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史 발굴] 대한민국이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한국전쟁 5일간
글 : 趙甲濟
1951년 1월 13일 중공군이 평택~원주~삼척까지 내려온 상황에서 유엔은 현위치 휴전을 제의하였고 미국도 동조하였다. 중국이 휴전안을 받는 순간 한국은 사라질 운명이었다.
◀유엔총회 제1위원회의 표결 때 휴전안에 찬성하는 미국 유엔 대표 워렌 오스틴(가운데)과 영국 대표 글라드윈 젭(왼쪽). 오른쪽은 반대표를 던진 제이콥 말리크 소련 대표.
1951년 1월 13일에서 17일 사이 한국의 운명이, 우리가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던 국제외교 무대에서,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생환(生還)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대한민국이 강대국들의 게임에 걸려 폐기처분당할 뻔한 이야기이다.
1950년 12월 미국은 한국에서 벌어진 중공군의 대공세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영국은, 미국이 중국 본토를 공격, 확전(擴戰)의 길을 감으로써 유럽이 소련의 위협에 노출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애틀리 영국 총리는 워싱턴으로 달려가 트루먼 대통령을 압박, 한국에서 철수할 것을 권하고, 원자폭탄을 쓰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으려 했다.
영연방(英聯邦) 국가들은 위기감 속에서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12월6일 영연방 국가 유엔 대표들이 모였다. 이들은 인도의 네루 총리가 주도하여 초안한 휴전안을 검토하였다. 그 골자는 38도선에서 휴전하고 비무장 지대를 만들며, 휴전 후 한국과 대만 문제를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이들의 휴전 움직임을 거부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미국과 영국의 협조 관계가 깨질 것을 우려하였다. 유엔이 설립한 이후 처음으로 군사력을 동원, 침략을 응징한다는 명분은 거대하였다. 소련 대표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덕분에 유엔군이 구성되었는데, 미국은 유엔의 기치를 이용, 북한과 중국을 침략자로 몰아붙일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유엔에서 늘 압도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영연방 국가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애치슨은 영연방에 수정제안을 하였다. 유엔총회 의장과 그가 지명하는 두 사람에게 휴전의 기초를 모색하도록 위임하자고 했다.
中에 밀린 美, 휴전 모색
유엔총회는 12월 14일 아시아 13개국이 제안한 휴전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결의문은 유엔총회 의장이 자신 이외에 두 사람을 지명, 3인의 휴전그룹을 만들어 휴전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이란의 나스롤라 엔터잠 유엔총회 의장은 캐나다 대표 레스터 B. 피어슨과 인도 대표 베네갈 N. 라우를 휴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2월 15일 구성된 3인의 휴전그룹은 먼저 유엔군 사령부에 휴전 조건을 물어 정리한 문서를 중국 측에 전달하였다. 유엔 사령부가 제안한 휴전안의 핵심은 비무장 지대 설정이었다. 비무장 지대는 너비를 남북으로 20마일, 남쪽 경계선을 38도선으로 잡았다. 즉 38도선 북쪽 지역에 설정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 12월 초 유엔 대표가 뉴욕에 가 있는 중국 대표에게 중국의 휴전 조건을 물었다.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스탈린에게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는지 지침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12월 7일 중국 정부에 이런 조언을 하였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휴전 조건에 관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함.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 한 군사활동을 중지할 수 없다고 생각함. 동시에 너무 솔직하게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3개국 대표에게 중국의 카드를 보여선 안 될 것임.〉
같은 날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유엔에 나가 있던 소련대사 비신스키에게, 그가 상부에 제의하였던 휴전안을 바꾸도록 지시하였다.
〈미군은 패배 중이고, 휴전 제의로 시간을 벌려고 하므로 미국이 받을 수 없는 제의를 해야 할 것〉이란 게 지시의 요지였다.
유엔의 휴전 제의를 받은 중국은 12월 22일 저우언라이를 통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한국과 대만 및 대만해협으로부터 미군이 철수하고 대만 대신에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켜 주어야 휴전협상에 응하겠다고 했다. 약 40만명의 중공군과 북한군은 38도선을 향하여 물밀 듯이 내려오고, 유엔군은 싸워 보지도 않고 총퇴각 중이었다. 이런 승세(勝勢)를 업은 중국의 자신감 넘친 거부였다.
