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의 음모(下) 이승만 “지금 한국에 중공군을 끌어들인 것은, 국제연합군이 철수한 뒤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낫다”
趙甲濟 / 金永男
니츠와 丁一權 증언의 공통점들
폴 니츠의 회고담은 맥아더의 미스터리를 푸는 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동시에 정일권이 보았다는 그 충격적 편지 내용과 맞아떨어져 편지의 실재(實在) 가능성을 높인다.
1. 니츠는 맥아더의 전략 의도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길이었다고 했다. 중공군의 개입 없이 북한군을 섬멸하면 한반도 통일의 영웅이 되는 것이고, 중공군이 개입하면 전쟁을 중국 본토로 확대, 마오쩌둥을 일소, 중국을 수복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정치에 야망이 있었던 맥아더는 그렇게 하면 공화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추대할 것이라고 계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없다”고 단정적으로 보고할 때도 맥아더는 “설사 이 보고가 틀려 중공군이 개입할 경우엔 중국 본토로 확전하면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3. 1950년 10월 하순 중공군이 한국군을 표적으로 삼아 대규모 기습을 하였는데도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 규모를 실제의 10분의 1로 축소, 전면적 개입이 아니라는 보고를 하였는데, 이는 오판이 아니라 의도된 허위 보고일 가능성이 높다. 전면적 개입을 하였다고 보고하면 워싱턴에서 북진을 중단시킬 것이기 때문에 축소 보고를 하고는 11월 말의 크리스마스 공세를 명령, 미군과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대결하는 상황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 워싱턴에서도 맥아더에게 원폭 사용 권한을 주고 중국 본토를 공격하도록 허용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10월의 중공군 개입을 몰랐다는 것은 정보 오판이지만, 중공군의 개입 규모를 엄청나게 축소 보고, 대공세를 재개하여 대재앙을 부른 것은 범죄적 행동이다.
4. ‘그가 너무 심하게 모험을 감수한 이유의 일부는 우리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상태로 들어가도록 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니츠의 평이 핵심적이다. ‘너무 심하게 모험을 감수한’ 것들의 목록은 길다. 트루먼에게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부정한 보고, 8군과 10군단을 분리시켜 V자로 진격하게 하여 중공군이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 10월 하순에 기습을 가한 중공군의 병력을 축소 보고하고 11월 말의 대공세를 강행한 것 등이다.
5. 당시 워싱턴의 국가지도부는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인천상륙 작전 성공의 위광(威光)과 전선 사령관에 재량권을 주는 미국의 전통 등으로 조지 마셜, 딘 애치슨 같은 거물들조차 11월 공세를 중단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니츠도 감청 정보를 통하여 맥아더의 속셈을 파악하였지만 대세(大勢)를 돌릴 수 없었다.
6. 맥아더의 중국 수복 야망이 좌절되는 것은 중공군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총퇴각하면서 맥아더의 권위가 실추된 이후였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대공세를 빌미로 중국 본토 확전을 건의하였으나 트루먼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이를 거부하였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결전을 벌일 만한 군사력이 준비되지 않았다. 트루먼을 무시하였던 맥아더는 트루먼의 관점에서 한국전을 보는 연습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美 국립문서보관소를 화나게 한 역사 탐정’ 매튜 에이드 한국전쟁 당시 정보전을 집중 연구한 매튜 에이드 씨는 미 공군 출신이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는 2006년 1월 ‘미 국립문서보관소를 화나게 한 아마추어 탐정’이라는 제목으로 에이드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20년간 ‘역사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국립문서보관서로 출퇴근했던 에이드 씨는 비밀해제가 돼야 했던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사서에 문의한 결과 미 중앙정보국(CIA) 등 국가기관이 비밀문서를 은폐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WP에 의하면 그는 비밀문서를 통해 특정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매일 국립문서보관소를 찾다 보니 개별 문서에 대한 비밀해제 시기를 알게 됐고 그 날만을 기다렸는데도 공개되지 않자 의문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이후 《뉴욕타임스(NYT)》는 에이드의 증언을 토대로 CIA 등 미 정부 당국이 비밀문서를 숨기고 있다는 특종 보도를 했다. NYT 보도 후 문서보관서는 자체 감사를 진행했고 CIA·공군·에너지부(DOE)·연방긴급사태관리청(FEMA)·문서보관서 등 다섯 곳의 정부기관이 1999년부터 2만5515건의 문서를 은폐했다고 밝혔다. 에이드는 미 공군 복무 당시 비밀문서 불법 소지죄로 1년간 복역한 뒤 불명예 제대했다. 그는 기자가 맥아더 해임과 관련된 감청 건을 문의하자 “엄청나게 중요한 이 문제에 대해 물어 온 기자는 당신이 처음”이라며 책 본문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소개했다.
