷狄禽獸)'의 순으로 점차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금수 세상에 다 떨어졌다. 더 갈 데가 없다. 반면에 고주몽의 시대는 황제의 시대에서 웅패의 시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고주몽 성제는 그 무렵 천명을 받고 세상에 나타난 인물이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가 있지 않는가? 주몽이 영특하고 대범하고 영웅적인 기개가 있으니까, 동부여국 왕자들이 주몽에게 왕위를 뺏길까봐서 주몽을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부여를 떠나라고 한다. 주몽이 도망을 가는데 엄리대수(淹利大水), 즉 지금의 송화강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야 되는데, 뒤에서는 동부여 군사가 주몽을 잡아 죽이려고 막 쫓아온다. 그 때 주몽이 수신(水神)에게 말하기를, “아시 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 이렇게 외쳤다. 이 말은 “나는 천제 즉, 상제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자다.” 이런 뜻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상제 문화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몽이 그렇게 하늘과 땅을 아울러 그렇게 부를 수 있었던 것은 하늘과 땅에 대한 지극한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몽이 불과 대여섯살에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는 것은, 그가 천지와 하나된 일심세계에서 사는 인물이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호태왕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도 우리 고주몽 태조께서는 "천제지자(天帝之子)"요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자랑스럽게 쓸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말은,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싸움, 전쟁이라는 것은 단순히 왕의 욕심에 따라 세력을 넓히기 위한 싸움이었다기 보다는 재세이화(在世理化)하라는 하느님의 천명에 따라 대광명의 도를 세상에 펴서 홍익인간(弘益人間)하기 위한 길이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중국인들의 역사 인식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같은 한민족의 나라에서도 시대가 흘러 도정(道政)이 문을 내린 뒤에는 다른 문제이다.

 

▲ (동)부여의 금와왕 역할의 전광렬 

▲ 금와왕의 아들, 대소 역할의 김승수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 부여사

 

그러면 구체적으로 드라마 주몽의 역사적 사실의 옳고 그름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첫째로 부여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등장인물간의 인척관계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정확히 말해서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드님인 고진의 손자, 불리지(일명 고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유화부인의 남편을 해모수라 하는데, 유화부인을 시증조할아버님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만들었다. 유화부인이 실제 살아계시다면 참으로 면목없을 것이다.


둘째, 드라마에서 주몽이 태어난 나라를 부여라고 한다. 여기서 부여에도 북부여, 동부여, 대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 부여의 흥망사에서 수많은 부여가 있다는 사실이 간과된 채, 부여 하나로만 인식하고 때문에 역사가 매우 왜곡되어 있다. 주몽이 태어난 나라는 동부여이다. 그러나 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 단군의 황손이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했던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을까? 그것은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왜곡으로 인한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다 언급하기 힘들지만, 중국은 한무제 때 사기(史紀)를 쓴 사마천 이후로 동방의 스승의 나라, 조선(朝鮮, 고조선)을 역사에서 지우기 위해서 역사에서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조선은 세상에서 아는 것과 달리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조선'이란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단지 제후국의 이름만 거론하면 조선은 역사 속에서 오리무중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후세의 김부식과 같은 우리의 역사가들은 중국인들이 써준 역사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탓으로 우리의 역사의 뿌리, 조선사는 실체는 없는 신화로만 남게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조선사를 역사 속에서 지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여사를 역사에서 지우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 계승은 부여를 거쳐서 열국시대와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남북국시대(대진국신라)로 해서 부여, 조선에 이르게 되는데, 부여를 역사 속에서 지우면 뒤에 난 국가들은 고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의 미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간파하였다.

 

부여는 어떠한 나라인가?


그러면 도대체 부여란 나라의 정체는 무엇인가? 부여의 원뿌리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47분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이에 대해서 토를 달 분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모두 대꾸해주기 힘드므로 그냥 본론을 이야기 하기로 하자.) 44대 단군은 구물단군이다. 이 분은 본래 43대 단군 때 상장군이었다.