리지웨이의 등장과 反轉
12월 23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표현에 따르면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낙동강 전선을 지켜 냈던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지프를 타고 가다가 서울 북방에서 한국군 6사단의 스리쿼터에 받혀 즉사한 것이다. 후임 8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낙하산을 지고 뛰어내렸던 공수사단장 출신의 육군참모차장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한 장군의 인사(人事)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드문 경우이다.
중공군은 제3차 공세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하고 인천, 수원을 석권한 뒤 평택~영월~삼척선까지 내려왔다.
1월 10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미국 합참(合參)에 지침을 내려줄 것을 건의하였다. ‘우리는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 일본과 한국을 동시에 방어할 만한 힘이 부족하다’면서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일본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만약 워싱턴이 정치적 이유로 한국을 지켜 내야 한다고 결정한다면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미군은 심각한 손실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맥아더는 1월 6일 보고에선 한국군의 전투력을 평가절하하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었다). 맥아더는 13일 보고에서 다시 합참을 압박하였다.
맥아더, 한국 포기 건의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거의 없다”면서 “한국에서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했다. 그 4일 뒤 30만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넌다.
〈나의 질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에서 현재의 군사적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정치적 목적인가. 아니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가능한 빨리 철수할 것인가. 내가 전에도 지적한 것처럼 한국 전선의 우리 사령부에 가해진 굉장한 제약과 조건에 비추어 현위치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압도적인 정치적 고려에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한다면 우리는 군사력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현 위치를 지켜 낼 것이다.〉
맥아더는 ‘중국 봉쇄, 만주 폭격, 장제스(蔣介石) 군대의 투입, 증원군 파견 등의 요구를 받아 주지 않으려면 철수냐 전멸이냐의 선택을 해 달라’고 압박한 셈이다.
1월 13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고심에 찬, ‘사려 깊은’(딘 애치슨) 편지를 보냈다. 그는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이 국익(國益)에 기여하고 있는 10개항을 적시(摘示)하고 왜 전쟁을 확대할 수 없는가, 왜 공산 진영과 싸우기 위해서는 우방국들을 소외시켜서는 안 되는가, 왜 한국에서 철수할 수 없는가를 자상하게 설명하였다. 불리한 조건에서도 미군이 버텨 주어야 자유진영의 수호를 위한 미국의 전략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합참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을 보내 맥아더를 직접 만나고 전선을 시찰, 현황을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다. 1월 15~18일 도쿄에서 맥아더를 만난 콜린스는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할 경우 데리고 나와야 할 한국인의 선별(選別) 문제까지 논의하였다.
인도·캐나다 대표, 휴전案 작성
◀중공에 제안할 휴전안을 기초한 세 사람. 왼쪽은 캐나다 대표 레스터 B. 피어슨, 가운데는 유엔총회 의장 나스롤라 엔터잠, 오른쪽은 중국 편을 들려고 했던 인도 대표 베네갈 N. 라우.
한국과 미국이 최악의 상황에 빠진 1월 유엔에선 이런 전황(戰況)을 반영,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미국이 유엔에서 중국을 침략자로 규탄하려고 하자 영연방 국가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침략자 규탄이 휴전 협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판단, 미국에 휴전안을 만들 시간을 줄 것을 요청, 양해를 받았다. 휴전위원회 소속의 인도 및 캐나다 대표가 중국에 제의할 휴전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인도의 네루 총리는 영연방 국가 중 가장 친중적(親中的)이었다. 인도의 라우 대표는 네루 총리의 지시에 따라 휴전 제의의 내용을 중국에 유리하게 바꾸려고 했지만, 캐나다의 피어슨 대표는 미국 측과 협조하고 런던에서 진행 중이던 영연방 수뇌 회담의 동향도 파악해 가면서 휴전안을 작성하였다. 미국은 이 휴전안에 동의하였다. 휴전안은 1월 13일 유엔총회 제1위원회에서 통과되어 중국에 제시되었다. 5개항이었다.
1. 현위치 휴전.
2.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회담 개최.
3. 단계적으로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의 철수.
4. 한반도 전체를 관리하기 위한 준비 절차에 착수.
5. 휴전 성립 후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참여하는 회담을 개최, 대만 및 중국의 유엔 가입 등 극동 문제들을 논의한다.
