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자화상(自畵像) - 서정주

풍월 사선암 2015. 3. 26. 23:52

<Pearl Harbor - Tennessee (Piano Cover) Simon Egholm>

 

 

자화상(自畵像)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이 작품은 작자(作者)23()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다.

 

자신의 조언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진이경을 위해 서정주의 자화상을 적은 편지를 준비한 박노아는 진이경의 죽음 앞에 오열했다. 조방울은 학생이 자식이라며 자식이 죽었는데 이래요? 얼른 일어나라라고 위로했지만 박노아의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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