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엄숙한 시간, 가을 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풍월 사선암 2015. 3. 6. 10:29

엄숙한 시간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우는 것이다.

 

지금 이 밤중 어디선가 웃고 있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밤중에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걷고 있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나에게로 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가을 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시를 말하다 - 문태준 l 시인

 

릴케는 "밤마다 무거운 대지가/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가을')라고 가을을 노래했다. 여름의 폭우와 화로 같은 일광(日光)이 물러가고 가을이 찾아왔을 때, 대기가 냉담해졌을 때, 잎사귀가 말라 가고 짙었던 나무 그늘이 엷어질 때 읊조리게 되는 시가 릴케의 시이다.

 

릴케는 많은 글에서 위대한 내면의 고독을 즐길 것을 권했다. "고독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위대하며 견뎌 내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가 맞이하는 밤 가운데 가장 조용한 시간에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몇 시간이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바로 이러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언술했다. "고독을 버리고 아무하고나 값싼 유대감을 맺"지 말고, "우리의 심장의 가장 깊숙한 심실(心室) "에 고독을 꽉 채우라고 권면했다.

 

<형상시집>에 실린 이 시는 가을의 충일함을 노래함과 동시에 고독한 내면과 실존적 불안에 대해 말한다. 바람과 남국의 햇빛은 열매를 익게 해 가을의 풍요를 완성하지만, 그와 같은 가을의 시간은 혼자인 사람이 잠을 미루고 고독한 내면과 마주하거나, 책을 읽고 장문의 편지를 쓰는 시간이기도 하다.(‘긴 편지는 릴케의 생활 습관을 떠올리게 한다. 릴케는 평생에 걸쳐 지인들에게 편지 답장을 쓰는 데에 오전 시간을 할애했으며, 책으로 출간된 그의 편지는 약 7,000통에 이른다.) 시행의 전개에 따라 각 연의 행이 한 행씩 늘어나는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시는 자연의 충만과 인간 존재의 본원적 독거(獨居)를 대비시킨다. 또한, 자연이 한껏 차서 가득해지는 때가 가을이듯이 단독자인 인간의 내면 또한 풍성해지는 때가 가을이며, 그것은 고독을 행로로 할 때 가능하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

 

이 시가 실려 있는 <형상시집>은 말 그대로 릴케가 천착한 '형상' 시학에 기초한다. 이때 형상은 "마음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을 온통 눈에 보이게 말하는" 것을 일컫는다. 형상은 조형적 감각으로 창조된 시적 기법에 해당하는 셈이다. 응시와 집중, 그리고 그것을 통한 사물과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구상적인 진술 등은 로댕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릴케의 이른바 사물시들이 창작된 중요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로댕론>을 쓰고, 로댕의 비서로 일하기도 한 릴케에게 로댕은 "위대하고 조용하며 힘찬 모순"이었으며, "전 생애에 걸쳐 일하고 있는 그(로댕)의 모습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성스러"운 것이었다. 릴케는 로댕으로부터 "자연 앞에서 화가나 조각가처럼 냉혹할 정도로 사물을 파악하고 모사(模寫)하려는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한 산문에서 릴케는 조각가 로댕으로부터 창작의 깊이와 불멸성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고 쓰기도 했다.

 

성경과 덴마크의 작가 옌스 페테르 야콥손(Jens Peter Jacobson)의 책을 어디를 가나 꼭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릴케. 기혼녀 루 살로메와 영혼을 교감했던 릴케(릴케가 '르네'라는 이름을 '라이너'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나 글씨체를 또박또박 쓰는 글자체로 바꾼 것도 루 살로메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사랑과 고독과 밤과 죽음에 헌정한 2000편이 넘는 시로 독일 현대시를 완성시킨 릴케. 한 귀부인에게 정원의 장미를 꺾어 주다가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죽음을 둘러싼 신비한 루머에 휩싸였지만, 1926년 백혈병으로 영면하면서 생전에 직접 쓴 "장미여, ,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싸인 눈꺼풀들 속/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라는 시를 그는 묘비명으로 남겼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2.4-1926.12.29) 체코의 프라하에서 철도회사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고급관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1886년부터 1891년까지 육군 유년학교에서 군인 교육을 받았으나 시적 소질이 풍부한데다가 병약하여 중퇴하였다. 1895년 프라하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문학 수업을 하였고, 뮌헨으로 옮겨 가 루 잘로메(루 살로메)를 알게 되어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녀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한 것이 그의 시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2년 파리로 건너가 조각가 로댕의 비서로 일하며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는다. 1919년 스위스의 어느 문학 단체의 초청을 받아 스위스로 갔다가 그대로 거기서 영주하였다. 1926년 백혈병으로 생애를 마쳤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만년에는 두드러질 정도로 명상적신비적으로 되었다. 작품으로 시집 <형상시집>, <두이노의 비가>, 소설 <말테의 수기>, 저서 <로댕론>, <서간집>