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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의 위대한 애국자, 쾌남아 장학량 (하)

풍월 사선암 2016. 5. 10. 07:44

동북의 위대한 애국자, 쾌남아 장학량 (하)

 

50년의 감금생활이 시작되다

 

장학량은 19361212일 서안사변을 일으키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중지시키고 자신은 장개석을 모시고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에 의해 연금이 된다. 항일전 촉구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하극상을 저질렀다고 주장한 장학량은 국공 양측의 협상이 매듭을 짓자, 스스로 죄를 청하기 위해 장개석과 함께 남경으로 간다.

 

서안에서 남경으로 가는 도중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서안으로 돌아가라! 남경 사람들은 너를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장학량은 남경에 온 후에도 기강을 바로 잡고 미래를 위한 경종을 울려 국가를 이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에 대한 법의 응징을 요구한다. 결국 특별군사법정에서 10년 징역과 5년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고 얼마 후에 장개석의 사면령에 의해 징역형은 면제된다.

 

그러나 이후 장학량은 약 50년의 가택연금에 들아간다. 1938년 장학량을 특별 사면할 당시 장개석은 장학량이 동북군을 거느리고 공산당에게 넘어갈 것 같아서 그를 석방하지 않았고, 타이완에 간 후에도 그가 제3국을 통해 대륙에 귀순할까 봐 석방하지 않았다. 장학량의 석방설은 장개석 부자가 모두 사망한 후, 장학량의 나이 90세가 되어서야 나왔다. 타이완에 있던 동북사람들이 제안하고 당시 유명인사 90명이 서명했다. 타이완 당국이 장학량의 명예를 회복해 주려고 의도적으로 꾸몄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장학량은 91세가 되던 해, 1991년에야 비로소 자유를 회복했다.

 

19361212일 이전에 장학량은 반민족적인 인물인 만주군벌 장작림(장 쭈오린)의 아들이며, 한때는 마약중독자요 바람둥이로, 더욱이 일본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근거지 만주를 포기한 부저항(不抵抗) 장군이라는 오명을 받기도 하였으나, 서안사변과 남경행의 결단으로 이제까지의 오명을 일순 털어버릴 수 있었다. 사실 장학량이 일본군에게 적극 대항하지 않은 것은 장개석의 지시때문이었다.

 

일본군과의 충동을 피하라는 장개석의 비밀지시

 

장학량이 남경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장학량의 처지가 절망적이라 생각하고 장개석의 성격으로 보아 분명 장학량을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뜻밖에도 그를 평생 동안 연금하도록 할 뿐이어서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장학량 측근의 수행비서의 말에 따르면 그의 부인 우봉지(于鳳至)의 비밀 전보 한 통이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라고 하였다.

 

원래 9.18 전야 (1931), 장학량은 일본 관동군이 동북에서 침략 전쟁을 강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고 즉시 장개석에게 어찌 처리할 것인지를 물었다.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답전을 보내 분명히 지시하길 일본군대가 차후에 동북에서 어떠한 도발을 일으킬지라도 우리 측은 저항할 수 없으니 충돌을 피하도록 하게. 우리 형제가 순간적인 분노에 휘말려 국가 민족을 내버려 두고 돌보지 않아선 안 되네.”라고 회신하였다.

 

98일 일본 관동군이 심양을 침략하고 북대영을 포격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졌다. 장학량은 당시 북평(北平)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후, 재차 급전을 보내 장개석에게 알렸지만 국민정부군사위원회에게서 되돌아온 답변은 장학량은 지금 심양에 주둔하고 있는 동북군 장군 왕이철(王以哲), 영진(榮臻)등에게 절대 일본에 대항하지 않도록 엄중히 타이르고 만약 위반하는 자는 군법으로써 다스리라. 아울러 요녕(遼寧)에 주둔한 육공군은 계속 후퇴하고 일본군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라. ‘심양(沈陽)사건은 중앙의 처리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장개석도 비밀리에 장학량에게 전보를 보내길 심양에서 일본군이 행동한 것은 지방의 한 사건으로 간주하고 최대한 충돌을 피하여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막게. 일체의 대일 교섭은 중앙의 처리를 기다리도록 하게라는 내용이었다.

 

장학량은 반격 준비를 하던 군대를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그 후, 일본군의 침공이 있을 때 마다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알려 지시를 받고자 하였지만 늘 대항하지 말라는 전문만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강산이 함락되는 것만을 묵묵히 지켜본 채 군대를 관내로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반년도 지나지 않아 동북 3성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였고 장학량은 맞서 싸우지 않는 장군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아야 했다.

