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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악기행 서악 화산] 도교 제1 성지이자 발상지 華山 5개 봉우리 답파!

풍월 사선암 2016. 5. 5. 10:24

[중국 오악기행 | 서악 화산] 도교 제1 성지이자 발상지 華山 5개 봉우리 답파!

 

중화라는 말이 유래한 곳진시황릉 인근에 있어 많은 사람 찾아

 

기험천하제일산(奇險天下第一山)’, 서악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문구다. 중국 오악 중에서 가장 기이하고 험하며 천하제일의 명산이라는 의미다. 중국 속담에 西岳山之(서악화산지험)’도 있다. 비슷한 뜻이다. 청나라 위원(魏源)화산여립(山如立)’이라 했다. 마치 서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화산이 섰다는 의미는 기암절벽으로 가득하다는 의미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화산의 는 꽃을 상징한다. 실제로 꽃이 많아서 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뚝 솟은 바위들이 마치 꽃과 같아서 나타냈다. 이와 같이 험한 바위봉들이 꽃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화산의 가장 큰 특징이다. 풍수학자들은 화산의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뤄진 통바위산으로, 강력한 기()가 흘러나와 남성적 강인함을 느끼게 한다고 즐겨 찾는다. 산에 바위가 많은 형상이라기보다는 통바위산에 나무 몇 그루가 기이하게 자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화산 남봉 가는 길에 뒤돌아본 서봉은 웅장한 산세와 함께 절묘한 등산로에 절묘한 건물이 아슬아슬하게 건립돼 있다.

 

중국 역사에서 화산을 중심으로 주변 300리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거주지였다. 삼황오제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 제왕을 말하며, 이들로부터 중국역사가 시작됐다고 전한다. 3황은 복희씨, 신농씨, 여와씨를 말하며, 천황·지황·인황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삼황 가운데 여와씨는 여신이다. 복희씨는 사람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전수했으며, 신농씨는 농사법을, 여와씨는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5제는 황제헌원,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방훈, 제순중화를 말한다.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황제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삼황오제가 모두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화산이 중화민족의 뿌리라는 말이 그래서 탄생한 것이다.

 

오악은 고대 중국의 영토범위를 상징하지만 국경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고대 문명과 영토를 상정할 때 오악과 마찬가지로 주요 고려대상이 된 건 4갈래 강이었다. 바로 황허(황하), 창장(장강이라 하며, 양자강의 다른 이름), 화이허(흑룡강 또는 헤이룽강,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 치수이(기수)이다. 이를 사독(四瀆)이라 한다. 오악사독은 중국의 고대 산천강하를 대표하는 개념이다. 오악사독 가운데 화산이 고대 문명 발상지 황허강과 제일 가깝다. 뿐만 아니라 뤄허강(황하강의 지류인 洛河), 웨이허강(황하강의 지류인 渭河)이 황허강과 합류한다. 악과 독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 화산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마치 한반도의 한양이 조선의 도읍으로 정해질 때 풍수적으로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이 양()을 상징하는 이유와 비슷한 입지적 조건이다.

 

중화라는 말도 화산에서 나왔다. 삼국지의 조조는 중원을 지배하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中原者得天下)”고 했다. 그 중원의 중()과 화산의 화()가 합쳐져 지금의 중화(中華)’가 된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화산은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중원 천하를 통일한 황제는 반드시 화산에 오르거나 화산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고대 역사에서 56명의 황제가 화산을 순유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황제는 한 명도 없었다. 화강암 덩어리인 통바위산으로 된 화산을 오른다는 건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남봉에서 동봉 가는 중간쯤 화산에서 가장 험한 봉우리에 하기정이 있다. 마치 벼랑 위에 매달린 듯하다.

 

칼날 같은 암벽 능선 위로 등산로 조성

 

화산을 오르다 보면 양쪽으로 천길, 아니 만길 낭떠러지인 아슬아슬한 바위 능선 위에 등산로가 있다. 쳐다보고 있으면 신기할 뿐이다. 누가 그 길을 조성했으며, 누가 그 길로 갔을까. 쳐다만 봐도 현기증이 날 정도인데. 화산과 관련해서 예부터 전하는 말이 있다. ‘화산에는 오로지 한 길만 있다. 그 한 길도 절벽의 틈새나 능선 위 불과 1m도 채 안 되는 좁은 길로 조성돼 있다. 양쪽은 그냥 낭떠러지다. 그 길을 건너는 사람은 거의 곡예사 수준인 셈이다.

