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드라마 '궁'과 비극적 대한제국 왕족의 삶

풍월 사선암 2006. 2. 24. 23:51

 

   

최근 모 TV에서 '궁'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이 계속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드라마다. 전 국민의 관심을 받는 황태자에 대한 묘사를 보며 비극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실제 대한제국 왕족들의 삶을 생각해 보게 된다. 왕족의 운명은 국가의 운명과 동일하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치욕과 능멸의 시대를 살아야했던 백성들처럼 왕족 또한 비극적 삶을 살게 된다.


조선의 운명, 이구의 운명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기기 전에 5백년 간 이 땅은 이씨 씨족이 중심이 된 왕조인 "조선(朝鮮)"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반정을 꾀하여 고려를 멸망시키고 세운 조선은 근대화 과정에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으로 바꾸며 격동의 시대를 맞게 된다. 조선의 운명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에 의해 그 명을 다하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시대의 시작은 조선 왕조의 몰락을 의미했으며 또한 역사에서 버림받은 왕족들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기도 했다.

 

2005년 7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 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이구는 영친왕와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1932년에 태어났다. 이방자 여사는 일본인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꾸몄던 대한제국의 왕족과 일본의 왕족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킨 사건의 희생자였다. 이방자 여사는 나중에 일본인이 대한제국과 조선인들에게 행한 잘못을 대신 사죄하며 생을 다할 때까지 이 나라의 사람으로써 헌신했다. 이구는 1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왕족의 후예가 아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이 아닌 한 명의 동양인으로 살아왔다.

 

 

이구는 독일계 미국인 딸인 줄리아 여사와 1958년 미국 뉴욕의 세계적인 건축가 아이엠페이(IM)의 사무실에서 만나 그 해 결혼했다. 이후 1963년 이구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했다. 그러나 1977년 이후 별거 상태에 있다가 결국 이혼을 했는데 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친족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외국인을 왕족의 대열에 끼워둘 수 없다는 것이었으리라. 줄리아 여사는 이구의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36년 간 지배당했던 우리는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과거의 지배자였던 조선왕족들에 무심했다. 조선왕족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국가인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은 반봉건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를 기치로 내세우고 있었으므로 왕족이 설 자리는 없었다. 대한민국 또한 과거의 지배자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한동안 창덕궁을 이들의 거처로 돌려주는 정도의 배려를 했을 뿐이다. 이들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현대사에서조차 이들을 구체적으로 조명하지 않았다.


덕혜 옹주


오래전 MBC에서 <덕혜옹주>라는 제목의 815 특집극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조선왕조의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덕혜옹주는 고종 임금이 상궁 양씨와의 사이에 낳은 고명딸이다. 그녀의 생모가 왕비가 아니라서 공주가 아니라 옹주라고 불린다. 1912년에 태어난 그녀는 13살 되던 해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구실로 일본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영친왕이 그러했듯 덕혜옹주 또한 일본인 백작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을 하게 된다. 덕혜옹주는 1919년 이미 김장한과 약혼을 한 바 있었다.

 

 

원치 않는 이국 생활로 인한 신경쇠약 증세와 강제 결혼으로 인한 충격, 또한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현해탄에 투신자살하는 고통을 겪은 그녀는 해방 이후인 1953년 남편 다케유키에 의해 강제 이혼 당한다. 1962년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1989년 4월 임종할 때까지 별다른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자신 속에 갖힌 체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그 프로그램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덕혜옹주가 지금은 철거되어 버린 과거 조선총독부 건물이 가로막고 있는 궁궐의 정문을 구부정한 허리로 바라보다 힘겹게 궁궐로 돌아가는 장면. 조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였던 그녀는 조선 왕족의 모든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자였다.

 

(1962년 낙선재에서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 사진 : COEO.NET)

 

아래 사진은 몇 안되는 대한제국 왕족의 가족사진이다. 중앙에 고종이 앉아 있고 왼쪽부터 차례대로 영친왕,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가 있다. 아버지 고종이 고전적인 긴 수염이 있다면 아들인 순종은 콧수염을 그리고 영친왕은 면도를 깨끗이 한 모습이다. 1915년에 찍은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에서 덕혜옹주는 자신의 기구한 삶을 알 지 못하는 듯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특집극 <덕혜옹주>의 한 장면에서 당시 고종으로 분했던 고 이낙훈씨가 덕혜옹주를 업고 토닥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고종은 그녀를 참으로 귀여워하고 사랑했다고 한다.

