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고전음악

한국인의 애청 클래식 베스트 60 - [6] 시벨리우스 : 핀란디아

풍월 사선암 2006. 2. 4. 15:54

한국인의 애청 클래식 베스트 60 - [6] 핀란디아

Finlandia  OP.26 No.7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1865~1957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 

핀란드 태생

핀란드의 음악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작품.26 은 그의 조국의 혼을 담은 작품인데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국민음악의 창시자라 할수있다. 핀란드는 약소 국가로 13세기 경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스웨덴, 그 이후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 곡의 핀란드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1894년 당시에 러시아의 압제하의 있었던 핀란드는 압박속에서도 굴하지 않도록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민족 고유의 멜로디와 리듬을 사용하여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던 곡이다.당시에 러시아의 이런 내용을 알아 이 곡의 연주를 금지시키게 했으며 정확하게 민족 고유의 민요를 쓴 곡은 아니지만 핀란드적 색채를 보여주며 시벨리우스가 34세때 헬싱키에서 열리는 애국적 모임을 위해 쓰여졌다고 한다. 이 때의 제목은 "핀란드는 눈뜨다." 라고붙여 졌다고 하며 1899년에 작곡했고 1900년에 악보를 갸정하였는데 현재는 개정된 악보로 연주를 하고 있다. 핀란드는 13세기경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던 대공국이었으나,1808년 러시아의 핀란드에의 침공을 스웨덴이 격퇴하지 못했기 때문에, 1809년 이후로는 러시아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영토화 되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스웨덴 시대로부터 이어왔던 대공국으로서의 대우를 유지했으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1세(재위 1825~55년)의 시대 이후, 핀란드의 자치권이 침해당해 오다가,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핀란드의 자유는 박탈당하여, 러시아의 속령화 정책이 강제로 추진되었다. 그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애국 독립 운동이 격렬하게 고조되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행사가 벌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로는 문화적 행사를 가짐으로써 국민의 애국열을 높이고, 나아가 독립 운동의 자금을 모금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 한 가지로 민족적 역사극 '옛부터의 정경'이 상연되게 되었다. 1899년의 일이었다. 시벨리우스는 음악가로서 이 연극의 상연에 참가했다. 이 희곡을 위하여 쓴 음악은 각 장면을 위한 전주곡과 대사의 배경 반주음악, 그리고 힘찬 피날레였다. 이 극음악에서 후에 '역사적 정경, 제 1'(직품 25)와 교향시 '핀란디아'가 만들어졌다. 

이 작품 속에 담겨진 열렬한 애국심을 오늘 날에는 누구든지 금방 감지할 수가 있지만, 처음 발표 당시에는 청중도 비평가들도, 이 곡의 의미를 잘 몰랐었던 것 같다고, 시벨리우스 연구가 칼 에크만(Karl Ekman)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곧 청중은 이 작품 속의 뜨거운 애국심을 알아들었다. 이것을 눈치 챈 러시아 관헌은, 핀란드 국내에서 이 곡의 연주를 불온하다 하여 금지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눈이 미치지 않는 나라에서는 , 다른 타이틀로 바꾸 어서 러시아의 눈을 피해 연주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교향시의 중간부의 선율에는 후에 베이코 코스켄니에미(Veikko Koskenniemi)가 시를 써넣어 '핀란디아 찬가'라는 합창곡으로 만들었다. 이 곡은 오늘날 핀란드의 준 애국가처럼 애창되고 있다.

 

 

