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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건설에 이바지한 여걸 '소서노'

풍월 사선암 2006. 6. 30. 19:38

고구려, 백제 건설에 이바지한 여걸 '소서노'


주몽을 전문경영인 삼아 고구려 세운 ‘킹 메이커’


개국을 다른 말로 천명(天命)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파옥(破屋)에 들어가 세 서까래를 지는 꿈을 꾼 것이 임금이 될 천명으로 전해지는 것은 개국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라를 창업한 인물이 있다.


소서노(召西奴)라는 여성이다.


2000여 년 전 만주 졸본천(卒本川·중국 요녕성 혼강)에 살던 소서노에게 객관적으로 미래는 없었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던 전남편 우태는 졸본 지역의 유력한 토착세력이었지만 이미 사망했고 그녀는 두 아들 비류·온조만 둔 과부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상화된 고대사회에서 여성에게 사회적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때 그녀는 북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을 만난다. 기원전 37년 경 스물 아홉의 소서노와 부여에 임신한 부인 해씨를 두고 망명한 스물 한살의 주몽의 만남이 회오리를 몰고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손부(孫婦) 소서노에게 북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은 시가의 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의 악연보다는 미래를 위해 주몽과 손을 잡았다. 그녀는 당시 졸본 지역의 시대적 과제는 통합에 의한 국가 창업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 과제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주몽을 내세워 졸본의 토착세력들을 통합해 나갔다. 처음에 졸본의 토착세력들은 주몽을 무시했다. 오이·마리·협보라는 세 부하만 데리고 부여에서 도망친 주제에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물의 신)의 외손이라고 떠벌이는 주몽을 달갑게 보는 토착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토착세력의 눈으로 주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토착세력의 대표 연타발의 딸이었지만, 정체된 현실에 만족하는 기득권자의 시각이 아니라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도전자의 시각으로 주몽을 바라보았다.


주몽이라는 이름 자체가 명사수라는 뜻일 정도의 뛰어난 무술과 부여왕의 말을 기르며 준마를 굶겨 마르게 만든 뒤 자신이 차지한 명석한 두뇌, 그리고 북부여라는 기존의 터전을 과감하게 버리고 망명한 벤처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주몽이 지닌 이런 콘텐츠를 높이 산 소서노는 그를 과감하게 CEO로 등용했다.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소서노와 벤처정신의 소유자 주몽의 결합은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다


소서노가 없었다면 스물 한 살의 망명객이 토착세력의 텃세를 극복하고 고구려를 건국하기는 불가능했다. 고구려는 말하자면 소서노라는 자본주가 주몽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건국한 신흥 국가였다. ‘삼국사기’ 백제건국기사에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대(厚待)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라는 기록은 여성에게 인색한 ‘삼국사기’로서는 이례적이다. 그만큼 고구려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고구려를 창업한 그녀의 공은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가 찾아오면서 부인된다. 고구려는 해씨와 유리가 아니라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온조와 함께 세운 나라였음에도 후계자는 유리가 된 것이다. 이때 소서노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유리왕과 권력투쟁에 나서는 것이었다. 유리왕은 졸본 지역에 자기 세력이 전무했다 토착세력인 소서노가 두 아들과 손잡고 유리왕 축출에 나선다면 그가 승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내부 다툼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나라 창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장남 비류가 그녀의 뜻에 동조해 동생 온조를 설득했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가진 재산과 노력을 모두 기울여 나라를 세우도록 도왔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여기에서 불필요한 혹처럼 우울하게 지내느니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 지방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나라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삼국사기’는 이때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소서노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주를 떠나 한반도로 남하한 소서노는 푸르게 넘실대는 한강을 보고 새 나라의 도읍지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장남 비류는 바닷가가 새로운 도읍의 적지라고 주장했다.


소서노는 아들에게 얽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장남 대신 차남 온조와 한강 유역에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 서울 풍납토성)을 쌓고 새 나라를 창업했다.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요서를 아우르는 해상왕국 백제는 이렇게 시작됐다. 소서노는 온조와 함께 백제의 기틀을 잡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낯선 망명객 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건국했던 그녀의 경험과 능력은 백제 창업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한강 유역을 도읍지로 정한 그녀의 선택은 미추홀을 선택한 비류가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후회했다는 점에서도 탁월함이 입증된다.


‘삼국사기’ 온조왕조 13년(서기전 6년)은 “왕모(王母)가 61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왕모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극히 희소하다는 점에서 소서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 준다. 비록 고구려 개창의 공은 남편 주몽에게, 백제 개창의 공은 아들 온조에게 돌아갔지만 이 두 나라의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관 때문에 그녀의 이름은 역사서에서 점차 지워져 그 편린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가 일설(一說)로서 그녀의 이름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소서노의 활약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던 고대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국가를 창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니라 두 나라를 개창한 인물은 세계 역사에도 그 유례가 드물다. 남성우월주의에 밀려 우리 역사에서조차 묻혀졌지만….


( 이덕일·역사평론가 )

제공 : 디지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