트루먼에게 보고된 암호 해독 문서
◀트루먼의 해군 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데니슨 제독.
폴 니츠가 보았다는 주일 스페인 대사와 맥아더의 대화 기록에 대하여 더 알아본다. 앞에서 인용한, 비밀문서 발굴이 전문인 미국 역사학도 매튜 에이드가 쓴 《비밀의 보초(Secret Sentry)》에서 관련 대목을 발견하였다.
〈맥아더를 해임한 트루먼의 결정은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알링턴홀에 있는 미군 정보사(AFSA)의 암호 해독가들이 미국의 가장 인기 있는 장군을 해임한 트루먼의 결정에 큰 역할을 하였음이 밝혀졌다.
1950년에서 1951년 사이 AFSA는 도쿄에 주재하는 여러 외교관들의 전보를 가로채고 해독하고 있었다. 가장 저명한 표적은 스페인, 포르투갈, 브라질 대사의 외교 전문이었다. 맥아더와 윌로비 정보참모는 이들 세 대사들에게 중국과 소련에 대한 자신들의 극단적인 정치적 견해를 털어놓는 실수를 범하였다. 소련이 한국에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것을 바라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 미국이 그걸 빌미로 삼아 베이징의 마오쩌둥 공산정권을 끝장내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맥아더의 말도 있었다.
맥아더는 대사들에게 러시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951년 3월 중순 트루먼의 해군 보좌관 로버트 데니슨 제독은 대통령에게 앞 주(週)에 해독한 네 개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는 도쿄 주재 스페인 대사 프란시스코 호세 델 카시티요가 맥아더와 사적으로 나눈 대화를 (본국에) 보고한 것이었다. 맥아더가 고의로 워싱턴의 명령을 무시하였다는 압도적 양의 증거들과 그가 비밀리에 소련 및 중국을 상대로 한 전면전을 바라고 있다는 감청 정보를 근거로 하여 그를 해임한 것이다.〉
기독교적 반공주의의 화신(化身)인 맥아더는 이념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본심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였다. 그와 정보참모 윌로비는 스페인 내전 때 공산세력을 일소한 프랑코를 높게 평가하였다는데, 그 스페인 대사에겐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편지(정일권 증언) 내용이 너무 솔직한 것도 동지적 관계의 토로였다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트루먼의 해군 보좌관 증언
트루먼에게 결정적 제보(提報)를 한 데니슨 해군 보좌관이 남긴 자료를 찾아보았다.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시에 있는 트루먼 도서관에는 문제의 암호문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는 2400장 분량의 〈데니슨 리포트〉가 소장돼 있다. 도서관에 열람 여부를 문의하자 랜디 소웰 사서(司書)는 “안타깝게도 인터넷으로는 열람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트루먼 도서관에서 작성한 데니슨의 구술 역사 전문(全文)은 인터넷에 공개돼 있다. 1971년에 진행된 인터뷰의 맥아더 해임 관련 부분이다.
〈질문자: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장군이 해임됐는데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데니슨: 맥아더가 재향군인회에 보낸 편지 때문이 아닌가요?
질문자: (재향군인회가 아니라) 미해외참전용사모임(VFW)입니다.
데니슨: 그것만으로 해임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편지 뒤에도 여러 일이 발생했습니다.
질문자: VFW 편지는 조금 전의 일 아닌가요? 8월에 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데니슨: 맞아요. 어쨌든 어떤 일이 있었습니다.
질문자: 그러고는 조 마틴 연방하원의원과의 편지도 있었죠.
데니슨: 네.
질문자: 그 일이 해임 결정과는 시기적으로 가깝기도 하고요.
데니슨: 하지만 대통령은 오랫동안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맥아더를 잘 아는 사람들과 이러한 사안에 대해 상담을 하는 괴로운 시간을 보낸 걸 내가 알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맥아더는 VFW와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정부의 한국전 정책을 비판, 트루먼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현직 군인이 대통령의 문민(文民)통제 원칙에 도전하는 모습이었다. 데니슨은 이렇게 잘 알려진 이유 말고도 “어쨌든 어떤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스페인 대사와 맥아더의 대화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승만, “중공군 개입은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
북한군 남침(南侵)에 이은 중공군 개입은 현대사를 바꾸었다. 북진통일을 좌절시키고 1·4 후퇴와 이산가족 문제라는 민족적 비극을 초래하였다. 중국은 유엔에서 침략자로 규정되어 약 20년간 고립되었다. 미국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 국방예산을 늘리고 군사력 강화를 추진, 본격적인 대소 군비경쟁에 돌입한다. 미국은 대만의 보호를 확실히 하였고, 일본은 전쟁특수로 경제가 회복되었으며 독일의 재무장이 허용되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군사동맹으로 강화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유진영에 득이 되는 결과가 빚어졌다. 맥아더의 음모가 결과적으로는 자유진영을 강화시킨 것인가? 한국은 손해만 본 것인가?
