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569-6호 안중근의사유묵 - 견리사의견위수명(安重根義士遺墨 - 見利思義見危授命)
●소재지 : 서울 동작구 상도로 369, 한국기독교박물관(상도동,숭실대학교)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ㆍ지정한 것이다.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논어(論語)」「사기(史記)」구절 등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을 나타낸 것.
세상의 변함을 지적한 것, 일본에 경계하는 것, 이밖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유묵 대부분은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그중 제569-21호는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여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사람[절전독(折田督)]이 받은 것으로, 8ㆍ15 광복으로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절전간이(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고, 그것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 또 569-25호는 안의사 수감 당시 여순감옥에서 경관을 지냈던 이의 손자[팔목정징(八木正澄)]가 2002년 10월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또 제569-22, 23호는 앞쪽에 “야스오까 검찰관에게 증여한다(贈安岡檢察官)”라고 적었듯이 당시 관련했던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험을 보면 목숨을 준다.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의병장, 정치사상가이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조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
우덕순, 조도선 등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 만주의 각 역 근처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저격을 준비하였으며,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이라고 밝혔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구한말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사상적 측면으로는 동양평화론자이기도 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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