작품해설 

곡은 안단테 소스테누토의 서주로 시작된다. 우선 금관 악기가 연주하는 육중한 '고난의 동기'로 개시된다. 이 비극적인 동기를 받아서 목관과 현에 민중의 비탄을 상징하는 듯한 선율이 연주되지만, 그 후반은 점점 격렬하게 고조 되어, 이윽고 단호한 곡조로 전환, 알레그로 모데라토의 서주의 후반으로 들어간다. 투쟁하라고 외치는 동기가 팀파니와 나팔 등으로 날카롭게 울리고, 곡 첫머리의 '고난의 동기'가 이어지는데, 현악기에서는 약동적인 음형이 용솟음치듯 나와서, 이윽고 '투쟁에의 절규 제2의 동기'가 저음에서 힘차게 연주되자, 이를 계기로 곡은 폭발적으로 고조된 힘찬 주부로 들어간다. 여기서는 두개의 '추쟁에의 절규'의 모티브가 서로 짜 맞추어져서 곡의 흥취를 돋구는데, 또 하나의 짧고 새로운 동기, 탄짼베르에 의하면'축제에의 동기'도 곁들여져서, 압정에 대한 투쟁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이 격렬한 투쟁이 클라이막스를 구축하는데, 주부의 여기 까지는 교대로 되풀이 된다. 그후 크레셴도로 썰물이 빠지듯이 멀어지면, 이어서 최초의 목관 악기에 이어서 현에 의한 찬가풍의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이 주제는 민요풍의 정취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여서, 민요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생각된 일도 있었으나 영국의 시벨리우스 연구가 로자 뉴마치(Rosa Newmarch,1857∼ 1940)가 작곡자에게 물었을 때 작곡자는 부정 했다고 한다. 개설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가사를 붙여서 '핀란디아 찬가'라 하여 노래로 불려지는 것은, 극음악으로서 이 작품이 발표된 후에, 시인 코스켄니에미가 이 부분에 가사를 끼워 넣은 것이므로, 원래 이 선율은 민요는 아니라고 하는 쪽이 맞다. 이 평화로운 찬가가 두 번 연주된 뒤, 재차 두 개의 '투쟁에의 모티브'와 '축제의 모티브' 가 곡의 고조를 부추겨, 종말의 클라이막스 속에, 후에 '핀란디아 찬가'로 된 선율의 일부를, 금관 악기가 고음으로 연주하여 힘찬 피날레가 시작된다. 연주는 서주로 시작하여 안단테 소스테누토 2/2박자이며 찬송가와 비슷한 제1테마와 민요풍의 제2테마가 나타나며. 여기서 2개의 테마는 애국심을 고취시켜 클라이막스에 이르는데 점처적으로 금관과 팀파니의 격렬한 연주로 모든 악기의 유니즌으로 강조시킨다. 현악기와 목관악기등이 여러 형태로 슬픈 민요풍으로 표정있게 연주를 하고 다시 음악이 고조되어 특징있는 리듬의 첨가되다가 힘차게 끝을 맺는다.


잔 시벨리우스(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1865~1957)
     핀란드 헤멘린나  태생.

9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5세 때부터는 바이올린과 작곡법을 배워 이 무렵부터 점차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음악가가 되려는 그의 희망을 반대하여 1885년 헬싱키대학에 입학, 법률을 전공하는 사이사이 헬싱키음악원에서 베겔리우스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그 후 음악을 전공하기 위하여 대학을 중퇴하고 당시 음악원 교수로 있던 명피아니스트 부조니에게 사사하였다.시벨리우스는 본래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뜻을 품었으나 무대에 서면 상기하는 성격 때문에 연주가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내성적인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베를린(1889) ·빈(90)에 유학하고, 빈에서는 브람스를 만나 가곡에 호의적인 평을 받았다. 민족적인 소재를 통속적인 묘사에 빠지지 않고 유럽풍인 지적 묘사로 처리한 그의 작풍은 유학시절에 쌓은 지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92년 모교 헬싱키음악원의 작곡과 바이올린교수가 되고, 작곡면에서는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에 의한 교향시 《크레르보》 《엔사가》, 모음곡 《칼레발라》 등으로 국외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투오넬라의 백조》를 비롯한 《4개의 전설》, 교향시 《핀란디아》 《제1교향곡》 등으로 명성을 얻고 1897년에는 국가에서 종신 연금을 주기로 하여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국외로의 연주여행도 많아졌으나, 《제2교향곡》을 완성한 1902년 전후부터 4년간은 귓병으로 고생을 하고 1904년에는 헬싱키 교외의 별장으로 옮겨 여기에서 죽을 때까지 반 은둔생활을 하였다. 

1924년 《제7교향곡》, 이듬해의 교향시 《타피오라》 이후는 거의 작품이 없고, 뇌출혈로 91세의 생애를 마쳤다. 7개의 교향곡 외에도 많은 교향시 ·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있고, 《핀란디아》 《투오넬라의 백조》 등이 특히 널리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