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바둑,오락

한국 바둑 1인자 계보와 대국 스타일

풍월 사선암 2018. 7. 2. 08:16

실리 조남철, 두터운 김인, 경쾌한 조훈현, 묵묵한 이창호, 즐기는 이세돌

한국 바둑 1인자 계보와 대국 스타일

 

조남철, 국내 처음으로 인허 받아

김인, 유학파조남철 아성 무너뜨려

조훈현, 응씨배 우승으로 에 충격

이창호, 무려 16년간 세계랭킹 1

이세돌, 상식 파괴한 바둑계 이단아


조남철(1923,11,30 - 2006,7,2)


이세돌(33)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이 지난 일주일간 헤드라인을 장식하면서 대한민국은 바둑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우리나라에 나타난 최초의 바둑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나오는 도림 스님의 이야기다. 고구려 장수왕의 밀명을 받고 백제에 망명한 도림은 한성 백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려시대에는 여성들도 바둑을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 또 이순신 장군과 흥선대원군도 바둑을 즐겨 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이후 1955년 한국기원이 발족하면서 한국 바둑은 지금의 바둑 체계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1인자 계보는 한국 바둑의 아버지라 불리는 2006년 작고한 조남철 9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950620단위결정시합에서 국내 최초로 3단을 인허 받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에 이라는 것이 없었고, 일반적으로 으로 표시했다. 이후 조남철은 1956년 시작된 국수전 우승을 시작으로 9년간 정상을 지켰다. 1958년 시작된 왕좌전 4연패, 1960년 첫 돌을 둔 최고위전 7연패 등 광복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20년간 정석 바둑으로 한국 바둑의 1인자로 군림했다. 박영철 본보 객원기자는 철저하게 실리 바둑을 구사하신 분이라고 떠올렸다.

 

김인(1943/오른쪽)

 

조남철의 아성은 스무 살 아래 일본파김인(73)에 의해 무너졌다. 김인은 바둑을 업으로 삼기 위해 반상에 뛰어든 첫 번째 기사로 기억된다. 19614단까지 오른 김인은 196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듬해 귀국해 1965년 조남철을 꺾고 1인자로 올라섰다. 국수 6연패, 왕위 7연패, 패왕 5연패 등 10년 간 30개 타이틀이라는 전인미답의 위업을 달성했다. 일본에서 배워 온 선진기법으로 정석 바둑을 압도한 셈이다. 양재호(9) 한국기원 사무총장은 김인 선생은 두텁고 전체를 보는 기풍이셨다고 추억했다.

 

조훈현(1953)

 

하지만 김인의 독주도 열살 아래 조훈현(63)이 등장하자 제동이 걸렸다. 조훈현은 19629세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웠다. ‘바둑 신동조훈현은 일본으로 건너가 신인상을 차지했고, 국내에선 1980년 제1차 전관왕(9관왕)을 휩쓸며 스타덤에 올랐다. 1983년까지 6년 연속 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 수상, 1986년 제3차 전관왕(11관왕) 기록 제조기였다. 1989년 응씨배 우승은 그때까지 일본과 중국에 비해 국제적 인지도가 낮았던 한국 바둑의 위상을 드높인 쾌거였다. 1992년에는 통산 타이틀 획득 124회로 세계 최고 기록을 수립했고, 1993년에는 패왕전을 우승해 한 기전 최다연패 기록인 16연패의 기록을 세웠으며, 국가대항전인 진로배와 이듬해 후지쓰배를 우승함으로써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응씨배, 동양증권배, 진로배, 후지쓰배)를 달성했다. 조훈현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과감하게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공격 바둑의 시초였다. 양 총장은 조훈현 9단의 바둑은 한 마디로 경쾌하다면서 수 읽기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이창호(1975)

 