 

왜 그런 길이 조성됐는지, 산 위에 올라가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이는 도교와 관련 있는 듯했다. 남봉 입구에 남천문(南天門, 난텐먼)이 있다. 남천문 앞에 방이 하나 있는데, 총천일문(總天一門)이라 부른다. 동서남북 4곳의 하늘이라는 뜻으로, 한데 합쳐 총천일문이다. 이 문이 바로 텐제(天界)의 경계다. 도교 전문용어로 하늘과 인간세상의 분계선이라는 뜻이다. 이 텐제를 지나면 바로 천상의 세계로 연결된다. 중악을 소개할 때 항상 언급되는 말이 천지지중(天地之中)’이다. 하늘과 땅의 중심이자 중원이고 대륙의 중앙이라는 말이다. 반면 서악은 하늘로 통하는 문이 있는 산이다. 도교의 성지가 아닐 수 없는 이유다.

 

남봉 가는 길 옆에 있는 장공전도는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을 파서 좁은 길을 만들어 겨우 한두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 빨간색이다. 이것도 화산에서 나왔다. 화산 가는 길에 紫氣東來(자기동래)’라는 문구가 자주 눈에 띈다. ‘자줏빛 상서로운 기운이 동쪽에서 온다는 의미다. 이 말의 유래는 중국 고대 주나라 관리(함곡관) 윤희에서 비롯된다. 그는 천문역법에 매우 밝았다. 어느 날 그가 누각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니 동쪽에서 안개 같은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더니 서서히 서쪽으로 왔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나는 용과 같았다. 그는 동쪽에서 훌륭한 성인이 이쪽으로 올 것이라고 직감했다. 목욕재계하고 맞을 채비를 했다. 몇 달 뒤 과연 노자가 동쪽에서 푸른 소를 타고 왔다. 윤희가 마중 나가서 맞아 그의 가르침을 받들었다고 전한다.

 

옛날 천문 풍수학자들은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길흉의 징조를 예견했고, 후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자기동래라는 말로 상서로움을 나타냈다. 나아가 자주색이 상서러운 기운을 준다고 해서 중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로 굳어진 것이다. 지금도 어느 곳을 가든지 자줏빛은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중국인 나름대로 복()을 부르는 한 형태로 고착됐다.

 

중원의 역사를 대표하는 화산이 언제 서악으로 정착됐는지도 화산을 살펴보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중국 오악기행 두 번째 시리즈 중악 숭산에서 중국 유교 경전 <爾雅(이아)>에 전국시대(BC 4~3세기) 오행사상의 영향으로 오악의 개념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국가 봉선제는 한() 무제 들어서 시작했고, 한 선제가 확정됐다고 했다.

 

3 화산 서봉 가는 등산로가 칼날 같은 바위 능선 위로 아슬아슬하게 연결돼 있다. 4 화산 최고봉 남봉 옆에서 넘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는 앙천지 연못이 비석과 함께 있다.

 

여기서 잠시 중국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나라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뉜다. 전한은 수도가 장안(長安)이었고, 후한은 낙양이다. 전한은 BC 202~AD 9년이고, 후한은 25~220년으로 이어진다. 각각 15황제와 14황제가 중원을 통치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선제는 전한시대 황제였고, 전한의 수도는 장안(長安)이라는 사실이다. 장안은 지금의 서안이고, 낙양으로 천도했을 때 서쪽을 견고히 지키라는 의미로 서안(西安)으로 바꿨다. 문제는 화산이 서안의 동쪽, 낙양의 서쪽에 있다는 사실이다. 즉 화산이 서안과 낙양의 중앙에 있다.

 

서악 화산은 기본적으로 서쪽에 있어야 한다. 오악을 정할 때 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수도 간의 방위관계도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했다. 서안이 도읍일 때 오악을 정했다면 화산은 서안의 동쪽에 있는, 뿐만 아니라 오악이 모두 동쪽에 있게 되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다. 과연 서안이 도읍지로 있을 때 화산을 서악으로 지정했을까 하는 핵심적인 의문점이 남는다. 따라서 후한 시절 서기 100년 전후 어느 황제가 지정했던지, 아니면 전한 시절 한 선제가 오행사상과 더불어 오악을 지정했을 당시 서안 못지않게 낙양이 도읍지로서 기능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도교 동굴 72개와 도관 20여 곳 화산에 있어

 

