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함께 차차차(茶茶茶)
커피가 각성의 음료라면, 차는 이완의 음료다. 일하는 중 잠을 깨기위해 짬을 내 마시는 커피와 달리 차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음미하며 마신다. 쉼없이 달려 온 한 해의 절반, 느슨한 안정과 위로를 건네는 차 한 잔 어떨까.
차(茶)는 현재 대세인 커피보다 더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해온 음료이다. 커피가 들어온 것이 20세기 초반이라면 차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신라 때부터 알려지기 시작,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커피처럼 큰 인기를 누렸던 적은 없지만 은근하고 차분한 특징처럼 오랫동안 은은한 향을 풍겨왔다. 따뜻한 물에 우리는 것에서부터 여러 재료와 섞어 마시는 블렌딩까지, 취향대로 즐길 수 있는 차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신농의 떨어진 찻잎인가, 달마의 눈꺼풀인가
차의 종주국은 중국이다. 영국의 홍차 문화도, 일본의 다도 문화도 모두 중국의 차나무에서 출발했다. 인류와 차를 마셨다는 이야기는 기원전까지 올라간다. 기원전 2373년, 중국의 농사의 신이자 한의학의 창시자 신농은 건강을 위해 늘 물을 끓여 마셨는데, 그의 끓는 물에 우연히 차나무 잎 하나가 떨어지면서 찻잎을 물에 우려먹는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설처럼 흘러오는 내용이라서 100% 진실이라고 믿기 힘들지만 여러 기록과 관련 유물을 보면 확실히 기원전 800년 무렵부터는 중국을 중심으로 차를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차와 관련한 전설같은 얘기는 또 있다. 불교 수행을 위해서 7년간 잠을 자지 않았던 달마는 잠을 쫓기 위해 눈꺼풀을 스스로 잘라냈는데, 그가 눈꺼풀을 던진 자리에 자라기 시작한 나무가 차나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를 차(茶)라고 부를 것인가
우리는 흔히 생활 속에서 대부분 음료를 차라고 부른다. 보리차 같은 곡물차부터 허브차, 한방차, 과일차, 꽃잎차, 나아가 커피류까지 차의 범위에 포함시킨다. 이들 모두는 넓은 의미에서 차라고 부를 수 있지만,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차는 아니다. 진짜 차라고 부를 수 있는 차는 차나무 잎으로만 우려낸 음료이다. 차나무는 티베트와 중국 경계의 산악 지대 등에서 자생하기 시작한 관목으로 교배종까지 따지면 300~600종류가 있다. 가장 크게 중국에서 흔히 나는 소엽종과 인도에서 나는 대엽종이 있다. 주로 종에 따라 녹차에 적합한 것과 홍차에 적합한 것으로 나뉘며 서로 다른 종류의 차나무에서 따낸 찻잎은 저마다 독특한 맛과 향을 지녔다.
녹차와 홍차 어떻게 다를까
차의 대표적인 종류인 홍차와 녹차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때 많은 이들이 종이 다른 나무에서 생산된 '차'라고 말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녹차와 홍차의 차이는 숙성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산화과정을 얼마나 거쳤는가에 대한 차이다. 그럼에도 반은 맞는 이야기라는 말은 녹차에 사용하기 좋은 차나무 종과 홍차로 만들기 좋은 차나무가 종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차나무에서 생산된 찻잎이라 하더라도 녹차, 홍차가 될 수 있지만 각각의 차를 만들기에 적합한 차나무가 있는 것이다.
녹차, 더 세세하게 나눠볼까
커피가 원두에 따라, 로스팅의 방법에 따라 맛이 무궁무진하듯 차의 세계도 그렇다. 찻잎의 채엽시기와 잎의 두께, 가공방법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지는데 이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시기를 나누는 24절기이다.
