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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도, 끝도 우리는 진짜 원팀이었다

풍월 사선암 2018. 6. 28. 22:09

시작도, 끝도 우리는 진짜 원팀이었다

서호정 골닷컴 소속 축구전문기자

 

운명의 시간이 다가 온 카잔 아레나. 16강 진출과 조 1위를 위해 다득점 승리를 갈망하는 독일은 그라운드 반쪽에 이미 전형을 잡고 있었다. 주장인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는 경기 전 상대팀 주장과 선전을 다짐하고 심판과 악수를 나누기 위해 하프라인에 나와 있었다.

 

반면 한국 진영은 텅 비어 있었다. 부상으로 결장한 기성용을 대신해 임시 주장을 맡은 손흥민도 보이지 않았다. 그라운드에 나서야 하는 11명의 선수와 벤치에 앉는 나머지 선수, 경기에 나서지 못하지만 마음이라도 함께 하고 싶다며 벤치행을 택한 기성용과 박주호까지. 23명의 선수들은 한국 벤치 가까이의 터치라인에 둥글게 모였다.

 

서로가 어깨동무를 하고 둘러싼 그들은 30초가량 그들만의 의식을 진행한 뒤 그라운드로 향했다.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2차전부터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경기 시작 전 벤치에서, 경기가 끝난 뒤에는 센터서클에서 선수들이 모두 모였다. 그라운드 위에서 경쟁하는 상대 팀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과거의 한국 대표팀도 경기 전 원을 만들어 짧게 소리를 지르고 나가는 정도였다.

 

짧게는 멕시코전이 끝나고 독일전을 준비하는 지난 나흘, 좀 더 길게는 이번 월드컵 기간 2, 더 넓게는 지난 한달 넘는 월드컵 준비 기간 동안 대표팀은 힘든 나날을 보냈다. 월드컵까지 오는 과정에서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몇몇 논란을 낳은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외부에서 오는 비판의 압박이 심했다.

 

1차전 스웨덴전에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0-1로 패하자 여론은 분노했다. 2차전 멕시코전이 끝난 뒤에는 장현수를 비롯한 특정 선수에 대한 도 넘은 비난이 홍수를 이뤘다. 선수들의 심리를 챙겨 줄 전문가가 대표팀 내에 없다는 지적과 보도가 이어졌다. 성난 여론의 파도에 대표팀은 언제라도 무너질 모래성처럼 보였다.

 

감당하기 쉽지 않았고 외로웠지만, 의외로 대표팀 내부의 결속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독일전을 앞두고 경기를 뛰지 못하는 선수들에게 기회를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늬앙스의 보도도 있었다. 대표팀 분위기를 모르는 내용이었다. 1분도 나서지 못한 선수들도 오직 팀만을 생각하며 훈련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동료들을 도왔다.

 

기성용과 박주호는 독일전을 앞두고 아픈 다리를 끌고 매번 훈련장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쉬고,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훈련을 참관해서라도 21명 동료들 옆에 있길 원했다.

 

멕시코전에서 패하고, 이미 종아리 부상을 입어 다리를 절뚝거리는 기성용은 패배에 침울하고, 눈물 흘리던 선수들을 모두 센터서클로 모았다. 멕시코 선수들과 관중 상당수가 빠져나갈 때까지 그들은 원을 만들어 얘기했다. 기성용 만이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돌아가며 말했다. 조금이나마 패배의식을 지우고, 남은 경기를 준비하기 위한 마음을 모으는 차원이었다.

 

처음 이런 의식을 시작한 것은 장현수의 아이디어였다. 지난해 12월 동아시안컵 일본전이었다. 한국은 첫 두 경기에서 중국, 북한을 상대로 11무를 기록했지만 내용이 좋지 않아 지탄을 받았다. 기성용이 참가하지 못해 주장을 맡고 있던 장현수는 경기 시작 전 일부러 모든 선수들이 모여 기를 모으고, 의식을 공유하자는 차원에서 23명이 모두 하나 되는 행위를 시작했다.