북진통일 달성을 앞두고 중공군이 개입,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충격을 받았을 이승만 대통령의 예언적 논평이 있다. 1950년 11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상한 이야기를 하였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6·25와 이승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중공군이 지금 침략한 것은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인지 모른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북진통일이 성공한 이후 한반도가 당면하였을 위기를 설명한다.
“만일 소련(이 대통령은 북한군을 소련의 괴뢰라고 보았기에 이런 표현을 쓴 듯하다)이 한국 국경 너머로 후퇴하고, 국제연합에서 이제는 특권이나 이권들을 흥정하게 되었더라면, 국제연합과 미국 사람들은 소련과의 협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라도 했을 것이며 군사상의 승리만이 아니라 외교상의 승리라고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국제연합군 부대와 장비들은 조만간 철수되었을 것이며, 한국군은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는 너무나 긴 국경선을 점령하도록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미국 국민의 분노가 가라앉고 공산당의 평화선전 공세로 국민들이 잠잠해진 가운데 중공군의 준비가 끝났다면, 이들의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 현대적인 항공지원, 그리고 한국의 전 해안선을 둘러싼 해군작전 등을 저지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현재 해안선을 봉쇄하고 있는 함선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국 지배가 소련의 계획 안에 들어 있고, 북한군의 실패가 그들 계획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한국에 중공군을 끌어들인 것은, 국제연합군이 철수한 뒤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가 닥칠지 모르나 민주주의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북진통일 됐어도 평화가 오지는 않았을 것
무초 미국대사로부터 ‘세계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해한 사람’이란 평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이 분석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고 북진통일이 되었더라면 곧 바로 평화가 찾아왔을 것인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유엔군의 주력(主力)이 철수하면 산악지방에 숨어 있던 공산 게릴라들이 월남식으로 준동하였을 것이다. 만주로 쫓겨난 김일성 일당도 중공의 비호 아래 병력을 투입하였을 것이다. 이런 식의 간접침략에 미국이 또다시 파병하는 것은 국민 여론상 불가능하였을 것이다(한미동맹 조약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되면 한국은 월남처럼 적화(赤化)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예언대로 중공군 개입은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었을지 모른다. 중공군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한국군은 증강되었고,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두 나라 지도부가 절감하게 되었다. 중공군 개입이 선물한 것이 국군의 강화와 한미동맹이었다.
월남은 17도선으로 일단 분단(分斷)되었다가 북쪽의 월맹이 정규군을 내려보내 남쪽의 게릴라를 돕는 월남전을 시작, 결국 공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북진통일을 하였더라도 중공과 김일성 세력이 만주에서 공산 게릴라를 들여보내고, 남한 내부의 공산세력을 조종하였더라면 한국의 힘만으로는 대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공군 개입의 불법성(不法性)과 침략성을 용서할 순 없다.
‘축복으로 위장한 재앙’
역사는 도전(挑戰)과 응전(應戰),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서 많은 기적과 역전(逆轉)의 드라마를 만들면서 흘러간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 게 역사이다.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 있지만, ‘축복으로 위장한 재앙’도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가난을 물리치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국민들의 정신력을 타락시킨 점은 없는가? 국가적 생존투쟁 의지, 특히 자주국방 의식이 약해지니 사소한 데 목숨 거는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그런 가운데 북한은 핵무장에 성공하고 한국 안에 거대한 종북(從北)세력을 심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 자위적 핵무장을 포기한 한국은, 미국이 주한미군을 북(北)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망)를 배치하겠다고 해도 중국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리는 나라로 전락하였다.
북한의 핵개발을 돕고, 북한의 인권탄압을 비호하고, 종북세력과 연대(連帶)한 세력이 선거를 통하여 집권하면 한국의 반공 자유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게 될 것이다. 4조 달러의 외환(外換) 보유고를 가진 중국, 핵무장한 북한 정권, 권력을 잡은 종북연대세력이 한편으로 정렬할 때 권력을 놓친 보수(保守)세력이 냉소적으로 변한 일본과 태평양 너머에 있는 미국과 손잡고 대항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한국인이 1953년 휴전 이후 수백만 명이 흘린 피를 딛고 누린 번영과 자유는 ‘축복으로 위장한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수고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생존투쟁의 의지를 잃은 부자 나라의 배부른 군대가 야윈 늑대 같은 거지 군대에 먹힌 사례는 역사책에서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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