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시대의 신(新)노인
"평균수명 100세까지는 간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하라"
고령사회로 치닫는 한국에서 '노인(老人)'이라는 말에는 어느덧 사회·경제적 '부담'이라는 은유(隱喩)가 덧씌워지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역설(逆說)이다. 한국전쟁을 겪고 살아나 헐벗고 가난한 최빈국(最貧國)을 이렇게 키운 그들이 이제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 존재로 여겨지니 말이다.
고령 계층은 이대로 우리 사회의 주역에서 점점 물러나야만 하는 걸까. 활기차고, 당당하고, 생산적인 노년의 삶은 불가능한 것일까. 일본에서 이 같은 개념의 '신(新)노인'을 주창해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발전시킨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98) 박사는 "나이가 들어서도 얼마든지 건강하고 창조적인 삶을 펼칠 수 있고, 그렇게 돼야 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100세를 앞둔 나이지만 여전히 일본 최고 스타 의사로 활동하는 그는 6일 장수의학연구소를 개설하는 가천의대 초청으로 기념 특강차 내한했다. 히노하라 박사와 국내 장수의학 연구 최고 권위자인 서울대 박상철(생화학)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 가천의대 길병원 이길여(산부인과 전문의) 이사장이 '건강 장수시대의 삶'을 주제로 5일 좌담회를 가젔다. 올해 60세인 박상철 교수는 이날 '평생을 인생의 현역'으로 살아가겠다는 90대와 70대 두 의사 앞에서 톡톡히 막내 취급을 당했다.
◆과거의 노인 개념을 버려라
히노하라 박사=일본은 현재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1%이다. 도쿄와 그 주변 지역에는 75세 이상 인구가 약 1200만명 살고 있다. 이들이 생산력 있는 계층이 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는 없다. 그러려면 노인 스스로 건강해져야 하고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박상철 소장=일본의 평균 수명은 83세이고, 건강 수명 즉 장애 없이 독립생활이 가능한 나이는 75세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은 79세이지만 건강 수명은 67세이다. 건강하지 않은 고령 계층이 너무 많다는 것이 큰 문제다.
이길여 이사장=그래서 장수의학 연구가 필요하다. 아무리 첨단의학이 발전해도 이미 질병 후유증으로 고생하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고령 계층이 질병에 걸리지 않고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의학적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다.
히노하라=독립생활의 의미도 현대의학의 발달로 바뀌고 있다. 퇴행성관절염이 있어도 인공 관절을 넣고 잘 걸어 다닌다. 심장병이 있어도 심장박동 보조기를 차고 돌아다닌다. 도쿄 노인의학연구소에 따르면 1977년 70세인 사람의 건강과 체력 수준이 2007년에는 87세에 해당되는 것으로 조사된다. 30년 사이 17년이 젊어진 것이다. 이제 정년 퇴임 나이를 없애거나 75세로 10년 늘려야 한다. 캐나다는 아예 정년을 없앴다. 열정과 건강만 유지하면 과거의 '노인'이 아니다. 우리 세대는 전쟁을 겪으며 극심한 어려움을 치열하게 이겨냈다. 힘든 걸 모르는 주니어 세대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
이=노인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 의미가 너무 커서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히노하라=영어권에서는 '늙은'이라는 의미의 '올드'(old)보다는 존중의 의미를 지니는 나이 지긋한 '엘더리'(elderly)라고 한다. 우리의 몸은 늙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것이다.
박=세계에서 세번째로 평균 수명이 긴 홍콩에서는 노인을 오랫동안 푸르게 산다는 뜻으로 '장청인(長靑人)이라고 부른다.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98세의 히노하라 박사(가운데)와 77세의 이길여 이사장(왼쪽)은 젊은이처럼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올해 60세인 박상철 교수는 두 사람 앞에서 막내 취급을 당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열정을 품어라
히노하라=100세를 앞둔 나는 아직도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오른다. 운동 부족을 보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항상 걸어서 근육과 뼈의 균형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노년기를 망치는 최대 주범은 낙상 골절이다. 한번 뼈가 부러지면 회복이 잘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노년층에 만약을 대비해 잘 구르는 연습을 하라고 말한다. 손에 든 가방이나 물건에 연연하지 말고 잘 넘어져야 한다(웃음). 나이가 들면 척추에 골다공증이 생기면서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나는 걸을 때 체중이 뒤로 실리도록 발뒤꿈치부터 땅에 닿게 한다.
이=내 걸음이 하도 빨라서 젊은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때가 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이기도 하지만 뭔가를 해야 한다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하려는 정열이 나를 건강하게 하고 젊게 사는 최고 비결인 것 같다.