4월에 가까울수록 고급차로 분류되며 6월이 넘어간 찻잎은 저급차라고 본다. 24절기 중 청명(4월 5일)이전에 딴 찻잎이 가장 좋은 차라고 본다. 화전차라고도 불리는데 겨우내 영양분을 비축해뒀다 나온 새순이기 때문에 맛과 향이 응축돼 있어 고급차로 분류한다. 청명 이후에 수확한 차는 화후차이다. 화전차와 화후차는 우리나라 지리와 기후적 특성 상 나오기 힘들다. 우리나라는 보통 곡우를 전후로 찻잎의 첫번째 수확이 있는데, 이 무렵 나오는 차를 첫물차라고 한다. 첫번째 수확시기에 따는 차라는 뜻이다. 이 첫물차 중에서도 곡우 이전에 거둬들인 차를 우전차, 이후에 나온 차를 우후차라고 한다. 입하를 전후로 나오는 세작까지만 첫물차에 해당하며 이후 5월 중순이 넘어가서 따는 중작과 대작은 두물차에 속한다.
녹차, 가공방법에 따라
불발효차인 녹차는 찻잎을 딴 직후 발효를 막기 위해 크게 두 가지 가공 방법을 쓴다. 첫번째 방법은 찻잎을 솥에서 살짝 덖어서 만든 덖음차로 강한 구수한 맛이 특징이다. 또 하나는 찻잎을 찌는 방법이다. 찻잎을 수증기로 찌는 증제차(蒸製茶)는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나면서 찻잎의 푸른색이 유지된다. 이 두가지 방법을 함께 사용한 차도 있다. 증기로 찐 찻잎을 다시 덖어서 만든 옥록차는 구수함과 깔끔함 두가지 맛을 함께 맛볼 수 있다. 예전 일본 사무라이들이 이도다완과 같은 사발에 마셨던 말차는 말린 찻잎을 아주 미세하게 갈아 만든 가루차이다. 일본의 다도문화와 관련이 깊으며 다른 차보다 훨씬 더 향이 강하다.
홍차, 스트레이트? 블렌디드?
홍차는 한가지 종류의 찻잎을 그대로 즐기느냐, 아니면 다른 찻잎이나 향신료를 섞어 마시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전자는 스트레이트 티(straight tea), 또는 클래식 티(classic tea) 후자는 보통 블렌디드 티(blended tea)라고 말한다. 스트레이트 티는 한 지역에서 나는 찻잎 하나로 우려낸 차를 말하고, 블렌디드 티는 두가지 이상의 찻잎을 섞어 만든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다르질링, 기문과 같은 홍차는 한 지역에서만 난 하나의 찻잎으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았다. 이것을 그대로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면 스트레이트 티가 된다. 그러나 두 개 종류의 찻잎을 섞으면 블렌디드 티가 된다. 찻잎에 향신료 등으로 향을 첨가하면 플레버리 티(flavery tea)이다. 홍차에 설탕, 과일, 우유 등을 첨가해 먹는 방법은 베리에이션(variation)이라고 한다. 우유를 섞어먹는 밀크티가 여기에 해당한다.
세계 3대 홍차
일반적으로 세계 3대 홍차로 꼽히는 것은 다르질링, 기문, 우바로 모두 산지(産地) 이름을 땄다. 이들 모두 스트레이트 티이다.
다르질링 (Darjiling) : 영국이 중국에서 몰래 차나무를 들여와 식민지에 심었는데, 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종이 지금의 다르질링이 됐다는게 정설이다. 히말라야 산맥 고지대에서 생산된다.