미국의 ‘살인적인 고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기념식에서 만난 맥아더 극동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회고록(《Present at Creation》)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이 휴전안을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의 결정은 살인적인 고민이었다. 한국을 상실하고, 의회와 언론의 분노를 뒤집어쓸 것인가, 혹은 유엔에서 다수의 지지를 잃을 것인가? 국무부는 심사숙고(深思熟考)를 거듭한 끝에, 대통령에게 휴전안을 지지할 것을 건의, 허락을 받았다. 물론 이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다. 우리는 중국이 이 휴전안을 거부해 주기를 열렬하게 바라면서 또 그렇게 확신하면서 동의를 해 주었다. 중국이 거절한 뒤에는 우리의 친구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와 우리가 중국을 침략자로 규탄하는 데 협조하여 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미국은 한국과 대만의 운명을 놓고 도박을 한 것이다. 중국이 휴전안에 답변을 하는 데는 5일이 걸렸다. 이 5일간 딘 애치슨 장관은 속이 탔을 것이다. 한국인의 운명을 결정한 휴전 제의 과정에서 유엔과 미국은 한국의 이승만(李承晩) 정부를 철저하게 무시하였다. 한국을 상대로 그 어떤 논의를 한 흔적도 없다. 우리의 운명이 또 다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이 운명적 순간에 이승만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일기를 통하여 그의 동선(動線)을 추적해 본다.
*1951년 1월 3일: 대통령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서 경무대를 떠났다. 비행기 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대통령 일행은 경남지사 관저에 들었다. 라디오 방송은 적의 선봉이 서울시내에 진입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1월 4일: 양성봉 경남지사는 이번에 경상남도로 내려온 피란민이 45만명쯤 되는데 그 가운데 부산으로 들어온 피란민이 대략 25만명쯤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나도 당장 내일 아침부터 양치질은 매일 하지만 세수는 이틀 걸러 한 번씩 하겠다”고 했다.
*1월 5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손원일 제독과 함께 와서 새로운 방위선을 구축하고자 애쓰는데 병력이 부족하다고 했다. 대통령은 이제는 타이완(臺灣)의 국부군(國府軍)을 받아들여야 하겠다고 말하고 신 국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무초 대사에게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대사가 이에 찬의(贊意)를 표명, 대통령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지원해 줄 5만명 또는 그 이상의 국부군을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작성, 무초 대사를 통하여 맥아더 장군에게 보냈다(注: 맥아더는 워싱턴에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오후 늦게 민정 시찰을 나간 대통령이 부산역 근방에서 얼굴과 코는 거무스름하게 그을었지만 유난히 행복해 보이는 피란민 부부가 8명이나 되는 자녀들 가운데 어린 것들을 둘러업은 위에 보따리를 둘러메고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대통령이 어디로 가느냐고 그 아버지에게 묻자 그는 그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도 별로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경상북도 구미에 사는 사촌형네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올망졸망 따라가는 8명의 크고 작은 아이들을 보면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무리 사촌형이라도 저 많은 아이들을 환영하겠느냐”고 걱정했다. 대통령은 “코끼리는 자기의 코가 아무리 길어도 짐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소개하면서 “이 친구는 참으로 행운아(幸運兒)야!”라고 부러워해 마지않았다.
콜린스 총장에게 전한 메시지
*1월 9일: 국군은 원주를 포기했다. 대통령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각오로 다 함께 싸우자”면서 “게릴라는 게릴라로 대항하고 인해전술(人海戰術)은 인해전술로 막아 내자”고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1월 11일: “나라를 구하려고 온 나라가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고 있는 지금 일본으로 밀항(密航)하여 해외도피를 꾀하는 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할 것”을 다짐하고 “제주도 피란을 금지한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1월 12일: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의 초청으로 국방장관을 데리고 대구를 방문했다. 대통령은 먼저 한국군 사령부를 들른 다음 리지웨이 장군의 사령부로 갔다.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이 더 이상 철수하지 않겠다면서 앞으로는 후퇴 대신 진격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데 대해 치하한 뒤 이렇게 말했다.