 

장학량의 아내 우봉지(于鳳至)는 떠나기 전 일부러 장개석의 전문을 장학량에게 몸에 지니고 가라고 하였다. 런던에 도착한 후 그는 이 전문을 런던 HSBC은행의 금고에 보관하였다. 그들은 장개석의 변덕스런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이것으로 추후 장개석과 대치상황이 올 때 맞설 증거물로 보관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이 세운 만주국

 

일본은 본격적인 만주 침략을 위해 일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중심으로 <만몽영유계획>이 모의되었다.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31918일 밤 1030분경 류탸오거우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학량군대의 소행으로 몰아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관동군은 대공황으로 구미열강들의 간섭이 어려운 사정을 이용하고 장학량이 베이징에, 또한 봉천 군벌의 주력이 장성선 이남에 집결하고 있어 잔류 수비대가 동삼성에 분산되었던 기회를 포착해 1931918일 만주 침략작전을 시작하여 5일 만에 랴오둥, 지린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당초 만주 몽고 지방을 영유하려고 계획했던 일본 관동군은 만주 지배방식을 괴뢰국가 수립으로 변경하여, 193110<만몽공화국 통치대강안>을 세워 통치방침 · 정부조직을 결정하고 각지의 군벌과 군인에게 지역적인 독립정권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11월에는 톈진에 망명중이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탈출시켜 만주국의 황제로 삼을 준비를 진행해나갔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 경제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맡았다. 만주국에 관동군이 본격적으로 주둔함으로써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발하게 조선의 독립운동을 펼치던 독립군 세력들은 패퇴하기 시작하여 러시아로 밀려났다. 만주국은 일본의 꼭두각시 나라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5815, 조선의 독립과 일본의 항복으로 결국 만주국은 국민당의 중화민국에 접수된다.

 

동북을 얻는자가 중국을 얻는다 - 동북을 쟁취하라

 

1945년 일본군이 패퇴하여 물러나자 동북을 두고 공산당과 국민당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된다. 1945 년 일본 패망이후 國共은 전략적 요충지로 매우 중요한 동북을 반드시 장악해야만 하는 지역으로 보고 그들의 운명을 걸었다. “동북이 없으면 중국은 없다라고 할 정도로 동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동북의 방위가 무너지면 중국 내부가 위협을 받기 때문에, 동북은 일종의 전략적인 보루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망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국민당은 교육과 행정, 당무 3가지 계통에서 동북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의 동북접수는 서남지역에 있는 국민당군을 바로 이동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소련이 이미 동북을 점령한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행정적으로 군사적으로 동북을 접수할 계획을 세우기는 하지만 먼저 외교적인 동북접수 방향에 주력하였다.

 

만주국통치하에서 비밀리에 항일활동을 했던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여 동북접수를 목적으로 세웠던 국민당의 각종 기관 이외에도 靑年團, 軍統, 中統 등 각기 서로 다른 국민당 파벌이 동북접수에 노력하였지만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각 기관의 구성원이 복잡하였고 대립적인 파벌 때문에 활동 방향이 일치되지 않아 역량이 분산되었다. 서로간에 반목과 마찰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동북을 접수한 이후의 상황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비판이 국민당 내부에서부터 쏟아졌다.

 

공산당의 승리로 막을 내리다

 

공산당은 군대의 외형에서는 국민당에 크게 밀렸으나 심리적인 면에서 국민당보다는 유리한 상황에 놓였다. 먼저 일본의 집요한 탄압과 치안숙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동북에서 항일투쟁을 주도한 세력이 공산당과 관련 있었다. 또 공산당 내부에는 동북출신 간부들이 많아서 동북상황에 밝았고, 동북에서 항일 근거지를 창건한 경험 등이 풍부하였다. 소련으로 철수했던 항일연군 약 330여명이 소련군과 함께 동북에 들어와 주요 도시에서 활약하였다.