인도의 주요 차 재배지 중 하나인 다르질링은 고도 400~2,500m에 위치해 있으며 좋은 기후와 맑은 공기로 유명하다. 특히 다르질링 첫물차인 '클래식'은 최고급에 속한다. 부드러운 머스캣(유럽산 포도의 한 종류)향 때문에 '홍차계의 샴페인'이라고 불린다. 차를 사랑하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차 때문에 봄을 기다린다는 말도 있다. 봄에 오직 극소량만 생산되는 이 희귀한 다르질링차는 향이 굉장히 풍부하고 섬세하다. 봄에 수확하고 제조한 다르질링차는 차를 우려내는 동안 찻잎이 녹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기문 (祁門) : 안후이성의 조그만 도시 기문(祁門)은 황산(黃山)의 남쪽에 위치해 있어 차 재배에 완벽한 기후를 띠고 있다. 중국에서 제일 질이 좋은 녹차로 유명하며 최근에는 홍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876년 치먼 출신의 관리 우간첸(余干臣, 여간신, 1850~1920)이 많은 시간을 들여 홍차 제조법을 익힌 뒤 기문에서 홍차 사업을 시작하면서 생산된 차이다. 기문차는 차를 만드는데 각별히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해서 일명 공부차라고 불리기도 한다. 공부하듯이 차를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 홍차이지만 서양 귀족들이 신비롭게 여겨 즐겨 마셨으며 훈연(燻煙)향과 은은한 난(蘭)향이 동양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우바 (UVA) : 스리랑카 고산지대에서 생산되는 우바는 특유의 분홍색 차 색깔과 우아한 장미향이 매력적이다. 세계 3대 홍차 중 하나로 스리랑카 중부 산악지대에서 재배된다.
스리랑카 홍차는 해발 고도가 높아질수록 품질이 좋은 것으로 여기는데 우바는 해발 고도 1200m에서 자란 차로 비교적 높은 곳에서 생산된다. 꽃향기와 산뜻한 맛, 과일 향과 박하 향이 오묘하게 섞인 매력적인 홍차다. 차의 색도 맑은 편이어서 아이스티로 마셨을 때 더 청량감을 느낄 수 있다.
대표적 블렌디드 티와 플레버리 티
브렉퍼스트 티 (breakfast tea) : 아삼을 기본으로 실론 티를 섞어서 만들었다. 향과 맛이 진한 편으로 카페인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영국식 아침식사와 어울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블랙퍼스트 티의 메인이 되는 아삼은 특유의 맛과 향이 강하고 색이 진하기 때문에 우유와 함께 밀크티로도 자주 이용된다.
얼 그레이 티 (earl grey tea) : 기문이나 실론 홍차 잎에 주로 향료를 얻는 나무인 베르가모트 오렌지 껍질에서 추출한 향을 넣어 만든 차이다. 19세기 영국의 수상이었던 찰스 그레이 백작에게 제공한 차라는 이름에서 얼그레이라는 말이 붙었다. 향이 매력적인 차이므로 밀크티보다는 아이스티, 핫티로 본연의 향을 즐기는 것이 좋다.
차를 향한 인류의 애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초월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 속 인물과 유명인 중에는 차를 특별히 아끼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의 작품과 글을 보면 차가 삶의 중요한 소도구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의 장수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 중국의 주석 시진핑, 그리고 영국의 문인들까지 그들의 특별한 차 이야기를 모았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으로 알려진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표적인 다인(茶人)이다. 그는 일본 내 다도 문화를 정립한 센노 리큐를 스승으로 모시며, 차를 정치활동의 수단으로 삼았다. 당시 히데요시와 리큐가 자주 마시던 차는 녹차를 갈아서 만든 말차이다. 평생 차를 사랑하며 자신의 스승 리큐를 아꼈던 히데요시가 리큐에게 자결을 명한 얘기에도 말차가 얽혀있다.
히데요시는 자신과 견해가 달랐던 리큐가 말차에 극약을 섞어 자신을 암살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사형을 내린다. 리큐는 자결하기 전 다회(茶會)를 열었는데, 조선의 찻사발인 '이도다완'으로 말차를 마신 뒤 찻사발을 스스로 깨버린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찻사발을 제자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있었는데 리큐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비극적인 운명을 가진 자의 입술이 스쳐간 이 잔을 누구에게 넘겨줄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이도다완'을 깨고 자살로서 생을 마감했다.