마지막 관전 포인트는 도교의 승지(勝地)로서 볼 필요가 있다. 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동굴 72개와 교회와 사찰 같은 도교사원인 도관이 20여 개 있다. 특히 옥천원, 동도원, 진악궁 등은 도교의 중점 활동장소였다. 그래서 도교 발상지라 불린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화산과 관련된 도교의 신화와 전설만 해도 200여 편 된다고 한다. 전설 한 토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거령이라는 초능력자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황하 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던 화산을 손발로 뒤흔들어 두 동강을 내버렸다. 화산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황하가 흐르게 됐다고 한다. 믿거나말거나 같은 전설이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은 많다. 그중 거령벽산(巨靈劈山·거대한 산신령이 산을 쪼개다), 벽산구모(劈山救母·산을 갈라 어머니를 구하다), 취소인봉(吹蕭引鳳·퉁소를 불러 봉황을 불러오다) 등은 이와 관련된 전설을 담은 비슷한 장면을 화산에서 엿볼 수 있다. 바위에 글씨를 새긴 석각도 1,00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 외에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악산인 만큼 시공간을 초월해 날아다니는 무협소설의 주무대가 바로 화산이기도 하다. 무협소설 영웅문의 주무대다.

 

1 숭화산 통바위 화강암을 뚫고 케이블카를 연결시켜 운행한다.

 

이제 제대로 화산을 향해 올라가보자. 걸어서 올라갈 수는 없다. 1m도 채 안 되는 칼날능선 위를 수km 가야 하는 곡예사 수준의 담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엄청나게 걸리기 때문이다. 현지 가이드는 실제로 신년 일출을 보기 위해 밑에서부터 걸어서 동봉 조양대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14시간 걸렸다고 한다. 올라갈 수 있기는 한가보다. 그가 덧붙인 말이 있다.

 

다시는 걸어서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서봉 연화봉(蓮花峰)까지 가는 케이블카를 타고 남봉 낙안봉(落雁峰)을 거쳐 동봉(朝陽峰 혹은 朝陽臺)~중봉 옥녀봉(玉女峰)~북봉 운대봉(雲臺峰)을 밟은 뒤 북봉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기로 한다. 화산은 이 다섯 개 봉우리가 연꽃 모양으로 생겼다. 그중 가장 심하게 깎아지르고 바깥을 감싸고 있는 서봉을 연화봉이라 한다. 서봉 정상 앞에 있는 바위가 연꽃을 닮아 연화봉이라 했다고도 한다. 정상에서 다섯 봉우리를 트레킹하는 데 약 4시간 걸린다.

 

서봉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 화산으로 출발했다. 장엄한 중원 역사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설렌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화산 입구의 문 위에 天威咫尺(천위지척)’이 보인다. 하늘의 위엄이 눈앞에 있다는 의미쯤 되겠다. 바로 그 위에는 勅建(칙건)’이라 적혀 있다. 황제의 명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걸 수 있는 곳마다 자줏빛 리본이 묶여 있다. 문이나 줄이나 할 것 없이 온통 자줏빛이다.

 

2 도교 제1성지를 가리키는 듯 화산 곳곳에 동천복지란 석각이 있다. 3 화산 서봉 부벽석 앞에서 한 방문객이 칼을 들고 자신이 바위를 자른 양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케이블카 입구에 도착했다. 케이블카 총 길이는 4,211m, 높이차는 894m, 받침대는 28, 총 객실은 84, 객실 1개당 8명 탑승 등 1시간당 총 1,500명 수송가능하다고 안내하고 있다. 중국 당국에서 무려 5억 위안(한화 약 900억 원)을 투자해서 건립했다. 프랑스 푸마사에서 도입한 기기와 설계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강조한다.

 

케이블카를 탄 공중에서 바라본 화산은 정말 화강암 통바위 그 자체다. 우리의 인수봉 같은 바위들이 한두 개가 아닌 첩첩봉봉으로 에워싸고 있다. 거령이라는 신이 화산을 잘라 황하를 흐르게 했다는 말이 실감난다.