조훈현을 밀어낸 건 그의 제자 이창호(41)였다. 11세에 입단한 이창호는 198914세에 첫 번째 국내 타이틀을 따냈고,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92년 동양증권배에서는 최연소 세계 챔피언이 됐다. 1989년에는 1년간 111국의 공식 대국을 두어 최다 대국 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연간 최고 승률 기록(1988751088.2%), 최다 연승 기록(19941연승) 청출어람의 기록을 쏟아냈다. 입단 10년도 안 된 1994년에 이미 국내 16개 기전을 모두 한 번씩 우승하는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고, 2003년에는 그랜드슬램(7개 세계 대회 1회 이상 우승)도 작성했다. 이밖에 역대 최장기간 세계랭킹 1위에 이름을 올린 이도 이창호 9단이다. 그는 1991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6년간 선두 자리를 유지했다.

 

이창호 스타일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에서 가장 자주 거론됐다. 발 빠른 조훈현과 달리 묵묵한 실리 바둑으로 후반에 승부를 보는 스타일이다.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극도로 차분한 성격을 보여 준 바둑 기사 최택(박보검)의 실제 모델이 이창호다. 양 총장은 이창호 9단은 무척 신중하고 계산 능력만큼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창호의 시대가 차츰 저물자 한국 바둑은 이세돌이 등장해 세계최강의 맥을 이어나갔다.

 

이세돌(1983)

 

이세돌은 기존의 상식을 파괴한 바둑계의 이단아로 불린다. 감정 표현에 솔직한 그는 바둑도 도전적이며 즐기는 스타일이다. 이세돌과 절친으로 알려진 염정훈 8단은 순간 순간 받아 치는 임기응변 능력이 탁월하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수를 많이 둔다며 이세돌만의 독특한 기풍을 설명했다. 이세돌은 지난해 중국의 구리 9단과 역사적 10번기에서 승리하면서 연간 상금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박영철 객원기자는 조남철 선생부터 김인,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까지 공교롭게 대략 10년 터울씩 지는데 바둑 스타일도 김인과 이창호는 두터움, 조훈현과 이세돌은 전투형으로 세대를 변하면서 교차되는 특성이 있다고 돌아봤다.


한국일보 등록 : 2016.03.18 16:34


박정환(1993)

 

고등학생 신분으로 '10단전' 우승. 2009년 한국 바둑계는 '여드름 소년' 한 명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주인공은 당시 서울 충암고 1학년이었던 박정환. 출중한 실력도 놀라웠지만, 기풍(棋風)이 독특했다. "두터운 실리가 기풍이다." 두터운 실리라니, '형용 모순'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1993년생인 박정환은 6살 때 바둑과 인연을 맺었다. 아버지가 바둑 두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봤을 뿐인데. 박정환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7살 때 당시 최고의 바둑 유망주들이 모여 있던 '권갑룡 도장'에 들어갔다.

 

박정환은 2006년 만 13살의 나이에 프로기사가 됐다. 박정환은 또 하나의 '천재기사' 등장을 기다렸던 바둑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세계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이후 세계 바둑계는 중국이 호령했다.


이세돌이 20163월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 '알파고'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다. 이세돌 특유의 창조적인 수는 인간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하지만 바둑 실력 자체로만 보면 '인간계' 최강은 중국의 커제 9단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과거 '이창호 시대'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커제는 절대 강자의 입지를 다졌다. 한동안 커제의 독주 체제가 이어질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세계 바둑계의 섣부른 판단은 박정환의 등장과 함께 깨졌다.

 

2018년만 놓고 보면 박정환은 놀라운 성적표를 이어가고 있다. 세계 메이저 대회인 몽백합배에서 우승했다. 국가대표의 자존심 대결인 '하세배''월드바둑챔피언십'까지 연이어 우승을 차지했다. 커제는 최근 박정환과의 맞대결에서 내리 3연패를 당했다.

 

박정환은 현재 세계 랭킹 1위다. 2018년은 인간계 최강의 자리가 바뀌는 한 해로 기록될 것을 보인다. '박정환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아시아경제 최종수정 2018.03.26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