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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한탄하는 한국 청년에게 告함

풍월 사선암 2016. 2. 28. 08:23

흙수저 한탄하는 한국 청년에게

 

`베지밀 아버지`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

100세 고령 회장님의 인생 이야기

목욕탕 청소·복사하던 산골소년뜻 굽히지 않으니 길 열려

 

올해 100세를 맞은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은 시간의 힘을 이겨낸 사람이다. 여전히 눈빛은 세상을 향해 빛났고 정신은 맑았다. 요즘도 그는 돋보기로 영어를 공부하고 책을 읽는다. 연구소 개발 과제와 회사 매출 보고를 받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최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정 회장은 "좀 더 공부하고 싶은데 눈과 귀가 어두워져 마음만큼 따라가지 못한다"며 창밖 하늘을 쳐다봤다. 그는 책을 보다 어지러워지면 MBN 뉴스를 본다. 특히 정치와 사회 뉴스에 관심이 많다. 최악의 취업난 앞에서 '흙수저'를 한탄하는 젊은이들 뉴스를 접할 때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타고난 금수저나 흙수저는 없어요. 뜻을 세우고 굽히지 않으면 길이 생기고 소원이 이뤄집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기보다는 끊임없이 도전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해요. 지금 힘들어도 좌절하지 마세요."

 

정 명예회장은 "단 한 번 인생인데 흙수저라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인생이 짧다""많은 시련과 절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끝까지 실천하면 반드시 그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젊은 세대들에게 조언했다. 한 세기를 헤쳐 온 파란만장한 정 명예회장의 삶이 그 증거다.

 

황해도 은율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목욕탕 청소부와 모자가게 사환을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가난에 굴복하지 않았다. 15세에 평양 기성의학강습소에서 교재를 등사(복사)하는 사환일을 하면서 그 책을 공부했다. "하루 종일 3000장을 복사하면 손목이 시큰하고 어깨가 뻐근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교재를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지요."

 

의사고시에 도전한 그는 새벽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가 가장 먼저 도서관 책을 빌려 공부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엿으로 허기를 달래가며 파고든 결과, 1937619세에 의사검정고시 전 과목에 합격했다.

 

명동 성모병원 견습의사 시절 그의 인생 방향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생후 백일도 안 된 사내아기가 의식을 잃은 채 실려왔다. 온몸이 축 늘어진 채 묽은 녹색 변만 줄줄 나오는데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아무런 치료도 못 받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아기를 보면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마음의 빚에 짓눌려 살던 그는 43세이던 1960년 영국 런던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만학도 부담이었지만 아내와 6남매를 남겨두려니 발걸음이 더 무거웠다. 유학은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6개월 코스로 갔는데 영어가 서툴러 강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대로 돌아올 수 없어 6개월씩 연장하다보니 36개월이 흘렀다. 여전히 장기설사병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였다.

 

정재원 명예회장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소아 알레르기 질환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센터로 갔다. 도서관을 헤매던 중에 유당불내증 연구 논문을 발견했다. 유당불내증이란 우유 속의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인 락타아제를 선천적으로 갖지 못하는 병이다. 대장 속 세균이 소화하지 못한 유당을 먹고 이산화탄소와 수소 이원소 부산물을 만들어 창자 점막에 염증을 일으키고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다 영양실조로 죽게 된다. 그가 손도 못 쓴 채 떠나보낸 장기설사병 아이들 죽음의 원인이었다.

 

"엄마 젖이나 우유에 들어 있는 유당이 함유되지 않은 대용유액을 만들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지요. 우유 못지않게 단백질이 풍부한 대체 식품으로 콩을 찾았어요."

 

410개월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니 사채 빚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이닥터에게 병원을 맡겼지만 환자가 점점 줄어드는 바람에 아내가 그의 유학비와 6남매 교육비를 대느라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탈출구는 병원과 두유 개발밖에 없었다. 온 가족이 달려들어 쥐 실험까지 거친 결과 1967년 두유(베지밀)를 만들어 대박을 쳤다. 전국에서 몰려든 환자들이 더 많이 사기 위해 싸움까지 벌여 1973년 대량 생산이 가능한 신갈 공장을 준공하고 정식품을 설립했다.

