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의 위대한 애국자, 쾌남아 장학량 (중)
홍군의 장정(長征)
장개석에게 밀려 광동정부(국민정부)에서 떨어져 나온 공산당은 여러 지역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국민정부는 일본의 만주 침략에도 불구하고 초공(剿共)작전을 전개하여 공산당의 중심이 서금(瑞金)을 포위 공격한다.
이에 공산당이 1934년 서금을 버리고 섬서성 연안으로 쫓겨간 것을 장정이라고 한다. 이들은 18개의 험준한 산맥을 넘고 강을 17개나 건너야 했으며 하루에 80~90 킬로미터씩 모두 1만 2천 킬로미터를 행군하여 1935년 10월에 섬서 북쪽의 오기진에 도착함으로써 공산당은 연안시대를 열게 된다.
장학량과 장개석의 인연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 봉천(奉天) 류타오거우(柳條海) 사건을 일으켜 일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의 주도하에 폭파조작을 하여 당시 동북군벌의 수장인 장작림을 거세시키고, 그 행위를 중국의 장학량에 뒤집어 씌워 만주로 침공한다. 일본 관동군은 1932년 1월에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이용하여 3월 1일에 만주국을 세운다. 이에 장작림의 큰아들인 장학량은 동북군의 깃발을 당시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던 장개석 국민정부의 깃발로 바꾸어 달면서 장개석의 휘하에 들어간다. 그 사건이 바로 유명한 동북역치(東北易幟) 이다.
둘의 사이는 처음에는 아주 좋았으나 장학량이 북경에 직계군을 이끌고 주둔하는 동안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학량이 선양과 동북의 기반을 잃은후 서북으로 이동하면서부터 서로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만주사변으로 근거지에서 쫓겨난 장학량은 만주를 회복하기 위해 항일전에 나서고자 했으나 장개석은 ‘먼저 내부를 안정시킨 뒤 외세와 싸운다’는 전략 방침에 따라 장학량에게 공산군 토벌에 나설 것을 압박했다. 만주 출신으로 구성된 동북군은 장제스의 이 같은 전략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공산당정부의 홍군과의 전투를 치루면서 동북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2개사단이 전멸한다. 이 상황에서 장개석은 나몰라라 했고 보급부족으로 동북군의 생활마저 어려워지면서 부하들이 홍군편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장학량 주은래의 푸스비밀회담
장학량은 몇차례나 장개석에게 내전중지와 정치범 석방을 건의하였으나 장개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던 동북군 중에는 일부가 세뇌를 당하고 돌아와 장학량에게 내전중지와 항일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장학량도 중공과 접촉하면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급기야 장학량은 1936년 4월 9일 푸스에 있는 천주교성당에서 주은래와 비밀회담을 갖고 내전을 종식시키고 항일전쟁에 협력하자는 비밀합의를 하기에 이른다.
장학량은 이 회담에서 자신의 재량이 미칠 수 있는 한에서는 공산군의 출로를 열어줄 수 있지만 기타 대부대의 이동을 허용하는 문제는 장개석(蔣介石)의 중앙군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밝혔다. 장학량은 주은래에게 장개석이 일본에 항복한다면 그를 떠나겠지만 현재 상황은 장개석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공산군 점령지구로 진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회담 후 공산당은 동북군공작위원회를 설립하고 저우언라이와 함께 회담에 참석했던 리커눙(李克農)을 장학량 사령부에 파견하였다.