히노하라=그렇다. 정년 퇴임했다고 위축되지 마라. 그때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열정이 솟아오른다. 그전까지는 가족을 위해 봉사를 했다. 이제 은행원도 아니고 공무원도 아니다. 내 의지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참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숨겨진 내 안의 능력과 재능 유전자를 찾아내 새로운 삶을 즐겨라. 의학적으로 인간 수명은 120세까지 살 수 있다고 증명됐다. 평균 수명이 100세는 간다. 그 시간을 어떻게 열정 없이 사나. 많은 사람들은 장수는 타고난 유전자 덕으로 안다. 물론 지금까지 내 머리카락이 안 빠진 것은 유전자 덕이다. 하지만 30세 때의 체중을 지금까지 유지한 것은 나의 노력이다.
박=평균 수명에는 젊은 사람의 사고 사망이나 질병사가 포함되기 때문에 현재 살고 있는 고령 세대의 평균 사망 나이는 그보다 훨씬 늦다. 일본 노인 계층의 평균 사망 나이는 벌써 92세이다. 우리나라도 곧 그렇게 된다. 상황이 이럴진대 지금 중장년층은 인생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 인생을 건강 장수로 보석(寶石)처럼 살 것인지, 병든 노인으로 화석(化石)처럼 지낼지는 개인의 노력에 달렸다. 100세인의 공통적인 특징이 쓸데없는 짓 하지 않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히노하라=내 목소리는 여전히 명료하고 말하는 속도도 빠르다. 그 이유는 내가 복식호흡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항상 복식호흡을 하면서 발성 연습을 했다. 스포츠의학에서 운동선수들에게 복식호흡 발성을 연습시켰더니 모든 기록이 좋아졌다는 연구도 있다. 아이들은 불면증이 없는데 엎드려 자면서 복식호흡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엎드려 잔다. 2~3분이면 잠들고, 푹 잔 후 금방 깬다. 동물들은 엎드려 자는데, 불면증이 없다(그는 편하게 엎드려 자기 위한 베개를 직접 고안했고, 이를 여행 다닐 때도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자원봉사는 먼저 산 세대의 의무
히노하라=우리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다.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일년에 강의를 170번 정도 다닐 정도로 바쁘게 살지만 일주일에 한번은 꼭 학교에 가서 어린 학생들에게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고 강의한다. 이는 우리 세대의 의무이다. 노년 계층은 타인을 위해 사는 정신이 있어야 품위 있고 아름답다. 그런 이타심이 노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열정을 만든다. 자원봉사야말로 우리 세대가 꼭 해야 할 소중한 생활이다.
이=후배를 키워주고, 주변에 사랑을 나눠주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신노인'의 진정한 생활 자세라고 본다. 그런 건강한 노인이 많을수록 사회가 발전한다. 미국 노인들은 쌓이는 자원봉사 인증 기록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긴다.
박=우리 연구소에서 고령 계층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하면 순식간에 인원이 마감된다. 강의시간에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만큼 풍요로운 삶에 대한 욕구는 높으나 그 동안 이를 뒷받침하는 인프라가 없었다는 의미다. 국가가 학생을 의무 교육시키듯이 이제는 노년 계층의 품위 있는 삶을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제공해야 한다.
이=일본이 장수 국가가 된 것은 훌륭한 복지시스템이 있는 이유도 있지만 걷기 좋은 환경을 만든 덕도 있다고 본다. 고령 계층의 건강을 유지 증진시키는 데 걷기만한 효율적인 운동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마음 놓고 걷기 어려운 환경이다. 고령사회 대비는 이런 생활 밀착형 사업부터 해야 한다.
'98세 현역' 히노하라 박사는 노하라 박사의 걷는 모습과 목소리를 들으면 100세를 코 앞에 둔 나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활기찼고, 정열이 넘쳤다.
그는 1950년대 유학을 거친 신세대 심장내과 전문의였다. 세계 최초로 식도에 청진기 같은 기구를 넣어서 심장질환을 진단하는 기술을 개발한 인물이다. 그러다 1970년 적군파 비행기 납치사건 때 우연히 인질로 갇히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생환을 한 그날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한 그는 노인을 위한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250여권의 건강 서적을 쓰면서 일본 최고의 장수의학 전문가가 됐다. 지난 2000년에는 '신노인회'를 조직해 활기찬 노년의 삶을 통한 자원봉사운동을 이끌고 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그의 건강법은 일상생활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매일 3~4시간씩 책과 논문을 쓰고, 일기를 적는다. 음악을 즐기고, 향기로운 에세이를 즐겨 읽는다. 항상 걸으며, 하루 10시간 병원 일을 한다.
그는 하루 1300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하는데, 단백질이 그중 16%를 차지한다. 일본인 평균 12%보다 많다. 뇌활동을 위해서는 충분한 단백질이 필수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밥을 통한 당질 섭취는 일반인의 절반으로 줄이고 대신 매일 아침 올리브 오일을 큰 스푼으로 떠먹는다. 혈관을 부드럽게 하고 피부를 좋게 한다는 이유다. 매일 우유와 생선을 먹고, 일주일에 두번만 지방이 없는 고기를 100g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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