“리지웨이 장군, 어째서 50만 한국 청년들이 공산당과 싸울 수 있도록 무장시키지 않는 것입니까? 미국은 우리가 언젠가는 뒤에서 당신들을 칼로 찌를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군사원조도 받은 것 없이 스스로의 생명을 바쳐 가면서 공산군과 성공적으로 싸워 온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뿐입니다. 어째서 귀하는 한국 청년들을 제쳐놓고 대신 일본을 무장시켜서 또 다시 일본을 열강(列强)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까?”
*1월 14일: 호주 대표인 프림솔 경(卿)이 찾아와서 휴전결의안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가 대통령이 관심을 표하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1월 15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중공군의 군기(軍紀)와 행군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장교들은 미군의 전투 능력과 전술 및 우수한 장비들에 관하여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군이 가지고 있는 약점들에 대해서도 숙지(熟知)하고 이를 휘하 병사들에게 잘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미군은 후방이 차단되면 취약해지며 상황이 급박해지면 중장비들을 거의 버리고 간다. 보병은 공격 작전이나 방어 작전에 약한 편이고 공군과 중무기에만 주로 의존한다. 주간(晝間) 전투에는 강하지만 야간 전투나 육박전에는 서툴며 포 지원이 없을 때는 사기가 완전히 저하된다. 후방이 차단되면 어쩔 줄 모르며 자동차 같은 수송 수단이 없어지면 전투 의욕을 상실한다 등등.
*1월 16일: 대통령은 오전에 집 아래에 있는 작은 잔교(棧橋)에 내려가 낚시질을 했다. 물고기는 한 마리도 낚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나 깊이 생각할 일이 있을 때는 낚시를 한다.
*1월 17일: 대통령은 오전 10시 비행장으로 가서 콜린스 총장을 만나 청년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무기를 줄 것을 한참 동안 설득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개인적 메시지를 장군에게 들려주었다.
“귀국의 대통령에게 전황은 사람들이 지어 내서 말하는 것처럼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시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우기를 원하며 우리 청년들이 자신의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고 전해 주시오.”
콜린스 장군은 대통령의 메시지를 그대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威力 수색
중국이 유엔 제의의 휴전안에 대한 답을 준비하고 있던 1951년 1월 15일,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은 미25사단의 27연대에 위력(威力) 수색을 명령하였다. 존 H. 마이클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이 연대는 오산에서 수원까지 진출하였는데 중공군의 저항은 미미하였다.
1950년 11월 하순 이후 중공군과 제대로 싸워 보지 않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였던 미군은 이 작전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리지웨이는 반격 작전을 준비한다.
트루먼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중국으로 확전하기 싫으면 한국을 포기하자고 하는 데 충격을 받고 육군과 공군의 참모총장을 한국전선으로 보내 현장을 조사, 직접 보고하도록 했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총장은 리지웨이와 이승만을 만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 맥아더와는 전혀 다른 낙관적 보고를 했다. 미8군의 사기가 좋아졌고 신임 8군사령관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의 분위기는 급변(急變)했다. 이후 맥아더에 대한 불신(不信)이 높아지고 철수론은 쑥 들어가 버렸다.
중공군은 제3차 공세로 1월 4일 서울을 점령하고 8일까지 평택까지 내려갔다가 주력을 뒤로 물린 뒤 휴식에 들어갔다. 1월 14일 마오쩌둥(毛澤東)은 펑더화이(彭德懷) 중공군 사령관에게 전문(電文)을 보냈는데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라고 지시하였다.
‘유엔의 휴전 제의는 미국이 힘을 보존하고 이승만이 일정한 지역과 군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것이다. 휴전협상을 하더라도 질질 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휴전안을 단호하게 거부하여야 한다.’
이틀 뒤 마오쩌둥은 다시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내 미군이 두 개의 선택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첫째는 압박을 받아 저항을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는 것, 둘째는 부산 대구 지역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무익(無益)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물러나는 것.
周恩來, 한국을 살리다?
◀저우언라이 전 중국 총리.
1월 13일자 휴전안에 대한 중국의 공식적인 반응은 17일에 나왔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베이징(北京) 주재 인도 대사 K. M. 파니카르에게 미리 성명서 내용을 알려주었다. 저우언라이는 파니카르를 대외(對外) 창구로 활용하였다. 인천상륙 작전 후 유엔군이 북진하면 중국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보낼 때도 파니카르를 통해서 했다. 이날 저우언라이 설명을 들은 파니카르는 난감해하였다. 중국은 유엔의 휴전 제의를 거부하고 반대 제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곧 발표할 성명서 요지는 이러하였다.