 

 
   이방자와 줄리아

 

조선왕족의 후예들은 지금도 사라져버린 역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1910년 경술국치의 해에 27대 519년의 역사를 뒤로 사라졌다. 그들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역사가 조선왕조 마지막 세대들을 다시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우리는 고종을 무능한 임금이라 생각하고 고종의 둘째 아들인 순종을 일제의 야욕에 무기력하게 굴복했으며 영친왕은 무의미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종은 일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고 그로 인해 강제 퇴위를 당하게 된다. 아들인 순종 또한 쇠망한 나라의 임금으로써 "이왕(李王)"이라는 치욕적인 명칭으로 불리며 1926년 운명할 때까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나라가 망하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영친왕에 대해서는 달리 말을 해서 무엇하랴. 그리고 그들의 곁에서 말없이 세월을 함께 한 두 명의 외국인이 있다. 영친왕의 부인었던 고 이방자 여사와 줄리아 여사가 있다.

 

 

이방자 여사는 일본 국왕 메이지의 조카인 모리마시 친왕의 딸이었으며 히로히토 왕세자의 비로 정해졌다. 그녀는 일본의 왕족이었으며 그렇게 살아갈 운명이었다. 그러나 1916년 일본에 볼모로 와 있던 영친왕과 정략적 약혼을 하고 1920년 황태자비가 되었다. 영친왕이 그러했듯 그녀 또한 식민지의 왕족과 결혼할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1945년 조선이 해방되자 그녀는 어이없게도 일본왕족으로부터 축출 당했다. 1989년 4월 덕혜옹주가 운명을 달리 한 지 한 달 후 그녀도 창덕궁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인이기 이전에 영친왕의 부인이었고 왕족이었고 그 기품과 명예를 위해 살아왔다고 알려져 있다. 생전에 그녀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일본을 대신하여 수없이 사과했으며 1963년 한국인으로 국적을 취득한 후 사망할 때까지 한국을 위해, 한국민을 위해 많은 사회사업을 했다.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여사는 이구의 부인이자 또한 이방자 여사의 며느리이기도 했다. 이방자 여사 스스로도 외국인이었으니 줄리아 여사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아들인 이구가 미국 MIT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건축 관련 일을 할 때 미국으로 건너가 아들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구가 줄리아 여사와 한국으로 돌아와 결국 이혼을 하게 되자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 그녀 자신은 일본 왕족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영친왕의 부인으로서 귀족으로서 자신의 그런 삶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아 여사는 왕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었다. 그저 이구라는 동양계 남자의 부인으로써 그녀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너무 과도했을 것이다.

 

줄리아 여사는 이구의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또한 이구의 장례식에 사용 예정이던 "왕족의 마지막 관"은 문화재청에 의해 회수되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관이니 문화재로 보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과정에 한 마디 개입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장례식에도 초대받지 못해 전 남편이 떠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다. 올해 82세인 그녀는 왕족을 남편으로 맞이했지만 여전히 외국인이고 이방인이고 타인이다. 슬프게 사라져간 조선왕조만큼 슬픈 운명이다.

 

조선왕족을 돌아보며...

 

이구의 사망 후 아리랑국제방송은 그의 생을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마지막 황태손, 이구(The Last Prince, Fading Dream of a Dynasty)’를 방영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살아 생전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한 전공비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약탈하여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었다.

 

 

작년 10월 10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북관대첩비는 경복궁에 잠시 머물게 된다. 어제(2월 22일) 북관대첩비는 이동을 위한 해체작업을 했다. 그리고 오는 3월 1일 원래의 자리인 북한의 함경북도 길주로 가게 된다.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고 그 사람들 중 이구가 있었다는 것은 사라져버린 나라의 왕족이지만 여전히 그들이 왕족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고난했지만 자신의 혈통과 책임감을 잊지 않았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왕족이 아니었을까.

 

'생활의 양식 > 역사,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 주몽 바로 보기 - 잃어버린 한민족의 고리, 부여  (0) 2006.05.31
중국의 역사 연대표  (0) 2006.03.04
(13)조선  (0) 2006.02.14
(12)고려  (0) 2006.02.14
(10)가야 (11)발해  (0) 200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