조선 실학자 정약용은 차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다산(茶山)이라는 그의 호에서도 보이듯이 그는 평생 차를 사랑하고 차를 즐기는 삶을 살았다. 유배생활 초기에 고성사의 스님한테서 우전차를 얻어 마신 뒤부터 차에 매료된 그는 귀양 사는 동안에도 승려 아암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즐겨 마셨다고 알려진 차는 우리에겐 생소한 떡차이다. 떡차는 익힌 찻잎을 찧어서 떡처럼 만든 덩어리를 우려 마시는 차인데, 다산이 이 차를 만드는 방법을 제자에게 설명하는 편지도 있다.
홍차의 나라라고 불리는 영국에서는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이 홍차를 사랑했다. 그들의 한 손에 펜이 들려 있었다면 다른 한 손에는 홍차 한 잔이 들려 있었을 것이다. '오만과 편견', '이성과 지성' 등으로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문인인 제인 오스틴의 또 다른 직업은 티 소믈리에였다고 한다. 그는 홍차에 대한 사랑이 대단해 스스로 홍차를 구입하고 관리하고, 집안 식구들과 손님에게 차를 내놓는 일이 도맡아 했다. 차와 함께한 생활은 그의 작품에도 반영됐는데 대표작 '오만과 편견', '이성과 지성', '엠마' 등에서 주인공의 대사로 차 마시는 일의 중요성이 언급되며, 차 마시는 장면이 자주 그리고 상세하게 묘사된다. 당시 차를 마시면서 사교와 토론이 이뤄졌던 영국 사회에서 제인 오스틴은 차를 마시면서 작품의 소재를 얻었을 것이다. 그가 당시에 주로 마셨던 차 브랜드는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는 대표적 영국 홍차 브랜드인 '트와이닝스', 즐겨 찾았던 다구와 찻잔 브랜드는 '웨지우드'이다.
'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은 밀크티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1946년 '이브닝 스탠더드(Evening Standard)'에 발표한 '한 잔의 맛있는 차(A nice cup of tea)'라는 짧은 수필에서 맛있는 밀크티를 만들기 위해 지켜야 할 11가지 조항을 설명했다. 이는 다수의 영국인에게 통하는 홍차의 정석이라기 보다는 조지 오웰 개인의 취향이었다. 특히 영국 사람들의 의견이 가장 분분했던 대목은 열번째 항목 '찻잔에는 차를 우유보다 먼저 따라야 한다'였다. 영국 사람들에게 밀크티를 마실 때 '홍차를 먼저 붓느냐, 우유를 먼저 붓느냐'는 현재 우리의 탕수육 소스를 찍어 먹느냐 부어 먹느냐만큼 취향의 기준이 되는 문제이다. 이를 두고 영국에서 수십개의 논문이 나올만큼 논쟁이 치열했는데 2015년 영국표준협회(BSI)는 우유를 먼저 넣는 것이 1901년부터 전세계 회사들을 위해 마련된 표준 지침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의 문제이므로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은 홍차를 먼저 넣는 것이 좋으며, 설탕은 넣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법정스님의 삶 속에서도 다향(茶香)이 은은하게 퍼져있다. 스님은 주로 녹차, 그 중에서도 다산처럼 우전차를 즐겼는데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글을 보면 스님의 녹차에 대한 사랑과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스님은 차 마시는 일이 결코 사치나 귀족 취미가 아니고 생활의 일부라고 밝히며 차는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정신을 맑게 한다고 했다. 일생 '무소유' 정신을 얘기해온 스님이지만 차의 은은한 향취와 맑은 빛깔과 미묘한 맛의 차이를 제대로 느끼려면 알려면 다구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할 정도 차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차의 종주국 중국의 주석답게 시진핑은 정치와 외교 순간마다 차를 주고 받았다. 지난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호남성의 안화흑차(安化黑茶)를 선물했다.
커피 메뉴와 문화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최근 카페에서는 다양한 차 메뉴를 내놓기 시작했다. 차 본연의 맛을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과일과 향신료를 첨가해 색다른 방법으로 마실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이다. 차를 주문하기 전, 차에 대한 짧은 지식을 가진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려는 차가 블렌디드 티인지, 언제 수확한 찻잎으로 만든 것인지 알아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조선일보 : 2017.07.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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