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코로나가 부른 별거… 아버지는 결국 가방을 쌌다

풍월 사선암 2020. 3. 21. 11:20

코로나가 부른 별거아버지는 결국 가방을 쌌다

[아무튼, 주말-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자식 때문에 참고 산다는 말이 저는 참 듣기 싫었습니다. 나 때문에 엄마가 행복을 포기한다는 뜻인 줄만 알았으니까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 부모가 되어보니 그 말의 나머지 의미를 알겠네요. 이토록 안 맞고, 이토록 무심하고, 이토록 괴상한 사람과의 사이에 저토록 어여쁜 자식이 태어났다는 우주의 신비! 그 신비 앞에서는 둘이 나란히 손잡고 고개 숙일 수 있다는 뜻임을. 이토록 지리멸렬한 싸움을 계속해나갈 의미 또한 바로 그 신비 속에 있다는 뜻임을. 홍여사



어린 시절, 저는 동생의 만행을 부모님께 일러바칠 때마다, 웬만하면 엄마가 아닌 아빠에게 달려가곤 했습니다. 언니인 네가 참으라고만 하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주셨거든요. 물론 동생은 아빠보다 엄마가 공정하다고 우기며, 엄마에게 달려갔지만요.

 

세월은 흘러, 이제는 부모님이 자식인 우리를 찾으십니다. 두 분이 다투시면, 엄마는 꼭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지요. 중간에 맥을 끊고 자꾸 아버지 입장에 서보려고 하는 큰딸과 달리 막내는 무조건 맞장구를 쳐주니까요. 반면 아버지는 큰딸인 저를 찾으십니다. 생전 먼저 전화하는 일 없는 분이 그럴 땐 갑자기 전화를 거시죠. 그러곤 괜히 딴소리를 하십니다. 너희는 별일 없느냐?

 

어제도 아버지는 전화를 걸어 그 말씀만 하셨습니다. 너희는 별일 없느냐고. 느닷없이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가 수상쩍었지만 캐묻지는 않았습니다. 저희는 잘 있으니 아버지도 부디 바이러스 조심하시라고만 대답했지요. 그런데 오늘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의문이 풀렸네요. 동생은 동생대로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는데,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이 며칠 전 크게 다투셨답니다. 사달이 된 것은 뜻밖에도 코로나 바이러스! 면역 관련 기저질환도 있는 데다, 최근 몇 년간 폐렴을 두 번이나 앓았던 엄마는 바깥출입을 완전히 끊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생활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거인인 아버지가 '협조'를 안 해주시니, 엄마의 노력과 인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워낙 털털한 성격이기도 하시지만, 아버지는 집 안에 갇혀서는 하루도 못 견디는 분입니다. 산에도 가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는 분. 물론 어느 정도는 자제하겠지만, 엄마가 원하는 수준의 자가 격리는 애초에 바랄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 집에 있지 못하고 공원으로 시장으로 돌아다니는 것까지는 엄마도 참았다는군요. 그러다 몇 번, 친구를 불러내서 술을 마시고 온 것까지도 잔소리만 좀 하고 넘어갔다지요. 문제는 지인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이 시국에 결혼식이 웬 말이냐고, 안 가도 이해할 거라고,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아버지는 엄마를 속이고 식장에 다녀온 겁니다.

 