 

스웨덴이 끝나고 대표팀이 흔들릴 수 있던 타이밍에 기성용이 그 아이디어를 다시 꺼냈다. 멕시코전에 대표팀은 비록 패했지만 더 나은 경기력을 보였다. 달라진 전술, 달라진 선수 구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그라운드에서 표출됐다.

 

독일전은 왜 그들이 그런 보이지 않는 힘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는지가 드러난 경기였다. 압박 위치를 이전 두 경기보다 더 내려선 대표팀은 투혼과 냉철함이 완벽히 섞인 수비로 독일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일치단결 해 더 높은 수준의 개인 능력을 지닌 팀을 밀어내고, 막아냈다.

 

뢰브 감독이 2명의 미드필더를 내보내고, 공격수를 거듭 투입할 때 한국도 반격의 타이밍을 잡았다. 상대 허리가 느슨해질수록 역습의 기회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비가 독일의 파상공세마저 버텨준다는 전제가 필요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수비진과 골키퍼 조현우가 믿음직했다. 골을 먹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후반 막판 2골이 나왔다. 신태용 감독이 그렇게 공을 들여 준비했다는 세트피스 상황에서 행운이 더해지며 김영권의 선제골이 나왔다.

 

한층 무리하게 된 독일은 골키퍼 노이어까지 필드 플레이어처럼 가담했다. 그때 신태용 감독의 두번째 교체 카드였던 주세종의 가치가 빛났다. 도전적인 수비로 노이어로부터 공을 뺏은 주세종은 장기인 정확한 롱킥을 전방에 보내 손흥민의 추가골을 도왔다. 주세종의 긴 패스가 텅 빈 독일 진영으로 떨어지고, 그걸 쫓아가는 손흥민을 보며 느낀 대한민국의 쾌감은 그 순간만큼은 모두 하나였을 것이다.

 

2-0 승리. 한국은 54년 만의 월드컵 2연속 제패를 노리던 세계 1위 독일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비록 우리의 16강은 없었지만, 한국은 결코 약하기만 한 팀이 아님을 보여줬다. 월드컵에서 독일을 상대로 아시아 팀이 거둔 첫 승점이자 승리다. 한국이 독일과의 역대 전적에서도 22패 동률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우리 선수들은 다시 센터서클에 모였다. 코칭스태프지만 맏형 같은 차두리 코치가 함께 했다. 잠시 차두리 코치의 일장연설이 끝난 뒤 23명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기성용이 가장 먼저 얘기했다고 한다.

 

오늘, 우린 최선을 다 했다. 하나의 팀이었다. 우리가 정말 자랑스럽다.”

 

한국이 원팀의 힘을 마지막까지 증명하는 동안 중계 카메라가 비추는 독일 벤치는 씁쓸함 그 자체였다. 이미 라커룸으로 돌아간 몇몇 선수들, 그리고 벤치에 남은 토마스 뮐러 등은 울먹거리며 물병을 집어 던졌다. 패자의 아픔을 가벼이 여길 순 없지만, 독일에게 80년 만의 조별리그 탈락을 안겼다는 사실은 충분히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월드컵은 그 나라의 축구 실력뿐만 아니라 시스템, 팬층까지 총동원되는 일종의 국력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대에 선수들만 떠밀었다. 패배와 실패의 짐을 그들에게만 과하게 부과했고, 냉소적으로 비판하며 혼냈다. 동료의 실수를 안아주는 우리의 원팀과 달리, 정작 우리 내부는 이리저리 갈라져 싸웠다.

 

대표팀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애정 없는 비판마저도 탓하지 않고 이겨내며 승리해 희망과 기쁨을 주려 했던 선수들에게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도전을 승리로 이끌며 큰 울림을 줬다.

 

대표팀은 오는 2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다. 4년 전 대표팀은 엿과 야유를 받았다. 이번엔 박수와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 단지 1승을 하고, 못 하고의 차이가 아니다. 진심으로 원팀이었음을 증명하며 돌아가기 때문이다.

 

2018.06.28 오전 07:50 =서호정(러시아 카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