〈휴전은 미군에 숨 돌릴 시간을 줄 뿐이다. 휴전 후의 협상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한국인에 의한 한국 문제 결정, 대만 및 해협으로부터 미군 철수,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 프랑스 이집트 인도를 포함시킨 7대국 회의를 중국 영토에서 개최할 것을 요구한다. 중국의 유엔 가입은 회의 시작과 더불어 기정사실화한다.〉
파니카르 대사는 “영국, 캐나다, 호주는 중국이 휴전에 동의한다면 휴전의 실행은 협상을 해 가면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면서 “회담 장소를 중국으로 고집하면 미국은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고 했다. 대안(代案)으로 홍콩, 카이로, 인도를 제안하였다. 그렇게 설득하여도 저우언라이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지막으로 파니카르는 천기누설(天機漏泄)을 한다.
“미국이 휴전안에 동의한 것은 중국이 절대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고집 부리지 말고 받으라.”
그래도 저우언라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중국이 예상대로 휴전 제의를 거부하자 5일간의 악몽에서 벗어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보류하였던 중국 규탄 결의안 통과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애치슨은 영국 측에 “휴전안에 찬성하였다가 우리는 국내적으론 거의 파멸할 뻔하였다”면서 이제는 더 양보할 수 없으니 중국 규탄안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트루먼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겠다는 결심을 천명하였다.
미국의 유엔 주재 대사 오스틴은 유엔이 평화적 해결 방법을 모색하였으나 중국이 거부하였으므로 정의로운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파멸적인 결과를 부를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2월 1일 유엔총회는 찬성 44, 기권 9, 반대 7표로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반대한 나라는 미얀마, 인도, 그리고 소련 블록의 5개국이었다.
한국이 사라질 뻔했다
요사이 중국인들을 포함한 한국전 연구가들은 마오쩌둥이 서울을 점령한 후 기고만장하여 ‘황금의 기회’를 놓쳤다고 분석한다. 앤드루 빙험 케네디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한 《마오쩌둥과 네루의 국제적 야망》이라는 책에서 1월 13일자 휴전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중국은 우위(優位)에 서서 역사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 공산군은 서울을 확보한 상태에서 두꺼운 완충지대를 갖게 된다.
2. 외군 철수를 위한 회담에서 중국은 총 한 방 안 쏘고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3. 대만의 입지는 약화되고, 중국은 유엔에 가입하였을 것이다.
4. 피로한 중공군을 휴전 기간 중 보강할 수 있었다.
서울, 인천, 수원을 빼앗기고, 평택~영월~삼척 이북이 점령당한 상태에서 대한민국의 생존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은, 맥아더가 북진(北進)할 때 유엔군을 평양~원산 선에서 멈추게 하고 방어선을 쳤더라면 중공군의 개입 명분을 없애고 김일성 세력을 말려 죽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것과 비슷하다. 맥아더는 인천상륙 작전 후, 마오쩌둥은 서울 점령 후 전황을 오판(誤判), 손에 다 넣었던 승리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마오쩌둥의 기고만장한 한국 해방론과 맥아더의 우울한 한국 철수론을 다 같이 날려 버린 이는 리지웨이 장군이다. 그는 패잔병 같던 8군을 재건, 2월과 3월 반격에 나서 38도선 이남의 중공군을 밀어올린다.
외교는 戰場에서 결정된다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은 수류탄을 가슴에 달고 다니면서 역사를 바꾸었다.
1951년 3월 1일에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다급한 전문은, 1월 13일의 휴전 제의를 거부한 것이 얼마나 큰 실기(失機)였던가를 잘 알려준다.
