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시안]중국 공산당 기사회생한 ‘시안사변.’
시내에 총성이 울려 퍼지던 새벽, 시안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화청지(華淸池)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화청지의 오간청(五間廳)에 묵고 있던 장제스에게 새벽의 총성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그는 얼른 뒤쪽 산으로 도망쳤다.
1936년 시안에 좀 특별한 치과병원이 문을 열었다. 병원장은 베를린대학 출신의 치의학 박사 윈치 히버트(Winch Hiebert). 유대계 독일인이자 독일 공산당원인 그는 일찍이 반파시스트 운동에 참가했다가 독일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추방당했다. 1936년 그는 ‘중국의 소리(The Voice of China)’ 창간인인 매니 그래니치의 권유로 중국 상하이로 오게 된다. 상하이에는 중국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외국인이 꽤 많았다. 이곳에서 히버트는 치과를 운영하면서 뜻이 통하는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당시 중국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아그네스 스메들리, 에드가 스노, 조지 하드무, 루이 엘리, 한스 시페 등이 바로 그들이다.
외국인 의사 치과병원이 공산당 아지트
히버트가 상하이에 정착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그네스 스메들리(미국 출신의 여성 혁명가이자 저널리스트)가 어떤 남자를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 남자는 히버트에게 시안에 치과병원을 열라고 제안했다. 결국 두 사람은 병원을 차릴 적당한 곳을 찾아 시안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게 된다. 마침내 맘에 쏙 드는 장소가 나타났다. 바로 칠현장(七賢莊). 임대료가 비쌌지만 남자는 선뜻 계약했고, 히버트는 ‘독일 치의학 박사 펑하이보(馮海伯, 히버트의 중국 이름) 치과’라는 간판을 내걸고 개업하게 된다. 히버트에게 병원을 열도록 한 남자는 류딩(劉鼎), 그는 저우언라이(周恩來)로부터 시안에 비밀 아지트를 마련하라는 지령을 받은 터였다. 당시 섬북(陝北)에 있던 중국공산당 홍군(紅軍)에게는 의약품, 의료기계, 통신기자재 등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물자들을 공급해줄 거점을 시안에 마련하는 게 바로 류딩의 임무였다. 이 때문에 그가 굳이 병원을 차리고자 했던 것이다. 대량의 의약품이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병원보다 더 적합한 데가 어디 있겠는가.
◀팔로군 시안 판사처 기념관
이 일이 진행되던 1936년 공산당의 상황은 굉장히 심각했다.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가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 즉 내부의 공산당부터 먼저 평정한 뒤에 외적 일본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고수하면서 공산당 토벌에 전력투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안은 국민당의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서북군 총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류딩은 시안에 아지트를 마련해 순조롭게 운영했다. 이게 가능했던 건 류딩과 장쉐량 사이에 이미 교감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1936년 3월에 류딩은 공산당을 대표해 시안에서 장쉐량을 만났다. 류딩은 현 상황을 분석하며 항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장쉐량을 설득했다. 그리고 4월 9일 옌안에서 저우언라이와 장쉐량이 밤새워 논의한 끝에 홍군과 동북군은 정전에 합의하고 함께 일본에 맞서기로 약속한다. 이 회담 이후 공산당은 류딩을 주(駐)동북군 대표로 시안에 파견했다.
류딩은 공산당의 방송통신 업무도 책임지고 있었다. 칠현장에 있는 히버트의 치과가 역시 그 아지트였다. 치과 지하의 아지트에서 낮에는 중국공산당의 ‘홍중사(紅中社, 신화통신사의 전신)’에서 보내오는 소식을 수신하고 심야가 되면 이를 외부로 내보냈다. 공산당의 물자보급과 방송통신 업무를 위한 아지트 역할을 하던 치과에서 히버트는 치과 진료를 하며 지냈다. 그는 장쉐량의 치과 주치의였고, 국민당 동북군과 서북군의 장병들도 이곳에 와서 진료를 받았다. 히버트의 치과는 공산당과 국민당 동북군·서북군의 은밀한 동거 장소였던 셈이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도 끝자락이 되었을 때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스메들리와 에드가 스노였다. 이국땅에서의 동지애가 이들 세 사람의 가슴에 벅차올랐다. 그런데 얼마 뒤 한 사람은 영영 함께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그날 속으로 들어가 보자.
