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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國父) 논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功)7 과(過)3

풍월 사선암 2016. 2. 12. 23:15

[포커스]국부(國父) 논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7 ()3

| 김진 중앙일보 정치담당 논설위원


우남 이승만 대통령 photo 조선일보

 

지난 114일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은 4·19 묘소를 참배하면서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을 국부(國父)로 평가했다. 대표적인 진보파 사회학자가 대표적인 우파 지도자 이승만에게 그런 호칭을 바친 것이다. 비록 당 안팎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국부주장을 철회했지만 어쨌든 그의 언급으로 이승만 재평가 문제는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국부 호칭은 근대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헌신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도자에게 부여된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조지 워싱턴, 남미의 볼리바르, 중국의 쑨원, 인도의 간디, 터키의 케말 파샤 등이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이승만처럼 과오가 있는 이에게도 그런 호칭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구대상은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1881~1938)일 것이다. 케말 장군은 쿠데타와 개혁으로 술탄 봉건왕조를 무너뜨리고 근대국가 터키를 만들었다. 유명한 갈리폴리전투에서 영국을 물리쳤고,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의 공격으로부터 국가를 구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케말 파샤(Kemal Pasha·케말 지도자)라는 1차 호칭이 붙었다.


초대 대통령이 된 후 케말 파샤는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 언론검열을 실시하고 반항하는 신문을 폐간했다. 야당을 강제로 해산했으며, 소수민족 쿠르드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학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 의회는 그가 죽기 4년 전 아타튀르크(Ataturk·터키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그에게 헌상했다.


한국이 이승만에게 국부 호칭을 부여하기에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국부 이전에 그는 건국대통령이요, 초대대통령이다. 그런데도 광화문 광장에는 아직 그의 동상이 없다. 여전히 반대자들은 이상한 동영상을 만들어 그를 매도하기도 한다. 국부 호칭에 앞서 한국에 필요한 것은 그에 대한 재평가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공적 7개와 과오 3개가 있다고 본다.


공적은 그가 시대의 선각자라는 것이다. 그가 청년이었던 19세기 말은 세계적으로 문명의 전환기였다. 남북전쟁 내전을 끝낸 미국은 근대화 대국으로 치달았다. 유럽에는 공화정을 세우려는 시민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중국은 잠자고 있었지만 일본은 메이지유신(1864)을 끝내고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조선 왕자(양녕대군)16대손인 이승만은 구()체제에 머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천자문-사서오경-과거시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과거가 폐지되는 바람에 이승만은 신학문으로 노선을 바꾸어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단발(斷髮), 영어, 기독교를 접하면서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만났다. 개신교 선교사들로부터 자유·평등·민권의 근대 사상을 배운 것이다. ‘먼저 깨우친(先覺)’ 이승만은 스승 서재필 등과 함께 조선 민중을 깨우치려 했다. 신문을 만들고 단체를 조직했다. 고종에 대한 쿠데타 음모에 가담할 정도로 그는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많은 혁명가처럼 그도 감옥(59개월)을 겪었다.


공적②는 독립운동이다. 18~20세기 여러 나라에서 선각자들이 강대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조국이 독립한 후 이들은 근대화 건국의 지도자가 된다. 워싱턴·볼리바르·간디·케말처럼 국부로 불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독립운동은 국부가 되는 필수과목인 셈이다. 이들은 수많은 인류를 전근대의 피지배로부터 근대화 문명으로 인도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각자의 국경을 넘어 인류에 공헌한 이들이다. 한국에는 이승만이 있다.


이승만은 1904년 조선 정부의 반일(反日) 밀사로 미국으로 떠났고, 1945년 독립투쟁의 영웅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독립운동가로 미국-하와이-상하이-미국을 거치는 동안 많은 곡절이 있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상하이 임시정부 세력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총보다는 외교의 힘을 믿었다.