〈적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을 때까지는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임. 장기전이 될 것 같음. 최소한 2년 정도의 전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임. 적군은 우리를 소모전으로 끌어들이려 함. 전선으로 보내는 군수품의 60~70%만 수령되고 나머지는 공습으로 파괴됨. 지난 전투에서 중국군은 약 10만명의 손실을 기록하였고, 12만의 보충이 필요함. 올해와 내년에 추가로 30만명의 병력 손실이 더 일어날 것임. 통신선이 길어지고 보급상의 어려움이 증대하고 있으며, 후방을 보호하기 위한 병력을 남겨야 함.〉
리지웨이 장군은 3월 15일 서울을 탈환, 38선을 수복한 다음 멈추었다. 중공군은 5월에 공세를 취해 보았으나 큰 타격을 받고 물러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951년 6월 5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우리는 적군의 상륙작전 위험성 등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음. 조만간 가오강(高崗, 중국의 군인·정치가, 중국공산당 동북국 서기,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역임-편집자 주)을 파견, 동무에게 보고하고 지침을 구할 것임〉이란 전문을 보냈다.
중공군의 대공세 이후 ‘한반도 통일’이란 목표를 포기하였던 트루먼 정부는 휴전을 생각하고 있었고 소련도 유엔군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6월 초 미국 측에 휴전 협상의 뜻을 타진한다. 이런 가운데 가오강과 김일성을 만난 스탈린은 6월 13일 마오쩌둥에게 전문을 보내 〈정전이 현시점에서 유익하다고 판단됨〉이라고 했다.
마오쩌둥이 가오강과 김일성을 통하여 스탈린에게 제시한 휴전의 조건은 1월 13일의 유엔 제안을 거부할 때 내세웠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외교는 전장(戰場)에서 결정된다는 원리를 새삼 확인해 준다.
〈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를 조건으로 제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 중국은 유엔이 사실상 침략도구화하였으므로 우리는 유엔 가입 문제에 특별히 관심이 없음. 대만 문제도 미국이 이를 별도로 취급하기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적당히 양보할 것임.〉
李承晩의 보복
1951년 1월의 암울한 겨울, 부산 임시 수도에서 한국의 운명이 한국인 몰래 결정되는 과정을 지켜보던 이승만은 한국전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혜성처럼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의 문을 열어 휴전협상의 최대 쟁점이던 반공포로 2만7000명을 석방, 합의 직전에 있던 미국과 중국을 경악으로 몰고 갔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한때 이 대통령을 잡아넣는 공작까지 구상한다. 1950년 7월 4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사령관에게 넘겨준 이후 전국(戰局)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소외되었던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란 일생일대의 승부를 통하여 미국의 멱살을 잡고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다.
포로 석방 직후인 7월 3일 중국 정부는 베이징(北京) 주재 소련 대리 대사에게 현 상황의 분석 자료를 건네준다. 냉전(冷戰)이 끝난 후 공개된 이 자료를 통하여 우리는 이승만에 대한 중국의 높은 평가를 엿볼 수 있다(《소련 자료로 본 한국 전쟁의 전말》에서 인용).
소련과 중국이 두려워한 사람
〈이승만이 전쟁 포로를 석방하고 휴전 반대 운동을 확대한 지난 12일간, 조선 전쟁에 묶여 있는 미국은 타협을 모색하고 있음.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을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음. 미국의 약점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이승만이 타협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됨. (중략) 중국 정부는 평화를 위하여 휴전협정에 동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함. 이러한 경우 미국과 중국이 함께 이승만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쉐첸(吳學謙, 중국의 정치가, 외교부장·부총리·공산당정치국원 역임-편집자 주)은 농담조로 언급하였음.〉
중국은 ‘미국의 약점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이승만’이 미국을 끌고 들어가 휴전협상을 깨고 북진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하여 ‘미국과 중국이 함께 이승만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아야 할 만큼 이승만을 다루기가 힘들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몇 달 뒤 찾아온 닉슨 미국 부통령에게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내가 무엇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미국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어야 미국의 협상력이 강해진다”고 말하였다.
이승만이 이런 승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군과 국민들이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 의지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덕분이다. 지금 한국의 지도부는 62년 전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국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승만과 같은 승부를 생각도 하지 못한다. 풍요와 민주주의가 자주국방 의지와, 생존 투쟁을 위한 정신력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27일에 있었던 휴전협정 서명식에 김일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소련의 지시를 따른 것임이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외교문서로 밝혀졌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7월 24일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 간부회의는 북한 주재 소련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김일성이 휴전협정 서명식에 불참한 이유
◀1953년 7월 27일 오후 2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과 조선노동당 중앙위 서기 박정애가 지켜보는 가운데 휴전협정서에 서명하는 김일성. 김일성은 소련의 지시로 판문점 협정서명장에 나오지 않았다.