◀화청지의 오간청
1936년 운명의 12월 12일
1936년 12월 12일 이른 아침, 한바탕 총성이 시안 성내에 울려 퍼졌다. 놀라 잠에서 깬 히버트는 얼른 집에서 나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서경초대소(西京招待所). 서경초대소는 주로 국민당 정부 요원이 시안에 오면 묵는 곳이다. 이날 스메들리도 이곳에 있었다. 히버트는 소식통인 그녀를 통해 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이날 약속도 있던 차였다.
한편 스메들리 역시 새벽 공기를 가르는 총성을 듣고 큰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서경초대소에 있던 국민당 요원들은 무장 해제됐고, 여행객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큰 홀에 꼼짝없이 잡혀 있었다. 바로 이때 히버트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약속이 있다며 대문을 지키고 있던 사병을 물리치고 한사코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순간 사병이 그에게 발포했다. 히버트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과다출혈로 죽고 말았다. 시안에 온 지 불과 반년 만이었다. <해방일보>에서는 12월 19일부터 연속 사흘 동안 그의 부고를 실었다. 12월 21일 오전 10시 하늘에서 흰눈이 끊임없이 내릴 때 그는 시안 남쪽 교외에 안장됐다. 반파시스트주의자였던 그가 만약 독일에서 추방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유대인이었던 그가 이후 나치의 대학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추방당한 뒤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갔다면, 중국에 왔더라도 시안에 오지 않았다면, 시안에 왔더라도 12월 12일에 서경초대소로 가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자신의 삶을 복기(復棋)해서 어느 한 순간의 선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지점을 택할까?
우리의 삶도 역사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되돌리고픈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에게는 이날이야말로 바로 그런 순간일 것이다. 시안 시내에 총성이 울려 퍼지던 새벽, 시안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진 화청지(華淸池)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화청지의 오간청(五間廳)에 묵고 있던 장제스에게 새벽의 총성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그는 얼른 뒤쪽 산으로 도망쳤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그는 동북군 일부가 아닌 전체의 반란임을 깨달았다. 숨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급히 산을 내려오던 그는 그만 바위틈에 빠지고 만다.
이때 시안 성내를 지키고 있던 장쉐량은 여산(驪山) 일대를 샅샅이 수색해 장제스를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오간청에서 500m쯤 떨어진 바위에서 장제스를 찾아냈을 때 그의 몰골은 딱하기 짝이 없었다. 잠옷 차림에 얼굴은 추위와 공포로 창백하고 손은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맨발에 발까지 다친 그는 장쉐량의 부하에게 업힌 채 산을 내려갔다. 산 아래에는 그를 시안 성내로 데려가기 위한 호송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병간정
장제스가 숨어 있다가 잡힌 바위 근처에 이날의 일을 기념하기 위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의 이름은 병간정(兵諫亭). 무력으로 간언한다는 의미의 ‘병간’이란, 윗사람에게 무력을 행사해 반드시 요구사항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 병간을 일으킨 것일까? ‘선안내후양외’ 방침의 파기다. 보다 구체적 내용이 12월 12일 오전에 장쉐량과 양후청이 주축이 돼 발표한 ‘대(對)시국선언’에 담겨 있다. 동북이 함락되고 국권이 쇠약해지고 강토가 날로 줄어드는 상황, 그럼에도 장제스가 항일에 전력을 쏟지 않은 잘못,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게 됐다는 점 등을 밝힌 뒤 구체적으로 다음 8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난징정부를 개편해 모든 정파를 받아들여 함께 구국을 책임지도록 하라, 일체의 내전을 중지하라, 상하이에 체포돼 있는 애국 지도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 민중의 애국운동을 전면 허락하라, 인민의 집회·결사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라, 쑨원(孫文)의 유지를 확실히 이행하라, 구국 회의를 즉시 소집하라.