 

화산 전체가 하나의 통바위로 이뤄져

 

화산의 수십 개 봉우리는 모두 하나의 바위로 이뤄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0만 년 전에 화산지역에 암장이 침투했다. 지각 깊은 곳의 암장이 상승하면서 거대한 화강암체가 형성됐다. 2,000만 년 전에는 이 거대한 암석이 강렬한 지질 작용으로 지표 위로 그대로 노출했다. 화강암이 형성되고 융기되면서 3개의 절리 현상이 발생했다. 두 개는 수직절리, 하나는 수평절리로 이뤄졌다. 빠르게 융기되면서 3개의 절리는 칼처럼 두부 모양으로 잘라냈다. 그리고 화산(火山)이 상승하는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중력은 마치 예리한 도끼로 잘린 듯 네모난 화산 지형을 갖게 됐다. 현지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어쨌든 이 거대한 화산의 첩첩봉봉이 하나의 바위로 이뤄졌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4 화산 통바위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마치 연꽃 같다.

 

케이블카는 통바위 안으로 들어간다. 그 거대한 통바위를 뚫어 케이블카를 연결시켰다. 정말 거대 작업이다. 간혹 통바위 봉우리마다 동굴이 하나씩 보인다. 도교의 72개 동굴이 있다고 하더니 그 동굴 같다. 도저히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다. 너무 신기해서 기가 막힐 지경이다. 칼날 같은 능선 위로 난 등산로도 보인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저 길로 어떻게 사람이 지나간다는 말인지.

 

이윽고 서봉 아래 내려, 서봉 정상을 향해서 올라간다. 바위를 깎아 계단으로 길을 만들었다. 철 난간을 만들어 위험을 방지하고 있다. 철 난간에는 자줏빛 리본이 수없이 걸려 있다. 철 난간 밖으로는 까마득히 바닥이 안 보인다.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긴다.

 

암벽 석각들이 서서히 나온다. ‘人間天上(인간천상)’, ‘蓮華洞(연화동)’, ‘華頂靑松(화정청송)’, ‘蓮華世界(연화세계)’ 등 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臥薪嘗膽(와신상담)’ 글자도 보인다. 누군가 패전의 아픔을 이곳에서 삼켰다 말인가.

 

취운궁을 지나고 斧劈石(부벽석)’이 있다. 마치 도끼로 두 동강 낸 듯한 바위다. 많은 사람들이 도끼나 칼을 들고 자기가 바위를 두 동강 낸 듯 기념사진을 찍는다. 부벽석 옆에 전설 속의 벽산구모도 새겨져 있다.

 

이윽고 서봉 정상 연화봉(2,086.6m)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 비석을 에워싸고 있어 발 디딜 틈이 없다. 여기도 자줏빛 리본과 자물쇠가 부지기수로 걸려 있다. 석각도 예외 아니다. 발에 밟히는 게 석각이다. ‘天下壯觀(천하장관)’이란 글씨가 유달리 눈에 들어온다. 희뿌연 구름 때문에 시계는 좋지 않지만 확 트인 사방에 솟은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글자 그대로 장관이다.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듯한 봉우리에 정자 한 채가 우뚝 솟아 있다. 신기할 뿐이다.

 

서악 화산의 다섯봉우리

 

고사목 같은 노거수가 바위를 뚫고 올라와 수백 년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휜 가지에도 자줏빛 리본은 어김없이 걸려 있다. 자줏빛 리본 거는 것이 중국인들에게는 마치 신앙과 같아 보인다.

 

서봉에서 남봉으로 가는 길에 힐끗 서봉을 뒤돌아봤다. 정말 절묘한 등산로에, 절묘한 도관 위치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화산 가는 길은 조금 가파르다. 가는 중간 절벽에 장공전도(長空栓道)가 있다. 절벽 옆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다니게 만들었다. 딱 한 사람 가기도 좁은데 오고가는 사람이 옆으로 비켜서 지나친다. 아찔하다. 화산에 이런 전도가 몇 군데 있다.

 

서봉 가는 길은 조금 가파르지만 의외로 소나무와 잣나무 등 나무들이 많다. 남봉에도 예외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다. 더욱이 남봉은 화산 최정상이다. 정상 비석에는 2,154.9m를 표시한다. ‘화산극정이라고도 하며, 기러기들이 남방으로 날아가면서 자주 쉬어간다고 해서 일명 낙안봉(落雁峰)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한 시인은 이곳에서 하늘만 위에 있고 높이를 겨룰 수 있는 산이 없으며, 고개를 들면 태양이 가까이 있고, 고개를 숙이면 구름이 아래에 있다고 노래했다.