〈김일성과 조선 동무들에게 다음 사항을 전해 줄 것. 현재 김일성이 판문점을 방문하는 것은 김일성 동무에 대하여 모종의 도발을 가할 수 있는 이승만 진영의 행태로 인해 상당한 정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 이 때문에 김일성이 직접 판문점을 방문, 협정에 서명하여서는 안 됨. 우리의 큰 목적을 살려 나가기 위하여 사소한 도발 가능성도 회피하여야 함. 이 문제에 관하여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여하한 주장에도 굴복하지 말도록 조언함.〉
이 지시에 따라 김일성은 7월 27일 밤에 평양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고, 중공군의 펑더화이는 7월 28일 오전 개성에서 서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 미국·중국·북한 지도부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을 본 소련은 ‘이승만은 뭘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는 공포감을 가졌던 듯하다. 이승만 정부가 과연 김일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소련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단 한국에 유리하였다. 상대로 하여금 우리가 뭘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우위에 서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전문을 통하여 우리는 김일성이 소련의 꼭두각시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소련과 중국이 두려워하였던 이는 미국에도 대드는 이승만이었다.
한 유명 법률학자(전 서울대 교수)가 수년 전 정부 기관장 자격으로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2012년에 사망)을 만난 적이 있었다. 시아누크 왕은 89세로 별세할 때까지 격동하는 인도차이나 역사 속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이다. 크메르루주 집권 이후 10여 년간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면서 망명생활도 하였다. 특히 김일성과 친밀하였다. 그런 그가 한국인 학자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극찬하더라고 한다. 이 학자가 전해 준 시아누크의 평은 이러하였다.
“이승만은 전후(戰後) 신생국가의 지도자 중 급(級)이 다른 이였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무장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는데, 이승만은 외교를 통하여, 즉 세계 정세의 흐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수가 많고 수준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50년대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반공 지도자였습니다.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
한국의 월남 파병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이뤄졌지만 그 전에 이승만 대통령이 월남 파병을 위한 공작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이 득세하자 파병을 제의한 적도 있습니다(수카르노 대통령 시절인 듯).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은 이승만 덕분입니다.”
이 학자는 김일성과 친하였던 시아누크의 이승만 칭찬에 놀랐다고 한다. 귀국하여 자료를 찾아보고는, 이승만이 월남 파병을 위한 탐색을 한 적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시아누크 왕은 냉전 시절에 서양과 공산 진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약소국인 캄보디아의 국익을 지키기 위하여 현란한 외교를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 사람이 이승만을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高手)의 지도자였다”고 평한 셈이다.
이승만을 상대로 하면서 그의 장단점을 관찰한 미국 대사 무초는 퇴임 후의 증언에서 “이 대통령은 국제정세를 고차원(高次元)에서 이해한 사람이다”고 평했다.
시아누크의 말대로 국제외교를 통한 독립과 건국이야말로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국익을 도모하는 최고의 정치이다(한국에는 무장 독립투쟁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위대한 통찰력에 기초한 고매한 인격이어야 가능하다.
아시아의 두 개 기적
이승만의 고단수(高段手) 외교술을 알아본 이로는 미국의 대전략가 닉슨이 있다. 1953년 가을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온 닉슨 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닉슨 회고록》).
“너무 많은 신문들이 이승만이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하는데,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내가 한국은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미국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닉슨은 이렇게 썼다.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 생존을 위해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느낌을 주는 지도자의 존재 자체가 전쟁억지력이다. 아시아엔 두 개의 기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중국이 공산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이 공산화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마오쩌둥의 군사적 천재성과 이승만의 외교적 안목에 기인(起因)하는 바 크다.
지금 한국은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實戰)배치한 상황에서 핵방어망 건설도 중국 눈치를 보면서 미루고, 유권자들은 북한의 핵개발을 지원한 세력을 응징하기는커녕 정치적 주도권을 잡도록 허용하였다. 1951년 1월처럼 핵을 보유한 주변 강국들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려 들 때 핵도 없고 이승만도 없는 한국이 또 다시 기적적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자주적 군사력이란 잔고(殘高)가 부족한 무모한 외교는 부도(不渡) 나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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