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가 해임으로 전역한 이유
‘아메리칸 시저’ vs ‘전쟁광’
당시 맥아더의 나이는 71세.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상하양원 합동회의 고별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질 뿐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52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었다. 맥아더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업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을 이룬다. ‘태평양전쟁’ 전문가인 《맥아더》의 저자 리처드 B. 프랭크는 방대한 자료 수집 외에도 권위 있는 역사가들의 조언을 받아, 공정하고 입체적으로 맥아더라는 인물을 그려내려고 애썼다. 책 뒷부분에서는 맥아더의 경력과 통찰력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해 최근 미국의 군사전략을 평가하기도 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1950년 9월 15일 지휘함 마운트 매킨리 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직접 지휘하며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맥아더는 어떤 부분에선 동시대 거의 모든 군인이 가졌던 생각을 초월한 군인이었다. 1941년 독일의 공격을 받고도 소련이 살아날 것으로 전망했으며, 1951년에는 마오쩌둥이 단지 스탈린의 충실한 하인에 불과하다는 통념을 반박했다. 경제와 인구학의 측면에서 미국인들을 위한 가장 밝은 미래의 지평선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 있다고 확신한 통찰력 있는 지성인이었다. 한편 그에게는 전쟁광, 불복종의 대명사, 과대망상증 환자, 마마보이, 오만한 사기꾼, 지독한 거짓말로 중대한 실패를 감춘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평생 따라다녔다.
한국전쟁 중 맥아더가 해임당한 이유는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불복종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지 못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개입을 확인한 이후에는 한반도에 중국 국민당의 병력을 투입하고 미 해군과 공군이 중국 본토를 폭격하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즉각 해임했다.
저자 리처드 B. 프랭크는 “맥아더를 고전적 비극의 영웅으로 볼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모든 비극 속 영웅처럼 맥아더가 가진 위대한 재능은 파멸적인 단점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단점이란 맥아더가 자신은 운명의 도구이며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이 국가와 역사를 변화시켜 자신의 운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확신한 점이다.
▲'맥아더' 리처드 B. 프랭크 지음(왼쪽부터), 1951년 4월 19일 맥아더가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고별연설을 하는 모습, 1945년 9월 2일 미주리 호 함상에서 거행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장면.
뛰어난 지적 능력과 타고난 체력
맥아더는 1880년 아칸소 주 리틀록 병영에서 태어났다. 대다수 전기 작가들은 그가 엄청난 지적 능력과 뛰어난 기억력, 빼어난 외모,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녔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타고난 체력이었다. 그는 동년배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젊었으며 수십 년간 그것을 유지했다.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존재는 부모였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남북전쟁으로 뛰어난 무훈으로 명예훈장을 받아 명성을 떨친 장군이었다. 어머니 핑키는 아들에게 남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더글러스에게 자신이 운명의 도구라는 믿음을 주입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들이 55세가 될 때까지 대부분 함께 살며 곁에서 이 말을 반복했다. 맥아더는 정말로 자신이 운명의 도구이기 때문에 숙명적인 역할을 다할 때까지 신의 보호를 받을 거라고 믿었다. 맥아더는 두 번째 부인 진과 결혼할 때까지 정신적으로 어머니의 영향 아래 살았다.
맥아더보다 20세 연하였던 진은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맥아더는 어머니와 두 번째 부인 같은 강한 여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일본을 점령했을 때 여성 해방을 최우선 개혁 과제로 두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맥아더의 첫 근무지는 당시 미국의 점령지였던 필리핀이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공을 세우고 ‘용감한 자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맥아더는 1919년 39세로 최연소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재직 중 교과 과정을 확대해 사회과학과 현대 군사사를 포함해 생도들이 미국 사회와 좀 더 자주 교류하고 그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책임을 부여하려고 애썼다. 1930년 맥아더는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대공황의 여파로 육군 예산이 대폭 삭감된 가운데 맥아더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육군의 장교 교육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싸웠다. 한편 과도한 시위 진압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32년 실직 상태에 있던 많은 참전용사가 참전 보너스 상환을 보장하는 법안 통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진압군을 이끌었던 맥아더는 시위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하며 시위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육군은 물론 맥아더도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었다. 이 사건은 그다음 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가 당선됨으로써 공화당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맥아더가 1944년 2월 21일 두 번째 아내 진과 아들 아서 4세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왼쪽부터),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가 극적으로 필리핀에 귀환하는 모습. 맥아더가 일본 점령 시절 찍은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히로히토 일황과 처음 만났을 때 촬영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를 필리핀 원수로 임명해 해외로 내보냈다. 필리핀에서도 맥아더는 정부 관계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군 경력을 접을 수 있었던 그 시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부활했다. 그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일본 점령 당시 일본의 개혁을 이끌었다. 맥아더는 군인 신분임에도 공화당 지지자임을 당당히 밝혔고 대통령 예비선거에도 두 차례 출사표를 던진 경력이 있다. 그를 조직적으로 대통령으로 추대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그가 발굴해 참모로 기용한 아이젠하워는 이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리더십 원칙 : 적응성과 대담성
저자 프랭크는 맥아더의 리더십 원칙을 ‘적응성’과 ‘대담성’이라고 정리한다. 군 지휘관이자 최고 관리자로서 맥아더는 놀라운 적응성을 보여주었다. 상사나 부하 직원의 제안 가운데, 좋은점을 가려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능이 뛰어났다. 남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데 능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에서 과감한 대담성을 보여주었지만 그의 대담성은 때로 무모함으로 바뀌어 전세를 불리하게 이끌기도 했다.
맥아더는 부하들을 판단하는 첫 번째 자질로 충성심을 꼽았다. 부하들이 그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도록 강요했으며, 충성스러운 소수 인원을 거쳐 모든 사항이 위로 전달되도록 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로 정보의 질과 양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맥아더가 즐겨 사용한 방법은 부하들 사이에 경쟁관계를 조장하고 서로 싸움을 붙이는 것이었다. 동기유발자로 칭찬과 아첨의 효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맥아더 본인은 충성심을 보일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럴 필요성이 별로 없었다. 육군참모총장이 된 뒤, 군에서 그를 제어할 상관은 없었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 중 맥아더는 전장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했다. 정모를 즐겨 쓰고 무기를 거의 소지하지 않은 채 지팡이를 들고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고 다녔다.
1·2차 세계대전은 그를 가장 진급이 빠른 군인이 되게 했고, 70대까지 현역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다. 이는 민간인 상관들, 즉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정치 지도자들과 다양한 문제로 충돌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예로운 퇴직 대신 해임으로 군 경력을 마친 것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었을까. 6·25전쟁이 발발한 지 65년이 지났지만, 전쟁은 여전히 휴전 상태일 뿐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한국에서 ‘노병’ 맥아더는 죽지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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