 

비석 바로 옆에 부산 금정산의 금샘 같은 바위 속 연못이 있다. 앙천지(仰天池)라고 한다. 음양조화를 이루기 위해 하늘에서 조성한 연못이라 전한다. 화산에는 특히 정상 바위 위에 연못이 실제로 많다. 앙천지는 위로는 천택(天澤)을 이어가고, 아래로는 지맥을 받들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홍수에도 넘치지 않는다고 한다. 앙천지 주변에는 태화봉두’, ‘목욕일월’, ‘등봉조극’, ‘수불천성등 석각들이 가득하다. 정상 기념사진 찍으려고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 사진 한 장 찍기도 한참 걸린다.

 

동봉 가는 길 중간쯤 남천문이 나온다. 천상의 세계로 연결된다는 바로 그 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역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천계에서 속계로 환속하고 있는 셈이다.

 

지나가는 길 저쪽에 하기정(下棋亭)이 벼랑 끝 봉우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곳에 정자를 지을 수 있단 말인지, 정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하기정 가는 길은 화산에서 가장 험한 길이다. 올라가려면 쇠밧줄을 잡고 발로는 구멍을 찾아야 한다. 언감생심 포기다. 마치 신선이 사는 정자 같다. 멀찌감치 바라만 보다 지나친다.

 

3,000년 땅속에 있던 병마용은 그 수만큼 표정도 다양하다.

 

동봉 조망대다. 화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2,096.2m. 널찍하니 일출을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신비로운 운해도 감상할 수 있다. 동봉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중봉이 있다. 그 중간쯤 운제(雲梯)’가 있다. 일명 구름사다리쯤 된다. 거의 수직으로 된 계단이다. 지금은 우회로 계단이 있지만 옛날엔 운제로 다녔다고 한다.

 

중봉 가기 전 중간쯤 인봉정(引鳳亭)이 있다. 봉황을 불러들였다는 운치 있는 정자다. 발걸음을 그대로 옮겨 옥녀사를 지나 곧바로 중봉 옥녀봉에 이른다. 전설에 따르면 춘추시기에 진목공 딸 농옥과 정랑 소사가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퉁소를 불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봉황이 날아들었다 한다. 그래서 용과 봉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됐다고 전한다. 옥녀봉의 유래다.

 

중봉에서 북봉 가는 길은 제법 길다. 창룡령을 지나 도룡묘, 왕모궁을 거쳐 일월애에서 천제(하늘계단)로 내려와 운대산장을 거쳐 북봉에 도착한다. 창룡령과 도룡묘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창룡령은 많은 산봉우리들이 연결된 칼 모양의 산마루로, 530개의 돌계단을 만들어 등산객들이 오르내린다. 고개가 짙은 회색이고, 꿈틀거리는 용과 같아 창룡령(蒼龍)이라 부르게 됐다. 옛날에는 돌계단이 없어 기다시피 올라갔다고 한다.

 

창룡령 입구에 도룡묘라는 도교사원이 있다. 창룡령은 산서성의 풍수에 용맥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오르려고 한다. 화산의 신성한 기운도 이곳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룡묘에 와서 향을 피우며, 일이 잘 되고 많은 재물이 들어오고 미래가 발전하며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이유다.

 

마지막 봉우리 북봉에 마침내 도착했다. 1,614.9m로 다른 봉우리에 비해 그리 높지 않지만 삼면이 모두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산세가 험하다. 위로는 구름이 덮여 있고, 아래로는 지맥을 통과해 홀로 우뚝 서있는 모습이 마치 운대와 비슷하다고 해서 운대봉(雲臺峰)이라 한다. 북봉에서는 바로 아래 북봉 케이블카로 연결된다. 5개 봉우리를 모두 둘러보면 12남짓 됐다.

 

도교 제1 성지 루관대를 아시나요?

 

노자 <도덕경> 설하고, 그의 흔적 곳곳에 남아

 

루관대(樓觀臺)는 노자가 <도덕경>을 설한 장소로 유명하다. 즉 중국 도가의 발원지이다. 루관대에 들어서면 도교천하제일지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온다.

 

종남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종남산은 도교 전진파의 발상지로, 도교 최고의 명산으로 꼽히며, 첫 번째 복지(福地). 종남산에는 1,000여 개의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으며, 루관대는 그 봉우리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루관대에는 윤희가 예를 갖춰 노자를 맞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이른바 동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오는 紫氣東來(자기동래)’. 노자는 루관대에서 도덕경을 설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노자는 도가의 창시자가 됐고, 윤희는 시진인(始眞人)으로, 종남산은 도교의 발상지가 됐다.