2096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조선도 후반기에 와서는, 광명이세(光明以世) 하는 초대 단군왕검의 법이 많이 무너졌다. 급기야는 사냥꾼의 두목 우화충이란 사람이 나타나서 사냥꾼들을 모아놓고는 대뜸 반역을 저질렀다. 이 때 단군께서 피신 중에 돌아가시고 나라가 하도 혼란해지니, 5가에서는 상장군 구물(丘勿)이 인물이 성스럽고 공이 많아서 단군으로 추대하였다. 구물 단군께서는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開原, 단군 44대~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을 바꾸기에 이른다. 그래서 조선의 국통은 보전하되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 하였다.(부여는 알다시피 초대 단군의 네째 아드님의 이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사적인 맥락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요컨대 부여는 본래 고조선과 같은 나라인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고조선의 종통은 다름 아닌 부여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지금의 일제식민사학을 계승한 국사교과서에서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맥을 끊어놓고, 수많은 열국들 사이의 종통맥에 대한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부여도 점점 혼란스러워지자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께서는 50여년에 걸친 치세 끝에도 혼란을 걷잡기 힘들자, 5가에 나라를 맡기고 은거를 하시게 된다.(BCE 238) 이로써 삼한관경체제는 막을 내리고, 오가(五加)에 의한 과도기의 공화정이 실시되었다. 이 무렵 종실(宗室)인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6년간 계속된 공화정을 철폐하고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나라이름을 ‘북부여(北夫餘)’라 하였다.(BC 232) 이로써 대부여의 종통은 북부여로 이어졌다. 해모수는 국가 체제를 그대로 보전하고 나라 이름만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해모수도 '단군'으로 호칭했으므로, 우리는 해모수 단군이라 불러야 한다. 시조단군 해모수가 ‘북부여’라고 나라이름을 정한 데에는 ‘대부여’ 곧 단군의 고조선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북부여의 종통은 어디로 갔는가? 고구려로 갔다.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의 3대손인 고주몽은 “나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我是北夫餘天帝之子)”(광개토대왕비문)하여 강한 북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의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은 정신적인 정통맥일 뿐만 아니라 혈통줄이 동일한 선영과 후손으로서의 직계조상의 혈맥을 타고 발전해 온 것이다.


셋째로, 드라마 주몽에서 보이는 부여는 엄밀히 말해서 동부여이다. 해부루가 다스리는 동부여는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 중국의 전한(前漢)과 국명을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에 위치하고 있었다. 드라마가 상정하는 그 자리에는 사실 북부여가 있었다.

 

▲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한사군의 위치

▲ 환단고기에 나오는 한사군의 위치 

 

▲ 드라마 주몽 첫회 초반부에 나온 한사군 위치

아쉽게도 식민사학이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와 일치한다.

 

전한의 침입을 격퇴한 고두막한

 

넷째, 고주몽 성제와 결혼한 소서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은 북부여의 계통을 잇게 되는데, 그는 북부여의 6대 단군인 고무서 (高無胥)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하게 된다. 고무서 임금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둘째 딸을 고주몽에게 시집보냈다. BC 58년, 임금이 죽자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알다시피 소서노는 또한 백제의 시조 온조와 그의 형 비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나오다시피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국통맥을 치졸하게 끊어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타발(延佗渤)은 고구려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다섯째, 드라마에서 볼 때 전한이 매우 강성하여 부여 국내에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북부여 초대 해모수 단군이 돌아가실 무렵, 조선의 분국인 번조선은 연나라 추장 위만에 나라를 빼앗겼다. 위만 정권은 불과 3대를 나라를 보전하다가, 손자 우거왕에 와서는 한나라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바다로 도망하였다. 이 때 서압록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가는 곳마다 이겨서 민심을 크게 얻게 된다. 고두막한은 고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열가의 후손이라 한다. 이후 고두막한은 북부여 4대 단군(고우루)을 이어 단군이 되어, 북부여 제2기를 열게 된다. 그는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여 흔히 말하는 ‘동명왕’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동명성왕은 고주몽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도 아니다. 고두막한인 것이다. 이 분이 북부여 5대 단군이 되었으며 고주몽의 장인어른이 된 6대 단군 고무서 단군의 부친이 되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소서노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물론 주몽이 동명부여를 계승하였으므로, 주몽을 동명왕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고두막한의 태양같은 의기와 충의에 힘입어 사실상 한나라는 조선의 고토에서 힘을 별로 발휘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가 번한의 땅에 한사군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고두막한을 필두로 한 민중의 뜨거운 독립운동에 불과 몇십년 만에 실패했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는 이 한반도 내 한사군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민족사의 맥은 정신사에서...

 

이 정도면 중요한 이야기는 다 한 셈이다. 이 내용은 주로 한민족의 정통도가사서를 묶어 편집한 『환단고기』 내의 『단군세기』, 『북부여기』, 『고구려국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환단고기의 저본이 된 역사서들은 한양조선 시대에서조차 중국에 사대하는 풍토에 금서로 묶여 있었었다. 흔히 강단 사학자들이 기존의 역사 서술구도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 시대의 역사 서술의 사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참역사는 정신사를 알아야 한다. 왜 고주몽 성제는 최초의 연호(年號)를 '다물'(多勿)이라고 했던가? 다물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회복하다', '되물리다'는 뜻을 가진 한민족의 고어이다. 고주몽 성제는 고조선의 역사적 문화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정신적인 연계성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고구려와 고조선이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서술하는 현재의 역사 기술 풍토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참 역사는 고조선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서술하기로 하자. 한민족 역사는 단순히 청동 동검과 빗살무늬 토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인들이 오늘날과 같이 스테인리스 밥그릇으로 밥을 먹지 않고 토기에 음식을 해먹었더라도 오히려 오늘날 인간보다 훨씬 더 수승(秀勝)한 인간적 덕성으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사(先史) 시대라 하여 반짐승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현대의 역사 인식도 또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일이라 본다. 인간 역사는 무에서 유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상승 진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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