 

"신갈공장을 짓는 4년 간 집과 병원을 담보 잡아 대출받고 사채까지 썼어요. 빚은 사람을 늙고 지치게 만들었어요. 아내와 내 얼굴은 늘 어두웠고 어디서 돈 구할까 하는 생각뿐이었죠."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이 서울 평창동 자택 거실에서 자신이 개발한 두유 베지밀을 마시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그렇게 힘든 여정을 거친 정식품은 지난해 매출액 1788억원을 올렸다. 국내 두유 업계 1(시장 점유율 48.6%) 자리를 확고하게 지킬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서아프리카, 중동 15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베지밀이 40년 이상 꾸준히 사랑받는 비결로 '정직''안전'을 꼽았다. "정식품 창업 이념은 '인류 건강에 이 몸 바치고저'입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정직''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지요. 큰돈을 벌려 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고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1985년 정식품 중앙연구소(연구원 30)를 설립해 연구개발비(연간 18억원)를 아낌없이 투자했다. 호주와 미국에서 받은 두유 발명 특허는 고집스럽게 살아온 그의 집념에 대한 인정서이기도 하다. 콩의 영양을 알리는 데 앞장서온 그는 지난해 건립된 경북 영주시 콩세계과학관에 2억원을 후원했다. 영주시와 콩연구회 학자들이 콩의 원산지가 한국이라는 것을 알리고, 콩의 가치를 전파하기 위해 세운 세계 최초 콩 테마 과학관이다.

 

"50년 넘게 콩과 인연을 맺고 아기들을 치유하고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되는 두유를 만들어왔어요.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콩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계속 지원할 겁니다."

 

정식품은 사업 다각화에 에너지를 분산하지 않고 베지밀 한길만을 고집해왔다. 그게 성장 한계의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무리한 확장의 덫에 빠지지 않고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두유에 열중했어요. 콩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종류 건강식품과 또 다른 식물성 영양까지 폭넓게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어요. 전문경영인들이 급변하는 시대에 맞춰 새로운 먹거리를 준비하고 있지요. 하지만 기본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항상 마음에 품어야 해요."

 

정식품의 창업 정신을 지키기 위해 공채로 입사해 20년 넘게 경영수업을 받아온 임원을 전문경영인으로 발탁해 회사 경영을 맡기고 있다. 대신 그는 콩 연구와 후학들을 위한 혜춘장학회 운영에 전념했다. 1984년 발족 후 지금까지 2330명이 장학금 수혜를 입었다.

 

요즘은 본인을 임상시험 대상으로 삼아 두유 효능을 검증하고 있다. 하루 세 팩씩 베지밀을 마시면서 매년 사진을 찍어 노화를 가늠한다. 유학 시절 식사 대신 설탕을 먹으면서 공부한 탓에 당뇨병이 생기고, 나이 들면서 찾아온 심근경색에 척추협착증, 하지정맥류까지 잘 이겨냈다. 나이에 비해 주름과 검버섯도 적은 편이다.

 

"베지밀 덕분에 콜레스테롤 관리가 잘되고 있어요. 백발이 흑채로 바뀌는 것도 같고. 매일 마시는데도 항상 똑같은 맛이고 부작용이 없지요."

 

그는 소원을 묻자 "성인들의 유당불내증 치료"라고 답했다. 미국 MIT 조사 결과 한국 성인 75%가 유당을 소화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한다. 정 명예회장은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이 우유를 마시면 자칫 큰 탈이 생길 수도 있다""종합건강검진 항목에 유당불내증을 꼭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여름 땡볕과 서리를 견디고 더욱 단단해진 콩처럼 모진 세월을 살아온 그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피란시절과 아내의 죽음을 꼽았다. 한국전쟁은 그가 일궈온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제주도까지 피란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니 병원과 집이 폐허였다. "모두 불타버린 자리에 풀만 무성했지요. 그때 심정이 제일 답답했어요. 조그만 2층집을 얻어 개업했는데 지금 정식품 본사 건물 자리예요."

 

2004년 그 역경을 같이 견뎌오던 아내(고 김금엽 여사)8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도 삶을 놓고 싶을 만큼 슬펐다. 정 명예회장은 결혼식 때 입었던 턱시도를 입고 하얀 면사포를 아내의 관에 넣어주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그 후 침실 정면 벽에 아내 영정을 걸어 놓고 매일 바라본다. 아내는 그의 첫사랑이었다.

 

정 명예회장이 22세에 가톨릭재단 혜성병원장으로 발령났을 때 수녀원에서 실습 나온 17세 견습 간호사였다. 3세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고아원에서 자란 가련한 여인이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니까 제 눈에 들어왔죠. 웃을 때 오목하니 들어가는 보조개가 참 예뻤죠. 하루는 뾰루지가 났길래 치료해주다가 저도 모르게 키스를 했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바짝 달라붙어 차츰 친해졌어요."

 

아내의 일본 대학 가정과 유학비를 댈 정도로 열애를 했다. 1942년 그 결실을 맺어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6남매를 낳아 기르며 60년 동안 해로했다.


매경 전지현,이승환 기자 / 입력 : 2016.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