바이러스 위험지역에 다녀왔다는 사실보다 자신을 속였다는 점에 더 격분한 엄마는 급기야 양자택일을 요구했습니다. 당신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든지, 아니면 집에 들어오지 말든지 하라고. 그 말에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기분이 상하셨는지, 바로 짐가방을 싸셨다네요. 지금은 비어 있는 할머니의 시골집으로 거처를 옮기셨답니다. 그러니까 지금 두 분은 코로나 바이러스성 별거에 돌입해 계신 겁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학생 시절에는, 두 분의 잦은 다툼이 한심하게만 보였습니다. 왜 서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까? 더운 사람은 거실에 자고, 추운 사람은 전기장판에 자면 되지 왜 내가 정상이고 당신이 비정상이라며 다툴까? 그러나 저 자신이 결혼을 해보니, 부부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쿨할 수가 없더군요.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게 있어서입니다. 내게 맞춰주고, 내 아픔을 보듬어 달라는 강한 요구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엇박자를 전혀 이해해주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해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는 거죠. 어제도 엄마가 여동생에게 그러시더랍니다. 이번 바이러스가 문제가 아니라, 네 아빠는 평생을 날 속이고 내게 무관심했다고. 나 몰래 돈을 쓰고 나 몰래 사람을 만나고, 나 몰래 몸에 해로운 짓들을 해왔다고요. 게다가 몸이 약한 아내를 걱정하는 마음이 평생 없었다고 하더랍니다. 밖에서 바이러스를 묻혀온 것 자체보다, 지난 수십 년간 쌓이고 쌓인 서운함이 더 큰 문제인 거죠.

 

그러나 아버지라고 할 말이 없으실까요? 어제 아버지가 제게 차마 못 하신 말씀을 제가 대신해볼까요? 아버지는 아마 엄마가 평생 당신을 믿지 못하고, 자유를 억압했다고 하실 겁니다. 가정의 행복에 해가 될 짓은 하지 않았는데, 내가 하려는 일마다 싹을 자르고,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봤다고 할 겁니다. 그래서 나는 네 엄마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소심한 거짓말을 하게 된다고요.

 

아버지는 쫓겨났다고 하고, 엄마는 홀로 팽개쳐졌다고 하고. 누구의 말이 진실에 가까울까요? 자식인 저로서는 진실보다 더 절실한 것이 '접점'입니다. 어릴 때는 그러려니 생각했던 부모님의 불화가, 두 분만 집에 남겨두고 떠난 이후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중립에 서서 두 분의 생각을 바꾸려 노력했던 겁니다. 엄마에겐 아버지 역성을 들고 아버지에겐 엄마 입장을 두둔하고. 그러나 제 결혼생활도 십여 년이 넘으니 이제는 생각이 달라지네요. 두 분이 서로 생각을 몰라서 저러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저러시는 겁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내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면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내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 고갈된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요?

 

저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고는 대뜸 이렇게 말해버렸죠.

 

"엄마. 대체 아빠 왜 그러셔? 다들 아픈 엄마를 걱정하는 마당에 정작 남편이 어떻게 그렇게 무심해? 내보내길 잘했어. 코로나 진정되고도 한 달 더 있다가 오시라고 해. 아니면 이참에 졸혼(卒婚)을 해버리든지. 엄마한테는 딸들이 있잖아."

 

영원한 중립인 맏딸의 전화를 긴장해서 받았다가 뜻밖의 설레발에 당황한 엄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하려던 말을 딸이 다 하니 무슨 말을 더 할까요? 엄마는 한숨을 푹 쉬며 그러더군요.

 

"그래도 굶고 있으라고 할 수 없으니 네가 그리로 이것저것 배송 좀 시켜 드려라. 돈은 내가 송금할게."

 

", 나도 이젠 아버지한테 신경 쓰기 싫어. 이번만이 문제가 아니야. 평생 아버지가 얼마나 자기 맘대로였어? 우리한테도 아버지로서 얼마나 무심했어? 이번에 고생을."

 

"!"

 

엄마의 외마디 소리에 저는 깜짝 놀라 말을 멈췄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엄마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려오더군요. 마치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독소가 폐부를 쿡 찌른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는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너까지 이러면 안 되지. 아빠가너한테는하여간 너희는아빠한테 이러는 거 아니지."

 

엄마는 모르십니다. 큰딸은 엄마보다 먼저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는 것. 아무리 바이러스가 무서워도 어떻게 엄마가 아버지를 못 들어오게 하느냐고 했더니, 아버지도 엄마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그래도 너희는 끝까지 엄마 편이 돼줘야지. 몸이 허약하니 얼마나 무섭겠냐. 딸들은 이해를 해줘라."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3.21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