이날의 병간을 ‘시안사변’이라고 한다. 시안사변을 둘러싼 입장은 진영마다 제각각이었다. 일본에서는 장쉐량이 소련의 지지를 받아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려 한다고 분석했다. 한편 소련에서는 장쉐량이 난징정부를 위험에 빠뜨려 오히려 일본제국주의를 돕게 된 꼴이라고 분석했다. ‘대시국선언’의 요구사항을 맞닥뜨린 국민당 난징정부에서는 장쉐량을 ‘토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중국 내 대다수 언론매체 역시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었던 만큼 장쉐량을 질책하는 분위기였다.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서는 이때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난징정부는 서북의 모든 통신과 교통을 차단했고, 서북의 신문과 선전물이 죄다 소각됐다. 시안에서는 정부군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고 하루 종일 방송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해명하면서 서로 이성적으로 처신할 것을 호소하고 평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난징의 강력한 방송국의 교란 탓에 그들의 모든 말이 묻히고 말았다. 중국에서 모든 공공언론에 대한 독재정권의 가공할 위력이 여태껏 이토록 강력히 표현된 적이 없다.” 시안에서는 장쉐량을 지지하는 가두행진이 벌어지고, ‘대시국선언’의 요구사항이 성벽에 나붙고, 내전 중지와 항일을 촉구하는 선전 포스터가 걸렸지만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러한 지지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시안으로 간 저우언라이
정작 장쉐량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건 공산당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시안사변이 오롯이 항일의 입장에 서 있는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류샤오치(劉少奇)는 난징정부 내의 항일파와 중간파를 항일 전선으로 끌어내기 위해 난징정부와 대립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상황은 난징정부가 곧장 시안을 공격할 기세였다. 신속한 사태 수습을 위해 저우언라이가 시안으로 가게 됐다. 12월 15일 아침 바오안(保安, 지금의 즈단(志丹))에서 출발한 저우언라이가 시안에 도착한 건 17일 황혼 무렵. 쉬엄쉬엄 가도 하루면 충분하고도 남을 텐데 어찌된 일일까. 한시가 급한 일인 만큼 최대한 서둘렀음에도 그랬다. 저우언라이는 말을 타고 갔던 것이다. 그나마 17일 오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었기에 그날 저녁 무렵 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비행기는 장쉐량이 보낸 전용기다. 그렇다. 말과 전용기, 이는 당시 공산당과 국민당의 물적 역량의 차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장제스 한 명을 처리한다고 해서 공산당이 국민당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만약 시간을 더 지체하거나 장제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국민당의 공산당 공격이 더욱 고삐를 죄게 될 것이고, 내전이 격화되면 일본만 이득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 공산당의 우려였다. 공산당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 사태를 조속히 평화롭게 끝내야 했다. 저우언라이가 시안에 온 며칠 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도 비행기를 타고 시안으로 왔다. 그리고 12월 25일, 장제스는 비행기를 타고 시안을 떠나 이튿날 무사히 난징에 도착한다. 내전 중지를 구두로만 약속했을 뿐 그 어떤 합의문에도 서명하지 않은 채. 아무튼 시안사변을 계기로 공산당은 기사회생하게 된다.
시안사변 직전까지 공산당의 비밀 아지트였던 히버트의 치과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팔로군 시안 판사처(辦事處, 사무소) 기념관’이 있다. 시안사변 이후 비밀 아지트는 공식적으로 ‘홍군 연락처’가 됐다. 그리고 1937년에 7·7사변이 발발한 뒤 홍군이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편제되면서 ‘팔로군 시안 판사처’가 돼, 제2차 국공합작 기간(1937~1945) 동안 항일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면서 국공합작은 종말을 고하고, 본격적으로 국공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다음날인 9월 3일은 중국의 ‘항전승리기념일(중국인민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이다. 올해는 이 기념일이 70주년이 되는 해다. 9월 3일 오전에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는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70주년 대회’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이 각국의 정상들 앞에서 연설하게 된다. 만약 공산당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된 1936년 12월 12일의 시안사변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엔 국민당 총통이 서게 되었으리라. 궁금하다. 국민당이 중국을 차지했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반도는 지금 하나일까 아니면 여전히 분단 상태일까.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시안사변의 주인공 장쉐량은 무려 53년하고도 6개월 동안 연금 생활을 했다. 공산당에게 그는 “민족의 영웅, 천고의 공신”(저우언라이)이겠지만 국민당은 그를 ‘역사의 죄인’으로 평가한다. 아무튼 국민당은 그 죗값을 참으로 톡톡히 받아냈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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