서안사변 (중국의 12.12 사태)
항일(抗日)하자는 국내여론에도 불구하고 초공(剿共)작전에만 진력하던 장개석은 마지막 작전을 독려키 위해 1036년 12월 12일 서안에 왔다. 이때 동북군의 장학량과 서북군 양호성이 장개석을 감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동안 중국의 재야 지식인과 학생들은 국민정부의 초공작전에 반대하면서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항일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먼저 내치의 안정(先安內)을 주장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1936년 서안사변때 장학량은 12월 12일 이른 새벽, 군대를 화청지로 몰고와 총격전을 벌이며 장개석의 5칸방에 들이닥쳤다. 전날 밤, 장학량은 휘하의 동북군과 양호성의 서북군의 합동참모 회의를 소집한다. 심야회의에서 양군의 17만 병력은 그들의 최고 사령관을 감금하여, 내전을 종식하고 항일전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켜 주도록 호소하기로 결정한다. 습격을 받은 장개석은 깜짝 놀라 화청지 바로 뒤의 험준한 리산을 300여 미터를 올라 겨우 혼자 숨을 수 있는 바위틈에 숨는다. 하지만 장개석은 장학량이 거느린 수색조에게 몇 시간 만에 붙잡힌다. 죽을 것을 예상하고 몰래 유서를 쓴 장개석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장학량의 요구, 즉 공산당과의 싸움을 중지하고 모택동과 손잡고 일본군을 먼저 물리친다는 소위 국공합작에 서명하는 역사적인 결단을 내려야만했다.
서안에서의 하극상 소식을 전해 들은 장개석의 남경진영은 곧 대책마련에 들어간다. 즉각 장학량을 토벌하자는 강경론과 대화로써 해결하자는 온건론이 오간 끝에, 후자 쪽으로 일단 의견을 모으고 협상을 장개석의 처인 송미령(宋美齡)이 담당하였다. 시안을 폭격하려는 남경정부의 결정을 보류시킨 송미령은 1936년 12월 22일 시안에 도착했다. 비행장에 나온 장학량을 보는 순간 난징에서부터 굳어 있던 송미령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녀는 장개석을 대신해 장학량과 연안에서 급파된 주은래와 협상했다. 24일, 장개석은 주은래에게 간단한 한마디를 던졌다. "더 이상 내전은 없다." 이로써 저 유명한 서안사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정부의 개조와 정치범의 석방, 초공작전 중지 등 구체적인 합의사항 여섯가지가 있었지만, 국공이 합작하여 항일 통일전선을 펼친다는 취지의 합의는 어떠한 조문이나 문서로써 명시화되지는 않았다. 이른바 장개석의 인격을 담보로 양측의 담판은 끝을 맺고 서안사변은 평화적으로 해결된다. 장개석 가족은 12월 25일 서안을 출발하여 남경으로 돌아왔다. 성탄절에 장제스를 석방한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송미령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남편을 석방해달라는 청을 장학량이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장개석이 서안에서 살아 돌아간 이유는 장학량의 의리와 함께 당시 항일을 위해서는 장개석이 필요하다는 스탈린의 판단도 적지않게 작용하였다. 이로써 공산당은 장정 이후 존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중국인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이후 본격적인 세력을 확대하고 결국 장개석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최대의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기나긴 대만 감금생활의 시작
장학량은 서안에 남아서 자신과 함께 일을 하자는 주은래의 권유를 뿌리치고 장개석을 보호하면서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남경으로 떠난다. 장학량이 떠났다는 소식을 나중에야 들은 주은래는 공항에서 장학량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뿌린다. 주은래는 이후 대만과의 회의 자리에서 장학량의 안부를 물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주은래는 장학량을 인간적으로 무척 신뢰하고 좋아하였다.
이후 세기의 풍운아 장학량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하극상을 일으킨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어떤한 처벌도 감수할 것을 결심한 장학량은 장개석을 모시고 난징으로 간 후, 54년의 기나긴 연금과 10년에 걸친 미국 은둔생활을 시작하는 긴 여정에 들어간다. 장학량과 장개석의 인연은 참으로 질기고 기구하였다. 두 사람의 인연의 부침이 현대 중국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틀러총통만큼 의심병이 많은 장개석이 장학량을 상당히 신뢰했던 것은 틀림없으며 그의 회고록에서는 장학량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라는 말도 나온다. 이때문에 아들인 장경국이 장학량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홍군을 미워했던 장개석의 마음을 몰랐던 장학량이 서안사변을 일으키자 엄청난 배신을 느꼈고 일생동안 장학량을 감금시키고 끝까지 미워했다.
남경으로 간 장학량이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자 동북군은 구심점을 잃고 거의 해체되어 일부는 만주국에, 일부는 홍군편에, 일부는 국민당군에 서서 싸우게 되지만 20년대 최강의 세력을 자랑했던 동북군은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 Binnamoo Studio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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