 

루관대에서 바라본 종남산 끝자락에 있는 노자상. 오른쪽 뾰족한 산봉우리에서 노자가 만병통치약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당나라 때는 종남산에 도교의 도관들이 즐비했다. 600년 전후해서 최대 규모의 도관을 세워 최고 번성일로를 달렸다고 전한다. 당나라는 도교가 국교였다. 하지만 청조에 이르러 대부분 폐허로 변했다. 지금 루관대는 최근에 복구한 건물들이다.

 

중국에 도교가 번성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도가를 도교로 발전시킨 장도릉의 손자가 삼국지의 조조와 사돈이 되면서 비롯됐다. 도교는 조조의 도움으로 장대한 발전을 한다. 장도릉의 도교를 오두미도라고 한다. 오두미도의 특징은 부적과 불공을 드리는 것이다. 사람이 병이 걸리면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부적을 주고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섞어 마시게 했다. 그런데 그게 영험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도교는 중국인들의 민간신앙같이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있다.

 

루관대에 들어서면 설경대라는 곳이 나온다. 그 앞에 상선지(上善池)라는 샘물이 있다. 1283년에 샘물이 발견될 당시 홍역이 심하게 돌았다. 루관대의 한 사람의 꿈에 한 도인이 나타나, 샘물을 마시면 질병이 낫는다고 했다. 그 샘물을 마신 사람은 실제 씻은 듯 나았다고 전한다.

 

설경대 북쪽으로 종성궁 유적지가 나온다. 유적지에 소나무 노거수 9그루가 있다. 그중 한 그루는 옛날 노자가 소의 고삐를 매두었던 소나무라고 해서 계우백(系牛柏)이라 하고, 다른 세 그루의 소나무는 모양이 마치 나래를 활짝 편 독수리와 같다고 해서 삼응백(三鷹柏)이라 붙어 있다.

 

루관대 최고의 보물은 노자의 <도덕경> 비석이다. 비석의 글자는 멀리서 보면 마치 꽃같이 보인다고 한다. <도덕경> 5,000자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루관대 입구에는 신라인으로 당나라에 유학 가서 신선이 된 김가이선인기념비도 있다. 비석 내용도 신라인 김가이가 당나라 유학 와서 도교를 공부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돼 있다.

 

탐방가이드

 

화산에 가려면 보통 서안으로 간다. 서안은 터키 이스탄불까지 이어지는 고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이기도 하다. 또한 진시황이 중원을 처음 통일하고 도읍을 정한 곳이다. 따라서 서안의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화산 답사의 필수코스로 포함된다.

 

낙양과 함께 중국 고대 왕조의 고도(古都)인 서안은 지금도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실제로 3,000년 전 국제도시였던 서안엔 장안에 가면 없는 게 없다고 동서양 문물이 넘쳐 났다. 이와 관련 우스갯소리가 전한다.

 

유물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이 한 농부의 개밥그릇이 매우 탐이 났다. 실제 그 개밥그릇은 아주 귀한 고대 유물이었다. 이 사람은 농부에게 비싼 값에 개를 사겠다고 하면 당연히 밥그릇 정도는 그냥 줄 줄 알았다.

 

비싼 값을 치르고 밥그릇도 달라고 하자, 농부가 하는 말이 그 개밥그릇 때문에 개를 몇 마리나 팔았는지 아느냐며 오히려 반문하더란다. 개밥그릇으로 사용할 만큼 유물이 많다는 얘기다.

 

3,000년 동안 잊혀졌던 서안이 새롭게 주목받는 것은 1974년 농부가 발견한 병마용 때문이다. 지금도 계속 개발되고 있다. 현지 가이드는 병마용을 파는 사람들은 평생직장이라고 말할 정도다.

 

서안은 강우량이 연 600정도밖에 안 된다. 대체로 메마르고 먼지가 많다. 더욱이 서쪽으로는 광활한 황사 발원지 사막이 중동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맑은 날이 별로 없고 항상 구름 낀 듯 흐리다.

 

서안에서 화산까지는 약 110. 버스로 2시간가량 걸린다. 매표소에서 서봉케이블카까지 셔틀버스로 약 50분 이동해서 서봉에 도착한다. 보통 서봉에서 볼거리가 가장 많은 북봉으로 바로 내려간다. 그러면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 북봉에서 케이블카로 하산하면 10분 정도 소요된다. 하루 코스로는 다섯 봉우리, 반나절 코스로는 북봉과 동봉을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