성공한 건국투쟁은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45~1948년의 해방공간은 권력과 이념투쟁의 정글이었다. 미 군정은 강력한 통치력을 고집하면서 민족 세력을 눌렀다. 박헌영의 남로당과 여운형의 좌익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밀어붙였다. 김구는 끝까지 남북합작에 매달렸다. 혼돈의 남한과 달리 북한에선 소련과 김일성이 찰떡 연대로 공산국가를 세우고 있었다.


다행히 남한엔 이승만이 있었다. 독립운동 세력의 최고지도자였던 것처럼 이승만은 해방공간에서도 국민의 최고지도자였다. 그에게는 혼란을 이겨낼 정치력과 의지가 있었다. 건국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구·여운형·장덕수·송진우 등 많은 지도자가 암살당했다. 그런데 암살의 저승사자는 이승만을 비껴갔다. ()이 대한민국에 선사한 행운이었다.


공적는 그가 미국식 자유민주·시장경제를 새 나라의 체제로 삼은 것이다. 이승만은 건국의 주요 설계자였다. 그런 중심 인물이 수십 년 독립운동을 하면서 중국이 아니라 주로 미국 땅에 머물렀던 건 한민족에게 예비된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김구 세력이 활동했던 중국에선 쑨원의 자본주의 혁명이 마오쩌둥의 공산혁명에 길을 내주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에 많이 노출되었다. 소련이 지원한 김일성에 대해 김구가 경계심을 늦춘 데에는 이런 환경이 작용했다.


지난 114일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왼쪽)이 안철수 의원(가운데)과 함께 4·19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반면 이승만의 세계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였다. 미 본토에 체류하면서 이승만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미국이 자유롭고 풍요하며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는 것을 생생히 목격했다. 미국이 공산주의를 어떻게 단속하는지도 지켜보았다. 그런 이승만에게 자유민주체제 말고 다른 건국 모델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경험과 판단이 한국인에게 축복이었던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승만은 건국을 넘어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다. 핵심적으로 토지개혁과 교육의 확대인데 이게 공적. 신생국가를 안착시키는 안국(安國)도 건국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신생 대한민국은 근대 공화국의 필수요건은 갖추고 있었다. 자유민주 헌법, 국민의 기본권, 보통·평등 선거, 사유재산권 등등이다. 그러나 국가가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선 선택 요건도 중요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일을 해냈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의 확대와 농지개혁이다. 광복 직후 남한의 문맹률은 70%가 넘었다. 이승만은 초등학교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했으며 전쟁 중에도 학교 문을 닫지 않았다. 그를 무너뜨린 4·19혁명도 교육을 받은 국민이 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공적이 화살이 되어 날아온 셈이다. 이승만의 교육 확대는 이후 국가를 밀고 간 에너지가 됐다. 교육이 없었더라면 민주주의 정착, 박정희의 근대화와 경제개발, 중산층 형성이 어려웠을 것이다.


광복 직후 남한인의 70% 이상이 농민이었고 그중 80% 이상이 소작을 하거나 아니면 자작과 소작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유상으로 토지를 몰수하고 유상으로 분배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 작업은 다행히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마무리됐다. 만약 토지개혁이 늦었더라면 소작농들이 공산군에게 우호적이었을지 모른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일이다.


공적은 호국(護國)이다.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지도자는 많다. 그러나 이승만처럼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그런 일을 해낸 이는 드물다. 남북전쟁 때 링컨의 북군은 군사력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처칠의 경우 독일군이 영국 땅에 올라오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모든 게 벼랑 끝이었다. 군사력은 상대가 안 됐다. 게다가 남한 내에는 공산 세력이 많았다. 북한 국경에는 소련과 중공이 붙어 있었다. 반면 미국은 태평양 건너에 있었다.


미국이 반격 세력의 주축이 된 데에는 이승만의 통찰력과 외교력이 크게 작용했다. 안병훈의 저서 대통령 이승만에 따르면 이승만은 맥아더를 소령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북한군 남침 다음 날 새벽 3시에 도쿄에 있는 맥아더를 깨울 수 있었다. 이승만은 영어를 잘하고 미국 정치를 꿰뚫고 있었기에 신속하게 미국과 트루먼의 협조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 38선에 머물려는 미국을 향해 북진통일을 외쳤다. 중공군 참전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통일은 주효한 카드였다. 이승만은 그를 달래려는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얻어 냈다. 휴전을 방해하기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도 비슷한 카드였다.