 

19461217일에서 194743일까지의 三下江南, 四保臨江전역후에 동북지역의 전세는 근본적으로 변화가 생겼다. 공산당은 방어에서 공격의 형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19475월 동북에서 대대적인 공산당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각 근거지를 중심으로 여름가을겨울의 3차례 공세를 펼침으로써, 전략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1947년 가을이후부터 공산군의 전면공세로 인하여 국민당군이 열세로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말이 되자 공산당은 화북과 동북사이의 철도연변에 막강한 힘을 집중시켜 그 교통망을 끊임없이 교란하기 시작했고, 심양이남의 동북철도도 연말부터 개시된 작전으로 그 이북과 완전 차단되었다. 동북의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게 된 국민당은 물자보급과 병력보충 문제에서 심각한 상태에 빠졌고, 교통통신망도 두절되어 고립분단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국민당의 지배지역은 심양,장춘,금주 세 개 도시에 한정되었고, 실질적인 지배면적은 3%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에 모택동이 지시한 요심(遼瀋)전쟁은 국공내전에서의 승리를 가져다 주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48 년 봄에 임표군이 동북에서 7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취하였고, 국민당군은 이를 당해내지 못하고 2월에 요양과 영구를 차례로 상실하였고 결국 10월에 금주장춘이 공산당군에게 점령당하였다. 많은 국민당군이 포로가 되었고 군수물자를 상실함으로써, 11월에는 동북이 완전이 공산당에게 장악되었다.

 

승리의 중요한 원인- 장학량의 그림자

 

동북에서 공산당이 요심(遼瀋)전쟁에서의 승리한 것은 오랜기간 동안 국민당 우세와 공산당 열세라는 구도를 뒤바꾸어 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상당히 자신감을 갖고 계속해서 국민당과의 결전을 결심 할 수 있게 되었다. 동북에서의 내전은 공산당이 국민당의 정예부대와 싸워서 이긴 것이기 때문에 중국 전역의 힘의 균형을 깨는 중요한 일전이었다. 또한 공산당의 동북 장악은 든든한 후방기지를 확보한 것이어서 공산당이 관내에서 국민당과의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동북장악은 단순히 군사적인 승리만은 아니었다. 공산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외교 등 여러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지만 특히 공산당의 민심장악과 안정된 근거지 확보를 통한 후방지원이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동북지역 사람들의 지역감정을 고려하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장개석은 동북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이 크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동북지역을 불신임하였다. 1946년 소련이 철수할 때에도 장개석은 여전히 동북군을 의심하여 동북군이 동북을 접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장학량의 영향력을 무시함으로써 동북지역 사람들의 국민정부에 대한 반감이 거세었기 때문에, 국민당은 자신이 통제하고 있던 동북지역 내에서 군사뿐만 아니라 교육에 이르는 모든 방면에서 무능과 책임감 결여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국민당의 약점을 잘 이용한 것이 공산당이었다. 그들은 가능하면 현지의 인재와 관리요원을 사용하려 하였다. 동북군에 남아있던 많은 부대들은 장학량의 동생인 장사학(張學思)과 같이 공산당 부대에 합류하였다. 장학사는 요녕성 성장과 동북행정위원회라는 동북공산당 통치구 최고 행정기구의 부주석을 맡기도 하였다. 1945811일 주덕 총사령과 함께 동북으로 진격했던 간부들은 대부분 요녕성 출신이었다. 말하자면 공산당은 장학량의 동북군을 포용함으로써 불리한 여건에서도 동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일구어낼 수 있었다.

 

장학량의 최후

 

대만에 50년동안 감금되었던 장학량은 199061일 생일을 기해 연금이 풀어졌다. 19931215일 고령임을 감안해 44년만에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가도록 허용되어, 1995년부터 하와이미국에 정착하자 중국대륙은 장학량의 후손들과 옛 부하들을 통해 대륙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지만 장학량은 끝내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묘소도 찾아보고 고향도 보고 싶다면서도 사망할 때까지 그는 대륙과 타이완 땅을 다시는 밟지 않았다.

 

당시 고령이었고, 부인이 병환 중인 것도 이유였지만 이 때 장학량은 스스로 자기를 한운야학(閑雲野鶴)라고 불렀다. 뜻인즉 하늘에 한가히 떠도는 구름과 들에서 노니는 학으로 양안(대륙과 타이완)의 시비를 멀리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부인은 2000622일에 88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장학량은 그로부터 1년 후인 20011015일에 10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학량과 자오쓰는 미국 하와이에 합장되었다.

 

장학량에 대하여 공산당은 천고의 공신”, 국민당은 역사의 죄인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서안사변이 아니었어도 공산당의 세력이 다시 확대될 수 있었겠지만 역사학자들은 서안사변으로 공산당이 상당한 혜택을 보았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역사적인 평가야 어떻든, 대륙 관광객의 타이완 여행이 개방된 현재 타이완은 보다 많은 대륙의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장학량이 구금되었던 여러 곳의 유배지를 손보기에 여념이 없다. 장학량은 이제 대륙과 대만 모두의 영웅이 된 것이다. ()

 

Binnamoo Studio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