공적은 한·미 동맹이다. 휴전의 대가로 이승만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냈고, 이는 강력한 한·미 동맹의 초석이 됐다. ·미 동맹은 전후의 잿더미에서 신생국을 끄집어 내는 기관차였다. 미국은 북한을 억제하고 남한이 경제성장을 지원했다. 군사·외교·경제에서 이 동맹은 한국에 축복이었다. 동맹이 없었으면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도 늦춰졌을지 모른다.


미국을 붙잡은 것은 이승만의 강철 같은 반공 의지와 국내 통치력이었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이승만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 지도자라고 했다. 그런 지도자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공을 막는 튼튼한 방벽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현대 한국의 성장은 한·미 동맹이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며 생산적으로 작동한 동맹임을 증명하고 있다.


옥중의 이승만. 한성감옥에서 중죄수 복장을 한 이승만(왼쪽 끝). photo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2선만 하고 물러났다면


과오은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것이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은 이승만에게 영원한 짐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건국이나 신생국의 운용에서 이승만에게는 숙련된 관리와 경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특히 공산세력을 막기 위해서 그러했다. 불행히도 이런 핵심 세력은 일제 식민통치에서도 적잖은 역할을 했던 이들이다.


제헌국회는 반민특위를 만들어 친일파를 단죄하려 했다. 하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삼권분립을 들어 반민특위를 견제했다. 그럼에도 특위 산하 특경대의 활동이 강화되자 이승만은 경찰을 시켜 특위를 습격하고 특경대를 해산했다. 이후 반민특위는 와해됐다. 특위 활동으로 체형(體刑)을 선고받은 친일파는 14명에 불과했다.


비판자들은 친일파 청산 실패를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리와 비교하곤 한다. 프랑스는 12만명을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프랑스와 조선은 다르다. 나치 지배는 42개월에 불과했지만 일제는 35년이나 됐다. 일제에 순응하지 아니하고 이 세월을 버텨 내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일제의 얼룩이 묻은 이를 단죄 속에 가둬 두고 신생국을 만든다는 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게 반일주의자 이승만의 친일파 딜레마였다.


독재는 빠뜨릴 수 없는 과오. 박정희의 3선개헌과 유신은 시대적으로 불가피한 개발독재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개발독재를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승만의 독재도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나. 이에 대해선 반론이 많다.


민주주의에 관해서 박정희는 유보론자였지만 이승만은 신봉자였다. 자신이 초대대통령이 된 것도 이 민주주의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결심했고 경찰력과 편법을 동원해 국회를 유린했다. 전쟁을 이용해 그는 비상계엄이라는 도구로 야당의원들을 봉쇄하고 직선제 개헌을 해냈다. 사사오입이라는 편법 개헌으로 3선 제한의 장벽도 없앴다. 그러다가 결국 19603·15 부정선거로 정권의 몰락을 맞았다.


그의 대선 라이벌 조봉암은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했다. 이명박 정권 때 대법원은 재심 판결을 통해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돌이켜 보면 사법살인이었던 것이다.


과오3·15 부정선거와 4·19 유혈진압이다. 1960년 당시 이승만은 85세였다. 육체적으로 노쇠했으며 총명함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1960년 사태에 대해 역사적으로 면책될 수는 없다. 부정선거를 저지른 자유당 강경파나 학생들을 총으로 진압한 경찰이나 모두 그의 부하였다. 그를 보좌했던 김정렬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 항공의 경종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4·19 후 이승만은 부상당한 학생들의 병실을 찾았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됐어? 부정을 왜 해? !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426일 그가 하야를 신속히 결정한 것도 학생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지시하지도, 발포를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는 그의 장기집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가 2선만 하고 1956년 물러났다면 그에게는 벌써 국부의 칭호가 바쳐졌을 것이다.


출처 | 주간조선 23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